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
- 신경림 / <문학예술>(1956) -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농무(農舞)
- 신경림 / <창작과 비평>가을호3호 1971 -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주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 꺽정이&서림이 :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 나오는 인물.
꺽정이 : 명종연간 구월산을 무대로 활동한 의적인 임꺽정을 가리키는 것(민중적 영웅의 상징)
서림이 : 임꺽정을 모사였으나 결국 권력에 붙어 임꺽정을 배신한 인물.
* 쇠전 : 우시장(牛市場). 소를 파는 시장.
* 도수장 : 도살장(屠殺場). 짐승을 잡는 곳. 삶의 울분 토로의 분위기 연출
* 막이 내렸다 : 농민들의 슬픔 예고
* 학교 앞 소줏집 : 삶의 피로를 푸는 곳. 애환 어린 곳
* 답답하고 / 산구석에 처박혀 : 감정의 직설적 표출(울분의 토로)
*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 울분의 역설적 표출
* 작품해설 : 이 시는 산업화의 거센 물결로 인해 급속도로 와해되어 가던 1970년대 초반의 농촌을
배경으로 농민들의 한과 고뇌를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농촌의 절망과 농민의 울분을 고발, 토로하
고 있으면서도, 그 울분이 선동적이거나 전투적인 느낌으로 발전되지 않는다. 그것은 날라리를 불고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드는 신명으로 끝나는 작품 구조에 의해서 교묘한 역설과 시적 운치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울분과 절망을 정반대의 신명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농민들의 처절
한 몸짓을 통해 그들의 아픔이 역설적으로 고양되는 효과를 얻게 된다.
연 구분이 없는 20행 단연시 구조의 이 시는 내용상 4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단락은 1~6행으로 농
무가 끝난 뒤 농민들이 소줏집에서 답답하고 고달픈 심정을 술로 달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징
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로 시작되는 1행은, 농무가 두렛일의 흥겨움보다는 농민들의 자조적인 한탄과
원한의 몸짓임을 나타내기 위한 예고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농무가 끝난 뒤의 텅 빈 운동장이
주는 공허감은 이젠 더 이상 농무에 신명을 느낄 수 없는 농민들의 의식을 반영한 것이자, 이런 현실
에 대한 공연자의 안타까움과 공허함을 표한한 것이다. 그러므로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
한그들은 텅 빈 마음과 고달픈 삶을 그저 술로 달랠 뿐이다. 2단락은 7~10행으로 농악패에 대한 농
민들의 냉담한 반응을 통해 예전과 달라진 농촌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그들이 옛날의 풍습대로 꽹
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 보아도, 신명나게 놀아 주던 어른들 대신, 조무래기들만 악을 쓰며
따라붙거나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 철없이 킬킬대는 처녀애들뿐이다. 11~16행의 3단락은 비료
값도 안 나오는 농사를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나온 그들이 자신의 울분을 춤으로 삭이는 모습을 보
여 주고 있다. 춤을 추는 그들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거나 서림이처럼 해해대며 즐거워하지만, 결국은
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하며 자신들의 삶을 자학하거나 체념하고 만다. 임꺽정과 서림
은 민중을 대표하는 인물들로, 이들을 구체적으로 거명한 까닭은 농민들의 한과 슬픔이 다만 일회적
인 것이 아니라, 민중의 삶과 함께 해 온 역사적인 것임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 배려로 볼 수 있다.
4단락은 17~20행으로 자신의 한과 고뇌를 신명난 춤을 통해 극복하는 모습이다.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이르렀을 때, 농민들의 현실에 대한 분노는 살의가 느껴질 정도로 극에 달하지만, 오히려 날라
리를 불고 덩실덩실 어깨를 흔드는 신명으로 바뀜으로써 그들의 비애가 그만큼 심화되어 있음을 역설
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농민들이 추는 춤은 그들이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현실에 대한 불
만과 저항의 강한 몸짓이며, 자신들의 고뇌와 한의 뜨거운 발산임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생활 터전
을 지키려는 농민들의 안타까운 몸부림을 농촌의 일상 언어를 통하여 사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농민
들의 정취와 정감을 물씬 느끼게 해 주는 한편, 농민들의 격한 감정을 직접적인 서술로 표출하면서도
농무의 동작이나 농악기의 소리로 적절히 제어함으로써 탄탄한 서정성을 아울러 갖추고 있다. 가난과
절망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농민과 소외된 농촌을 상기시켜 주는 뛰어난 문학성으로 말미암아 이
시는 제1회 만해 문학상의 영광을 안게 되었다.<양승준,양승국 공저 [한국현대시 400선이해와 감상]>
목계 장터
- 신경림 / <농무>(1973) -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 볕도 서러운 방물 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 박가분 : 옛날 여인들이 쓰던 화장품의 하나인 분(粉)의 이름
* 작품해설 : 이 시는 1910년까지 활발하게 운영되었던 남한강안의 수많은 나루터 중 목계장터를 중
심으로 써 내려간 시이다. 형식상 민요적 율격이 두드러지며, 내용상으로는 향토적 및 서정적인 내용
을 느낄 수 있다. 시대적 상황이나 들꽃, 잔돌, 방물장수, 떠돌이, 구름, 바람 등 시어가 상징하는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먼저 표현상 특징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전통적인 민요의 리듬을 연
상시키는 4음보 율격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 되라하네. 에서 알 수 있다. 또한 표현상 특징으로 두드러지는 것은 1,2행을 마지막 행에서 변주하
고 있다는 점이다. 변주란 어떤 주제를 바탕으로, 소재ㆍ형태ㆍ방식 따위를 변형하여 표현함. 또는
그런 표현.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인이 마지막 행에서 변주를 통해 강조하고자 했던 의미
는 무엇일까? 구조상으로는 먼저 수미상관 구조처럼 안정된 느낌을 줄 수 있자. 또한 의미를 강조하
는 효과도 거둔다고 할 수 있겠다. 목계장터는 근대화가 이루어지기 전에 서울로 가는 길목의 하나로
큰 시장이 서기도 한 곳이다. 그러나 근대화 과정에서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농촌 공동체로서 민중
들의 애환과 숱한 사연이 배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구름, 바람, 잔 바람, 방물장수는 떠돌이의 삶을
의미하낟 라겠다. 세속적인 일상으로부터 벗어난 자의 자유로움과 정신적인 주유를 의미하기도 하다.
잔돌, 들꽃은 한 곳에 정착하여 삶을 인내하는 것들로 대변될 수 있다. 마지막에 나오는 천치는 순진
무구하면서도 탈세속적인 삶을 사는 사람을 말하낟. 마지막 행에서의 변주가 의미하는 것은 차라리
천치가 되어 짐을 부리고 앉아 쉬고 싶지만 몸은 떠돌 수밖에 없는 처지에 대한 바탕을 말하는 것이
라고 할 수 있다.
파 장(罷場)
- 신경림 / <창작과 비평>18호. 1970 / 시집<농무> 1973-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 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罷場)
* 작품해설 : 이 시는 어느 시골 장터에서 만난 농민들의 애환을 시간의 경과에 따라 진솔하고 토속
적인 묘사로 압축하여 표현한 작품이다. 이야기를 지니는 시인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 향토적인 정취
를 서정적으로 잘 형상화하고 있다. 하나의 연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이야기의 전개상 3부분으로 나
눌 수 있으며, 일상적인 언어의 적절한 구사를 통하여 민요적 리듬의식을 느끼게 하는 시이기도 하
다. 그런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시골의 장터는 항상 흥겹다. 그리고 이 장터는 농민들의 토론의 장이
자 정보의 교환처이다. 그래서 여기 저기 둘러 앉거나 서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다가
농사 짖기의 어려움이나 빚뿐인 농촌의 얘기에는 모두 서울로 뜨고 싶은 마음만이 앞선다. 이런 울적
한 이야기를 들으면 그들은 자포자기하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은 파장 무렵의 장에서 이것 저것
집안에서 필요한 것들을 사가지고, 달이 환한 마찻길로 접어들어서 무거운 발걸음 다시 집으로 향하
게 된다. 초라한 시골 장터의 사실적 묘사를 통하여 농촌 생활의 어려움과 이로 인하여 날로 증가하
는 이농의 문제를 간명하게 제시하기도 한다.
가난한 사랑 노래
- 신경림 / 가난한 사랑노래 / 실천문학사 / 2005년 07월 -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 신경림(申庚林), 1936-1997)
신경림 : 대학교수, 시인
출생 : 1936. 충청북도 충주
소속 : 동국대학교(석좌교수)
데뷔 : 1956년 문학예술 등단
수상 : 2009년 제19회 호암상 예술상, 2007년 제4회 시카다상
경력 : 2004~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2001 화해와전진포럼 상임운영위원
1936년 4월 6일 충북 충주 출생. 동국대 영문과를 졸업했고,
1955년 『문학예술』에 「갈대」, 「묘비」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이후 계속 침묵하다 1965년에 다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73년 첫 시집『농무』를 간행했고, 평론집 『한국 현대시의 이해』 등을 간행했다.
1974년 시집 『농무』로 만해문학상을 수상했고, 1981년 한국문학작가상, 1990년 이산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농무』(1973), 『새재』(1979), 『달 넘세』(1985), 『민요기행 1』(1985), 『남한강』
(1987), 『가난한 사랑노래』(1988), 『민요기행 2』(1989), 『길』(1990), 『갈대』(1996), 『어머
니와 할머니의 실루엣』(1999) 등이 있고, 평론집에 『한국 현대시의 이해』(1981),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1983), 『우리 시의 이해』(1986) 등이 있다.
신경림의 등단 작품인 「갈대」, 「묘비」 등은 대상을 농민으로 한정하지 않고 인간 삶의 보편적인
쓸쓸함과 고적함을 주된 분위기로 하고 있다. 첫 시집인 『농무』 이후 신경림의 시는 농민의 삶의
현장을 그린 시로 일관되어 있지만, 등단 초기의 서정성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의 시는 농민의
고달픔을 다루면서도 항상 따뜻하고 잔잔한 감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감동을 준다. 그의 시는 여타
의 노동시에 비해 강력한 울분이나 격렬한 항의, 개혁의 의지 등은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다. 이러한
특징은 신경림 시의 장점이자 한계로 지적되기도 하지만, 중간층의 독자를 확보하는 가장 큰 요인이
기도 하다.
『새재』 이후에 쓰여진 『민요기행』, 『남한강』, 『길』 등의 시집은 우리 것에 대한 시인의 애정
을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우리 민요와 지리 등을 소재로 하고 있다. 특히 장시집인 『남한강』은 농
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우리 역사를 바라보고자 한 시도로서, 서사적인 스케일을 보여주는 방대한
작품이다. 시집으로 『농무』(1973), 『새재』(1979), 『새벽을 기다리며』(1985), 『달넘세』
(1986), 『씻김굿』(1987), 『우리들의 북』(1988), 『가난한 사랑노래』(1988), 『남한강』(1989),
『쓰러진 자의 꿈』(1993), 『우리들의 복』(1989), 『저 푸른 자유의 하늘』(1989), 『갈대』
(1996),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1998), 『목계장터』(1999), 『뿔』(2002), 『낙타』(2008)
등이 있다.
가난한 사랑 노래(신경림) / 시낭송 시의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