방랑의 마음
- 오상순 / <동명>(1923) -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오 ---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나의 혼(魂).
바다 없는 곳에서
바다를 연모(戀慕)하는 나머지에
눈을 감고 마음 속에
바다를 그려 보다
가만히 앉아서 때를 잃고.
옛 성 위에 발돋움하고
들 너머 산 너머 보이는 듯 마는 듯
어릿거리는 바다를 바라보다
해 지는 줄도 모르고 …….
바다를 마음에 불러일으켜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
깊은 바닷소리
나의 피의 조류(潮流)를 통하여 오도다.
망망(茫茫)한 푸른 해원(海原) …….
마음 눈에 펴서 열리는 때에
안개 같은 바다와 향기
코에 서리도다.
* 작품해설 : 이 시는 두 편으로 된 연작시로서, 1923년 <동명>18호에 실린 작품이다. 하루 200개피
의 줄담배를 피우며 일생을 독신으로 외롭게 살다 세상을 떠난 공초(空超) 오상순은 변영로와 함께
『폐허』 동인 활동을 하면서 기독교를 버리고 입산과 환속을 거듭하는 등 숱한 기행(奇行)으로 화제
를 뿌렸던 시인이다. 그는 평생을 이 작품의 제목처럼 ‘방랑의 마음’으로 전국을 떠돌며 일제 식민
지 치하의 삶을 ‘허무와 세속에의 일탈(逸脫)’로 영위하려 하였다. 이 작품을 쓸 무렵, 시인은 금
강산 신계사 등 전국 사찰을 전전하며 방랑생활을 시작했으며, 그 때의 심정을 담담하게 노래한 대표
작이다. 바다와의 합일을 통해 자유와 생명을 갈구하는 젊은 날의 이상을 노래한 작품으로, 대자연과
의 합일이 주관적인 내면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때때로 한정된 현실로부터 벗어나 어떤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게 된다. 그 곳은 실재
하는 곳일 수도 있고, 가상의 세계일 수도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이 힘들고 불안하고 불만족스
러울수록 동경의 마음은 더욱 더 커지게 마련이다. 이 시의 자아 또한 그런 동경의 대상으로서 '바다
'를 설정해 놓고 있다. 바다는 막힌 데 없이 망망하게 터져 있으며 풍성한 물결이 출렁거리는 곳이기
에 현실의 한정된 울타리 속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기에는 충분한 곳이다. 바다를 그
리워하면서 방랑하는 자아의 영혼은 마침내 바다와의 합일을 이루게 된다. 그래서 마음의 눈을 통해
바다는 다가오고, 그 향기마저 코에 서린다고 한다. 공초는 1920년대 초의 퇴폐주의 풍조 속에서 허
무적이고 어두운 폐허를 그의 시사상의 원천으로 삼았다. 그는 태초, 허무, 폐허, 태고 등의 용어를
많이 사용하여 원초의 상태에 대한 향수를 가졌었다. 공초의 작품 세계에 나타난 허무는 개인을 넘어
서 그 시대를 살았던 젊은 지식인들 전체의 아픔으로 와 닿는 것이다. 만년에는 종교적 색채가 가미
되면서 허무를 초극하여 생명의 신비를 예찬한 철학적 단상으로 나타난다.
힘의 동경
- 오상순 / 공초오상순시선(空超吳相淳詩選), 자유문화사, 1963 -
태양계에 축이 있어
한 번 붙들고 흔들면
폭풍에 사쿠라 꽃같이
별들이 우슈슈
떨어질 듯한 힘을
이 몸에 흠뻑
느껴보고 싶은
청신한 가을 아침―
새 하늘이 열리는 소리
- 오상순 / 공초오상순시선(空超吳相淳詩選), 자유문화사, 1963 -
낙엽을 밟으며
거리를 가도
서럽잖은 눈망울은
사슴을 닮고......
높은 하늘 속
날개 펴고 훠얼 훠얼
날으고 싶은
맑은 서정은 구름을 닮아라.
바람을 타지 않는
어린 갈대들......
물결이 거슬러 흘러도
매운 연기가 억수로 휩쓸어도
미움을 모르는 가슴은
산을 닮았다
바다를 닮았다
하늘을 닮았다.
......
이 밤
생각에 지치고
외로움에 지치고
슬픔에 지치고
사랑에 지치고
그리고
삶에 지친
모든 마음들이 이리로 오면
생각이 트이고
외로움이 걷히고
슬픔이 걷히고
사랑이 열리고
그리고
새 삶의 길이 보이리니
그것은 어쩌면 하늘의 목소리......
오오
이 밤의 향연이여
새 하늘의 열리는 소리여.
첫날 밤
- 오상순 / 공초오상순시선(空超吳相淳詩選), 자유문화사, 1963 -
어어 밤은 깊어
화촉동방의 촛불은 꺼졌다.
허영의 의상은 그림자마저 사라지고......
그 청춘의 알몸이
깊은 어둠바다 속에서
어족(魚族)인 양 노니는데
홀연 그윽히 들리는 소리 있어,
아야......야!
태초 생명의 비밀 터지는 소리
한 생명 무궁한 생명으로 통하는 소리
열반(涅槃)의 문 열리는 소리
오오 구운의 성모 현빈(玄牝)이여!
머언 하늘의 뭇 성좌는
이 밤을 위하여 새로 빛날진저!
밤은 새벽을 배(孕胎)고
침침히 깊어 간다.
* 오상순(吳相淳, 1894-1963)
별칭 : 공초(空超), 상현(想絢), 선운(禪雲)
1894년 서울 출생
1900년 어의동학교에 입학
1906년 경신학교 졸업
1918년 일본 도시샤대학 종교철학과 졸업
1920년 김억, 남궁벽과 함께 『폐허』 동인으로 참가
1963년 사망
시집 : 『공초오상순시집』(1963), 『방랑의 마음』(1977),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나의 영혼』
(1983), 『아시아의 마지막 밤 풍경』(1983), 『허무혼의 선언』(1987).
호는 선운(禪雲), 공초(空超). 1894년 8월 9일 서울 태생. 경신학교를 거쳐 일본 도시샤대학(同志社
大學) 종교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56년 예술원상, 1962년 서울시 문화상을 각각 수상한 바 있다. 김
억‧남궁벽‧황석우 등과 함께 『폐허』의 발간에 참여하여, 그 창간호에 「시대고와 희생」이라는 글을
발표함으로써 문학활동을 시작하였다. 사후에 동료와 제자들에 의해 출간된 『공초 오상순 시집』
(1963)이 있을 뿐 생전에는 한 권의 시집도 남기지 않았다. 그의 작품 경향은 한마디로 ‘허무’의
탐구와 그 초극 의지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방랑의 마음」, 「허무혼의 선언」, 「폐허
의 낙엽」 등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잘 나타난다. 하지만 그의 시는 생경하고 추상적인 시어의 남발
로 인해 시적 감응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방랑의 마음 / 낭송 최경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