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아름다운 문학

<김종길> 설날아침에 / 성탄제

이름없는풀뿌리 2023. 11. 30. 06:14
설날 아침에 - 김종길 / 시집 <성탄제>(1969) -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 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 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성탄제 - 김종길 / 시집 <성탄제>(1969) - 어두운 방안엔 빠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러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山茱萸) 열매 ―――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라곤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聖誕祭)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山茱萸)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血液)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 김종길(金宗吉), 1926-2017) 대한민국의 시인이자 영문학자이다. 본관은 의성(義城), 본명은 김치규(金致逵)이다. '종길(宗吉)'은 그의 아호이다. 대중들에게는 제7차 교육과정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된 성탄제라는 시의 저자로 잘 알려져있다. 1926년 11월 5일 경상북도 안동군 임동면 지례동에서 태어났다. 혜화전문학교와 고려 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고려대학교 졸업 후 대구공업고등학교 교사, 경북대학교 강사를 거쳐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부임해 1992년까지 재직했다. 시인으로서는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1947년 <문>이 입선되어 등단한 이래, 1969년 <성탄제>, 1977년 <하회에서>, 1986년 <황사 현상>을 펴냈고 1988년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2017년 4월 1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설날 아침에(김종길) / 시낭송 선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