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아름다운 문학

<박재삼>울음이타는가을강/자연/추억에서/밤바다에서/박애의별/한/흥부

이름없는풀뿌리 2023. 10. 24. 06:04
울음이 타는 가을 강 - 박재삼 / <춘향이 마음>(1962) -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자연 - 춘향이 마음 초(抄) / 박재삼 / <춘향이 마음>(1962) - 뉘가 알리 어느 가지에서는 연신 피고 어느 가지에서는 또한 지고들 하는 움직일 줄 아는 내 마음 꽃나무는 내 얼굴에 가지 벋은 채 참말로 참말로 사랑 때문에 햇살 때문에 못 이겨 그냥 그 웃어진다 울어진다 하겠네. 추억에서 - 박재삼 / <춘향이 마음>(1962) - 진주(晋州)장터 생어물(魚物)전에는 바다밑이 깔리는 해 다 진 어스름을, 울엄매의 장사끝에 남은 고기 몇마리의 빛 발(發)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 은전(銀錢)만큼 손 안닿는 한(恨)이던가 울엄매야 울엄매, 별밭은 또 그리 멀리 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 안 되어 손시리게 떨던가 손시리게 떨던가. 진주 남강(晋州南江) 맑다 해도 오명 가명 신새벽이나 밤빛에 보는 것을, 울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 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 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 밤 바다에서 - 박재삼 / <춘향이 마음>(1962) - 누님의 치맛살 곁에 앉아 누님의 슬픔을 나누지 못하는 심심한 때는 골목을 빠져 나와 바닷가에 서자. 비로소 가슴 울렁이고 눈에 눈물 어리어 차라리 저 달빛 받아 반짝이는 밤바다의 질정(質定)할 수 없는 괴로운 꽃비늘을 닮아야 하리. 천하에 많은 할 말이, 천상의 많은 별들의 반짝임처럼 바다의 밤물결되어 찬란해야 하리. 아니 아파야 아파야 하리. 이윽고 누님은 섬이 떠 있듯이 그렇게 잠들리. 그 때 나는 섬가에 부딪치는 물결처럼 누님의 치맛살에 얼굴을 묻고 가늘고 먼 울음을 울음을, 울음 울리라. 박애의 별 - 박재삼 - 그대를 보는 이 눈이 이를테면, 안 그럴까. 캄캄한 밤하늘 많은 별들 중에서 유독 반짝이며 한 별이 금을 그으며 휘황찬란히 다가오는 것과 같이 그렇게 감개를 섞어 이루어진 관계인데, 천년 만년 갈 것같이 느껴졌는데, 그대와 나는 불과 몇십 년 후면 하나의 유성으로 떨어지며 서러운 이별을 해야 하는 길이 운명으로 예비되어 있었나니. 이제는 서글프게도 별이 하나만 아니고 온갖 별이 박애(博愛)로써 박애로써 눈물을 글썽이게 되었네. 한(恨) - 박재삼 / 천년의 바람 / 민음사 / 1995년 11월 - 감나무쯤 되랴, 서러운 노을빛으로 익어 가는 내 마음 사랑의 열매가 달린 나무는! 이것이 제대로 벋을 데는 저승밖에 없는 것 같고 그거도 내 생각하던 사람의 등 뒤로 벋어 가서 그 사람의 머리 위에서나 마지막으로 휘드려질까 본데, 그러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안마당에 심고 싶던 느껴운 열매가 될는지 몰라! 새로 말하면 그 열매 빛깔이 전생의 내 전(모든) 설움이요 전 소망인 것을 알아 내기는 알아 낼는지 몰라! 아니, 그 사람도 이 세상을 설움으로 살았던지 어쨌던지 그것을 몰라, 그것을 몰라! 흥부 부부상 - 박재삼 / <춘향이 마음>(1962) - 흥부 부부가 박덩이를 사이 하고 가르기 전에 건넨 웃음살을 헤아려 보라. 금이 문제리, 황금 벼이삭이 문제리, 웃음의 물살이 반짝이며 정갈하던 그것이 확실히 문제다. 없는 떡방아 소리도 있는 듯이 들어 내고 손발 닳은 처지끼리 같이 웃어 비추던 거울면들아. 웃다가 서로 불쌍해 서로 구슬을 나누었으니. 그러다 금시 절로 면에 온 구슬까지를 서로 부끄리며 먼 물살이 가다가 소스라쳐 반짝이듯 서로 소스라쳐 본 웃음 물살을 지었다고 헤아려 보라. 그것은 확실히 문제다. * 박재삼(朴在森, 1933-1997) 1933년 4월 10일 도쿄 출생. 경남 삼천포에서 성장했으며, 고려대 국문과를 중퇴했다. 현대문학사, 대한일보사, 삼성출판사 등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박재삼은 한국 서정시의 전통적 음색을 재현하면서 소박한 일상 생활과 자연에서 소재를 찾아 애련하고 섬세한 가락을 노래했다. 제2회 현대문학신인상, 한국시인협회상, 노산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인촌상 등을 수상했다. 1953년 시 「강물에서」가 모 윤숙에 의해 『문예』에서 추천되고, 1955년 시 「정적」이 서정주에 의해 『현대문학』에 추천되었 으며, 같은 해 시조 「섭리」가 유치환에 의해 『현대문학』에 추천됨으로써 추천을 완료하였다. 1962년 첫 시집 『춘향이 마음』을 간행한 이래 시집 『햇빛 속에서』(1970), 『천년의 바람』(1975), 『어린 것들 옆에서』(1976), 『추억에서』(1983), 『아득하면 되리라』(1984), 『내 사랑은』(1985), 『대관령 근처』(1985), 『찬란한 미지수』(1986), 『바다 위 별들이 하는 짓』(1987), 『박재삼 시집』 (1987), 『사랑이여』(1987), 『울음이 타는 가을 강』(1987), 『다시 그리움으로』(1996), 『사랑하 는 사람을 남기고』(1997) 등 다수의 시집과 시 선집을 간행하였다. 수필집으로는 『울밑에 선 봉선 화』(1986), 『아름다운 삶의 무늬』(1987), 『슬픔과 허무의 그 바다』(1989) 등이 있다. 1997년 6월 8일 타계했다. 그의 시 세계는 시 「춘향이 마음」(1956)과 「울음이 타는 가을 강」(1959) 등으로 대표되는데, 그는 이런 시들을 통해 한국 서정시의 전통적 음색을 재현하면서 소박한 일상 생 활과 자연에서 소재를 찾아 애련하고 섬세한 가락을 노래했다. 그는 “누님의 치맛살 곁에 앉아/ 누 님의 슬픔을 나누지 못하는 심심한 때는/ 골목을 빠져 나와 바닷가에 서자”(「밤바다에서」 1연)에 서 보는 바와 같이, 슬픔이라는 삶의 근원적인 정서에 한국적 정한의 세계를 절제된 가락으로 실어, 그 속에서 삶의 예지와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그의 시에 있어서 자연이란, 삶의 이치를 완벽하게 구 현하고 있음으로써 영원하고 지순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세계이다. 그는 그 자연에 의지하여 위로와 지혜를 얻지만, 때로는 자연의 완벽한 아름다움과 인간과의 거리 때 문에 절망하기도 한다. 박재삼의 시는 1950년대의 주류이던 모더니즘 시의 관념적이고 이국적인 정취 와는 달리 한국어에 대한 친화력과 재래적인 정서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여 주어, 전후 전통적인 서 정시의 한 절정을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그의 시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어체의 어조와 잘 조율된 율격은, 그의 시의 아름다움과 자연스러움을 보장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학력사항> 고려대학교 - 국어국문학(중퇴) <경력사항> 현대문학사, 대한일보사, 삼성출판사 등에서 근무 <수상내역> 제2회 현대문학신인상, 한국시인협회상, 노산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인촌상 <작품목록> 울음이 타는 가을 강, 춘향이 마음, 수정가, 한, 햇빛 속에서, 소곡 정릉 살면서, 천년의 바람, 어린 것들 옆에서, 뜨거운 달, 비 듣는 가을나무, 추억에서, 거기 누가 부르는가, 아득하면 되 리라, 간절한 소망, 내 사랑은[시조집], 대관령 근처, 찬란한 미지수, 가을 바다, 바다 위 별들이 하 는 짓, 박재삼 시집, 사랑, 그리움 그리고 블루편, 사랑이여, 가을바다, 기러기 마음을 나는 안다[편], 햇볕에 실린 곡조, 해와 달의 궤적, 꽃은 푸른빛을 피하고, 허무에 갇혀, 나는 아직도, 다시 그리움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남기고, 박재삼 시선집 울음이 타는 가을 강(박재삼) / 곡 박제광, 테너 정필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