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道峰)
- 박두진 / <청록집>(1946) -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 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人跡)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빈 골 골을 되돌아올 뿐.
산그늘 길게 늘이며
붉게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꽃
- 박두진 / 시집 <거미와 성좌>(1962) -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 번만의 어느 날의
아픈 피 흘림.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궈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꺼질 듯
보드라운
황홀한 한 떨기의
아름다운 정적(靜寂).
펼치면 일렁이는
사랑의
호심(湖心)아.
향현(香峴)
- 박두진 / <문장>(1939) -
아랫도리 다박솔 깔린 산 넘어, 큰 산 그 넘어 다른 산 안 보이어, 내 마음 둥둥 구름을 타다.
우뚝 솟은 산, 묵중히 엎드린 산, 골골이 장송 들어섰고, 머루 다래넝쿨 바위 엉서리에 얽
혔고, 샅샅이 떡갈나무 억새풀 우거진데, 너구리, 여우, 사슴, 산토끼, 오소리, 도마뱀, 능
구리 등 실로 무수한 짐승을 지니인
산, 산, 산들! 누거 만년 너희들 침묵이 흠뻑 지리함즉 하매,
산이여! 장차 너희 솟아난 봉우리에 엎드린 마루에 확확 치밀어 오를 화염을 내 기다려도 좋으랴!
핏내를 잊은 여우 이리 등속이, 사슴 토끼와 더불어 싸릿순 칡순을 찾아 함께
즐거이 뛰는 날을 믿고, 길이 기다려도 좋으랴?
해
- 박두진 / <상아탑>(1946) -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어, 달밤이 싫어, 눈물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어,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싫어…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
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에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에 앉아, 애띠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고대 가야의 고분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23.09.18 중앙) 경남 합천 옥전 고분군.
고대 가야의 고분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23.09.18 조선) 경남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고대 가야의 고분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23.09.18 조선)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군.
고대 가야의 고분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23.09.18 조선) 경남 함안 말이산의 가야 고분군.
가야는 기원 전후 무렵부터 562년까지 한반도 남부에서 번성한 작은 나라들의 연합체다. 경남 김해에
있었던 금관가야, 경북 고령 대가야, 경남 함안 아라가야 등이 잘 알려져 있다. 이번에 등재된 고분
군은 ▲전북 남원 유곡리·두락리 고분군 ▲ 경북 고령 지산동 고분군 ▲경남 김해 대성동 고분군 ▲
경남 함안 말이산 고분군 ▲경남 창녕 교동·송현동 고분군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군 ▲경남 합천
옥전 고분군 등 7개다. 이로써 한국은 1995년 석굴암·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를 시작으로 가
야고분군까지 총 16건의(문화유산 14건·자연유산 2곳)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묘지송
- 박두진 / <문장>(1939) -
북망(北邙)이래도 금잔디 기름진 데 동그란 무덤들 외롭지 않으이.
무덤 속 어둠에 하이얀 촉루(촉루)가 빛나리, 향기로운 주검의 내도 풍기리.
살아서 설던 죽음 죽었으매 이내 안 서럽고, 언제 무덤 속 화안히 비춰 줄 그런 태양만이 그리우리.
금잔디 사이 할미꽃도 피었고 삐이 삐이 배, 뱃종! 뱃종! 멧새들도 우는데, 봄볕 포근한
무덤에 주검들이 누웠네.
청산도(靑山道)
- 박두진 / <해>(1949) -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
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둥 산을 넘어, 흰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 하
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넘엇 골 골짜기서 울어오는 뻐꾸기.
산아, 푸른 산아. 네 가슴 향기로운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 울어라. 흐르는 골짜기
스며드는 물소리에, 내사 줄줄줄 가슴이 울어라. 아득히 가버린 것 잊어 버린 하늘과, 아른
아른 오지 않는 보고 싶은 하늘에, 어쩌면 만나도 질 볼이 고운 사람이, 난 혼자 그리워라.
가슴으로 그리워라.
티끌부는 세상에도 벌레 같은 세상에도 눈 맑은, 가슴 맑은, 보고지운 나의 사람. 달밤이나
새벽녘, 홀로 서서 눈물어릴 볼이 고운 나의 사람. 달 가고, 밤 가고, 눈물도 가고, 틔어
올 밝은 하늘 빛난 아침 이르면, 향기로운 이슬밭 푸른 언덕을, 총총총 달려도 와줄 볼이
고운 나의 사람.
푸른 산 한나절 구름은 가고, 골 넘어, 골 넘어, 뻐꾸기는 우는데, 눈에 어려 흘러가는 물
결같은 사람 속, 아우성쳐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에, 난 그리노라. 너만 그리노라. 혼
자서 철도 없이 난 너만 그리노라.
어서 너는 오너라
- 박두진 / <청록집>(1946) -
복사꽃이 피었다고 일러라. 살구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너희 오오래 정들이고 살다 간 집,
함부로 함부로 짓밟힌 울타리에, 앵두꽃도 오얏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낮이면 벌떼와 나비
가 날고, 밤이면 소쩍새가 울더라고 일러라.
다섯 뭍과 여섯 바다와, 철이야. 아득한 구름 밖, 아득한 하늘가에, 나는 어디로 향을 해야
너와 마주 서는 게냐.
달 밝으면 으레 뜰에 앉아 부는 내 피리의 서른 가락도 너는 못 듣고, 골을 헤치며 산에 올
라 아침마다, 푸른 봉우리에 올라서면, 어어이 어어이 소리 높여 부르는 나의 음성도 너는
못듣는다.
어서 너는 오너라. 별들 서로 구슬피 헤어지고, 별들 서로 정답게 모이는 날, 흩어졌던 너
이 형 아우 총총히 돌아오고, 흩어졌던 네 순이도 누이도 돌아오고, 너와 나와 자라난, 막
쇠도 돌이도 복술이도 왔다.
눈물과 피와 푸른 빛 깃발을 날리며 오너라. ----비둘기와 꽃다발과 푸른 빛 깃발을 날리며
너는 오너라.----
복사꽃 피고, 살구꽃 피는 곳, 너와 나와 뒤놀며 자라난, 푸른 보리밭에 남풍은 불고, 젖빛
구름, 보오얀 구름 속에 종달새는 운다. 기름진 냉이꽃 향기로운 언덕, 여기 푸른 잔디밭에
누워서, 철이야, 너는 늴늴늴 가락 맞춰 풀피리나 불고, 나는, 나는, 두둥실 두둥실 붕새춤
추며, 막쇠와, 돌이와, 복술이랑 함께, 우리, 우리, 옛날을, 옛날을, 뒹굴어보자.
* 박두진(朴斗鎭, 1916-1998)
1916년 경기도 안성 출생
1940년 『문장』에 「향현(香峴)」, 「묘지송(墓地頌)」, 「낙엽송(落葉頌)」, 「의(蟻)」, 「들국화」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에 참여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결성에 참여
1956년 제4회 아세아 자유문학상 수상
1962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수상
1970년 3·1 문화상 수상
1976년 예술원상 수상
1981년 연세대학교 교수로 정년 퇴임
1984년 박두진 전집 간행
1989년 제1회 정지용문학상 수상
1998년 사망
호는 혜산(兮山). 1916년 경기도 안성 출생. 1939년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에 시 「향현(香
峴)」, 「묘지송(墓地頌)」 등을 발표하였다. 이화여대, 연세대 교수를 역임하였고, 1998년 타계하였
다. 『청록집[공저]』(1946), 『오도(午禱)』(1953), 『거미와 성좌』(1962), 『인간 밀림』(1963),
『하얀 날개』(1967), 『고산식물』(1973), 『사도행전』(1973), 『수석열전』(1973), 『야생대』
(1981), 『포옹무한』(1981) 등의 시집을 발간하였고, 1984년에는 범조사에서 『박두진 전집』을 간
행하였다. 이외에도 수상집으로 『생각하는 갈대』(1970), 『언덕에 이는 바람』(1973), 『그래도 해
는 뜬다』(1986)와 시론서 『한국현대시론』(1970), 『현대시의 이해와 체험』(1976) 등이 있다. 아
시아자유문학상(1956), 서울시문화상(1962), 3‧1문화상(1970), 예술원상(1976) 등을 수상하였다. 박목
월‧조지훈과의 공저인 『청록집』은 일제 말기 한국인의 겨레 인식과 저항적 자세를 주로 자연을 제재
로 하여 시화하고 있다. 「향현」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침묵 속에 지내온 산에서 힘차게 치솟아 오
를 저항과 창조의 불길을 예기하는 시상을 드러내어 일제 치하의 암울함을 의기(意氣)로써 이겨내는
분노의 서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미의식은 일제에 의해 민족주체성이 훼손되었다는 인식과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저항 의식에
기반한 것이다. 「묘지송」에서도 죽음의 의식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삶을 예견하는 햇빛을 노래하여
조국의 미래를 소생케 하는 늠연한 기상을 종교적 의미까지 함축하면서 드러내었다. 또 「푸른 하늘
아래」에서는 부정적 힘에 대한 정면 대결의 시상을 펼쳐보여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평화 공존을 형
상화한다. 박두진의 초기시는 이처럼 전통적인 여성적 정한(情恨)에서 벗어나 남성적인 기개(氣槪)를
시화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또한 작품에 수용된 자연은 근원적으로는 순응과 화합의 지혜를 추
구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창조적 결단성이나 생성의 의미를 내장하고 있다. 해방 후에 쓰
여진 「해」는 신생 한국의 창조적 의지를 형상화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후 『하얀 날개』에 이르
기까지 박두진은 시대의 부정적 가치를 비판하는 내용을 다루면서, 이념적으로는 절대적 가치의 추구
를 멈추지 않고 있다. 이러한 가치 추구의 정신을 바탕으로 그의 후기 시편들에서는 세속적 삶을 순
화하며 혁신하는 자세가 더욱 심화되어 갔다. 즉 『고산식물』, 『사도행전』, 『수석열전』, 『야생
대』, 『포옹 무한』 등에 걸쳐 시대의 부조리에 맞서 싸우며 그것을 희생적으로 극복해 가는 시적
자아의 의기와 함께 구도적 정신의 높은 표적을 향한 시심의 심화를 보게 된다.
<경력사항>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연세대학교 교수
<수상내역>
1956년 아시아 자유문학상, 1962년 서울시문화상, 1970년 3‧1문화상, 1976년 예술원상
<작품목록>
청록집, 해, 현대시집 Ⅲ, 오도, 박두진시선, 시와 사랑-자작시 해설, 거미와 성좌, 인간밀림, 한국
현대시론, 고산식물, 사도행전, 수석열전, 속‧수석열전, 현대시의 이해와 체험, 야생대, 예레미야의
노래, 포옹 무한, 해, 박두진전집, 해, 박두진 시집, 박두진-한국현대시문학대계 20, 박두진 전집,
그래도 해는 뜬다, 별들의 여름, 돌과의 사랑, 돌의 노래, 불사조의 노래, 성고독, 일어서는 바다,
가시면류관, 들의 노래, , 서한체, 빙벽을 깬다, 폭양에 무릎 꿇고, 고향에 다시 갔더니, 숲에는 새
소리가, 시적 번뇌와 시적 목마름, 한국 현대시 감상, 낙엽송, 도봉, 청산도, 향현, 묘지송, 비
시집 : 『청록집』(1946), 『해』(1949), 『오도(午禱)』(1953), 『거미와 성좌』(1962), 『인간 밀
림』(1963), 『하얀 날개』(1967), 『고산 식물』(1973), 『사도행전』(1973), 『수석열전』(1973),
『속 수석열전』(1976), 『야생대(野生代)』(1981), 『에레미야의 노래』(1981), 『포옹무한』
(1981), 『박두진시집』(1983), 『박두진-한국현대시문학대계 20』(1983), 『박두진전집』(1984),
『별들의 여름』(1986), 『그래도 해는 뜬다』(1986), 『돌과 사랑』(1987), 『일어서는 바다』
(1987), 『성고독』(1987), 『불사조의 노래』(1987), 『서한체(書翰體』(1989), 『가시면류관』
(1989), 『빙벽을 깨다』(1990), 『폭양에 무릎 꿇고』(1995), 『숲에는 새 소리가』(1996), 『고향
에 다시 갔더니』(1996)
해(박두진) / 시낭송 김명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