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 술 익은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芝薰에게 / 朴木月 / <상아탑> (1946) -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南道)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윤사월(閏四月)
- 박목월(朴木月) / <상아탑> (1946) -
송화(松花) 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고
엿듣고 있다
청노루
- 박목월(朴木月) / <청록집> (1946. 6.) -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가는 열두 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산이 날 에워싸고
- 박목월(朴木月) -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
어느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구름처럼 살아라 한다.
바람처럼 살아라 한다.
한탄조
- 박목월(朴木月) -
아즈바님
잔 드이소.
환갑이 낼모랜데
남녀가 어디 있고
상하가 어딨는기요.
분별없이 살아도
허물될 게 없심더.
냇사 치마를 둘렀지만
아즈바님께
술 한 잔 못 권할 게
뭔기요.
북망산 휘오휘오 가고 보면
그것도 한이구머.
아즈바님
내 술 한 잔 드이소.
*
보게 자네,
내 말 들어 보랭이,
자식도 품안에 자식이고
내외도
이부자리 안에 내외지.
야무지게 산들
뾰죽할 거 없고
덤덤하게 살아도
밑질 거 없데이.
니
주머니 든든하면
날
술 한 잔 받아 주고
내
돈 있으면
니 한 잔 또 사 주고
너요 내요 그럴 게 뭐꼬.
거믈거믈 서산에 해 지면
자넨들
지고 갈래, 안고 갈래.
*
시절은 절로
복사꽃도 피고
시절이 좋으면
풍년이 들고
이 사람아 안 그런가.
해 저무는 산을 보면
괜히
눈물 글썽거려지고
오래 살다 보면 살 맛도 덤덤하고
다 그런기라.
가 정
- 박목월(朴木月) / <경상도의 가랑잎> (1968) -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 구문 반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 삼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문 반.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문 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이별가
- 박목월(朴木月) / <경상도의 가랑잎> (1968) -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뭐락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락카노 뭐락카노
썩어서 동아밧줄은 삭아 내리는데
하직을 말자 하직을 말자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
니 흰 옷자라기만 펄럭거리고…
오냐, 오냐, 오냐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음성은 바람에 불려서
오냐, 오냐, 오냐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하관
- 박목월(朴木月) / <난(蘭), 기타>(1959) -
관(棺)이 내렸다.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 내리듯.
주여
용납하옵소서.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 주고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하직(下直)했다.
그 후로
그를 꿈에서 만났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돌아보고
형님!
불렀다.
오오냐. 나는 전신(全身)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는 못 들었으리라.
이제
네 음성을
나만 듣는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
너는 어디로 갔느냐
그 어질고 안스럽고 다정한 눈짓을 하고.
형님!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 하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
산도화
- 박목월(朴木月) / <청록집> (1946) -
산은
구강산
보랏빛 석산
산도화
두어 송이
송이 버는데
봄눈 녹아 흐르는
옥같은
물에
사슴은
암사슴
발을 씻는다.
* 박목월(朴木月, 1916-1978)
본명 : 박영종(朴泳鍾)
1916년 경상북도 경주 출생
1933년 대구계성중학교 재학중 동시 「퉁딱딱 퉁딱딱」이 『어린이』에,「제비맞이」가 『신가정』에 각각 당선
1939년 『문장』에 「길처럼」, 「그것이 연륜이다」, 「산그늘」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46년 김동리, 서정주 등과 함께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 조선문필가협회 사무국장 역임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사무국장 역임
1957년 한국시인협회 창립
1973년 『심상』 발행
1974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1978년 사망
본명은 박영종(朴泳鍾). 경상북도 월성(지금의 경주) 출신. 1935년 대구의 계성중학교(啓聖中學校)를
졸업하고, 도일(渡日)해서 영화인들과 어울리다가 귀국하였다. 1946년 무렵부터 교직에 종사하여 대
구 계성중학교,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연세대학교·홍익대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62년부터 한양대학교 교수로 재임하였다.
1947년 한국문필가협회 발족과 더불어 상임위원으로 문학운동에 가담, 문총(文總) 상임위원·청년문
학가협회 중앙위원·한국문인협회 사무국장·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 총무·공군종군문인단 창공구락
부(蒼空俱樂部)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58년 한국시인협회 간사를 역임하였고 1960년부터 한국시인
협회 회장직을 맡아 1973년 이후까지 계속하였다. 한때 출판사 산아방(山雅房)·창조사(創造社) 등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또한, 잡지 『아동』(1946)·『동화』(1947)·『여학생』(1949)·『시문학(詩文
學)』(1950∼1951) 등을 편집, 간행하였으며, 1973년부터는 월간 시 전문지 『심상(心象)』을 발행하
였다. 처음은 동시를 썼는데 1933년『어린이』지에 동시 「통딱딱 통딱딱」이 특선되었고, 같은 해
『신가정(新家庭)』지에 동요 「제비맞이」가 당선된 이후 많은 동시를 썼다. 본격 시인으로는 1939
년 9월 『문장(文章)』지에서 정지용(鄭芝溶)에 의하여 「길처럼」·「그것은 연륜(年輪)이다」 등으
로 추천을 받았고, 이어서 「산그늘」(1939.12.)·「가을 으스름」(1940.9.)·「연륜(年輪)」(1940.
9.) 등을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하였다.
1946년 조지훈(趙芝薰)·박두진(朴斗鎭) 등과 3인시집 『청록집(靑鹿集)』을 발행하여 해방 시단에
큰 수확을 안겨주었다.
1930년대 말에 출발하는 그의 초기 시들은 향토적 서정에 민요적 율조가 가미된 짤막한 서정시들로
독특한 전통적 시풍을 이루고 있다. 그의 향토적 서정은 시인과 자연과의 교감에서 얻어진 특유의 것
이면서도 보편적인 향수의 미감을 아울러 담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청록집』·『산도화』 등에서
잘 나타난다. 6·25사변을 겪으면서 이러한 시적 경향도 변하기 시작하여 1959년에 간행된 『난
(蘭)·기타』와 1964년의 『청담』에 이르면 현실에 대한 관심들이 시 속에서 표출되고 있다. 인간의
운명이나 사물의 본성에 관한 깊은 통찰을 보이고 있으며, 주로 시의 소재를 가족이나 생활 주변에서
택하여, 담담하고 소박하게 생활사상(生活事象)을 읊고 있다.
1967년에 간행된 장시집 『어머니』는 어머니에 대한 찬미를 노래한 것으로 시인의 기독교적인 배경
을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다. 1968년의 『경상도의 가랑잎』부터는 현실인식이 더욱 심화되어 소재가
생활 주변에서 역사적·사회적 현실로 확대되었으며, 사물의 본질을 추구하려는 사념적 관념성을 보
이기 시작한다. 1973년의 『사력질(砂礫質)』에서는 사물의 본질이 해명되면서도 냉철한 통찰에 의하
여 사물의 본질의 해명에 내재하여 있는 근원적인 한계성과 비극성이 천명되고 있다. 그것은 지상적
인 삶이나 존재의 일반적인 한계성과 통하는 의미다.
수필 분야에서도 일가의 경지를 이루어, 『구름의 서정』(1956), 『토요일의 밤하늘』(1958), 『행복
의 얼굴』(1964) 등이 있으며, 『보랏빛 소묘(素描)』(1959)는 자작시 해설로서 그의 시작 방법과 시
세계를 알 수 있는 좋은 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시사적(詩史的)인 면에서 김소월(金素月)과 김영랑
(金永郎)을 잇는 향토적 서정성을 심화시켰으면서도, 애국적인 사상을 기저에 깔고 있으며, 민요조를
개성 있게 수용하여 재창조한 대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1955년 첫 시집 『산도화(山桃花)』(1954)로 제3회 아세아자유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1968년 시집
『청담(晴曇)』으로 대한민국문예상 본상을, 1969년 『경상도(慶尙道)의 가랑잎』(1968)으로 서울시
문화상을, 1972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하였다.
<참고문헌>
『우리시의 역사적 연구』(신동욱, 새문사, 1981)
『한국현대시론』(박두진, 일조각, 1977)
『현대시론』(정한모, 민중서관, 1973)
『한국의 현대시』(서정주, 일지사, 1969)
「향수의 미학」(김종길, 『문학과 지성』, 1971년 가을호)
시집 : 『청록집』(1946), 『산도화』(1955), 『란(蘭)·기타(其他)』(1959), 『산새알 물새알』(1962),
『청담(晴曇)』(1964), 『경상도의 가랑잎』(1968), 『박목월시선』(1975), 『백일편의 시』(1975),
『구름에 달가듯이』(1975), 『무순(無順)』(1976), 『크고 부드러운 손』(1978),
『박목월-한국현대시문학대계 18』(1983), 『박목월전집』(1984), 『청노루 맑은 눈』(1984),
『나그네』(1987), 『소금이 빛하는 아침에』(1987)
윤사월(박목월) / 시낭송 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