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의 방(回想의 房)
- 함형수 -
찢어진문풍지로쏘아드러오는차디찬바람에남포ㅅ불은
몇번이고으스러져다가는다시살아나고어두운불빛아래
少年은몇번이고눈을감고는蒼白한過去를그리고
暗澹한未來를낮고부시려애썻다.
어지러운四壁은괴롭디괴로운沈默속에잠기고.
半이나열려진채힘없는숨을쉬는어머니의입술.
少年의얼골은苦痛으로가득찼었고.
少年의두눈은殺氣를띠고빛났다.
아아하로ㅅ동안의고달픈勞動의疲勞는
그래도어머니에게不自然한熟睡를가저왔으며.
가엾은어머니의간난이는지금은시드러버린
어머니의젖꼭지도잊어버리고귀여운꿈가운데서
天眞한그얼골에깃벗든일슬펏든일두나절의光景을쫓고있었다.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 청년 화가 L을 위하여 / 함형수 / <시인부락>(1936) -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거운 비(碑)ㅅ 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어 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 작품해설 : 서정주, 김동리와 함께 『시인부락』 동인 활동을 하며 시를 쓰기 시작한 함형수는 심한 정신착란증
에 시달리다 해방 직후 30세로 요절하였다. 세상에 발표된 그의 시는 10여 편에 불과하지만, 동경(憧憬)의 꿈과
소년적 애수를 주조로 하는 개성 있는 시인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시적 화자 ‘나’는 부제 ‘청년 화가 L을 위하여’를 고려해 볼 때, 죽은 청년 화가 L로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는 이미 죽은 청년 화가 L이 자신의 죽음을 노래하는 형식을 취하여 죽음을 초월한 그의 삶에의 열정과 의지
를 형상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행의 길이가 점차 길어지고 있다는 표현 특징뿐 아니라, 각 행이
‘세우지 말라’, ‘심어 달라’, ‘보여 달라’, ‘생각하라’ 등 단호한 명렬으로 끝맺는 종결 처리법도 결국
이와 같은 주제 의식과 깊은 관련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1행에서 화자는 ‘차가운 비(碑)ㅅ돌’을 세우지 말라고 한다. ‘비(碑)ㅅ돌’은 죽음을 뜻하는 비석이므로, 이는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 할 수 있다. 2행에서는 ‘비(碑)ㅅ돌’ 대신 ‘노오란 해바라
기’를 심어 달라고 한다. 화자가 화가인 것을 생각하면 이믄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해바라기」라는 작품을 연
상하게 하는 구절이다. 해바라기는 향일성(向日性) 식물로 정열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1행에서 드러난 의지의 표
명이 2행에서는 죽음을 초월한 삶에의 강렬한 의지 내지 정열을 해바라기를 통해 표출하고 있다. 3행에서는 ‘끝
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고 한다. ‘끝없는 보리밭’은 풍성한 생명력을 표상하는 것으로, 이 구절 역시 생명의
충일함을 통해 죽음을 초월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다고 하겠다.
4행에서는 자신의 무덤가에 심어 놓은해바라기를 ‘늘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으로 생각해 달라고 당부
한다. 이것은 자신의 정열적인 사랑과 삶이 죽음을 초월하여 잊혀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5행에서
는 보리밭 사이로 날아오르는 노고지리를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끔’으로 생각해 달라고 당부한다. 이는 꿈을
간직하며 살던 자신의 삶이 영원하기를 소망하는 것으로, 결국 ‘노고지리’는 화자의 감정이 이입된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이 시는 ‘차가운 비(碑)ㅅ돌’로 표상된 비생명적(非生命的인 것을 거부하고, ‘노오란 해바라기’와
‘끝없는 보리밭’을 통해 뜨거운 생을 향한 강한 의지를 표출하고 있어, 이른바 『시인부락』 동인들의 생명파적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해바라기’는 화려하고 정열적인 사랑을, ‘보리밭’은 생명츼 터전을, ‘노고지
리’는 하늘을 날아오르는 꿈을 각각 상징할 뿐 아니라, 그것들이 지면과 지상, 공중에서 서로 대응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노란색과 푸른색의 색채의 대조로 인하여 더욱 싱싱하고 강렬한 생명 의식을 느낄 수 있음은 물
론이다. 그러므로 섬세한 수식 하나 없는 투박한 언어 사용으로 인해 다소 거칠다는 느낌을 갖게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도리어 이 시인의 순수함과 젊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 함형수(咸亨洙, 1914 ~ 1946)
1916년 함경북도 경성 출생
1932년 함흥경성고보 2학년때 <동광,1월호>에 <오늘 생긴일> 발표. 10월 함북 격문배포 항일운동 관련 체포됨
1933년 미결수로 수감중 11월 집행유예 1년 선고 받음
1935년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 문과에 입학
1936년 서정주, 오장환, 김달진, 김동리 등과 동인지 <시인부락> 창간. <해바래기의 비명> 발표생계곤란으로 학교
를 그만 둠
1937년 가족과 만주로 이주. 도문공립백봉우급학교 근무
194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마음> 당선
1945년 정신질환을 앓던 중 해방 열차에 탑승하여 남으로 오다가 추락사했다고 전해짐. 함경북도 경성 출생. 고향
에서 중등과정을 마치고 상경하여 중앙불교전문학교(中央佛敎專門學校)에 입학하였다. 이 때 서정주(徐廷柱)와 김
동리(金東里)를 알게 되어 문학에 입문한 것을 계기로 ‘시인부락(詩人部落)’ 동인이 되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중퇴하고 만주로 건너가 소학교 훈도시험에 합격하여 도문공립백봉우급학교(圖們公立白鳳優級學校)에 근무
하기도 하였다. 광복 당시 고향에 머물러 있었으나, 심한 정신착란증으로 시달리다가 사망하였다.
살았을 때 시집은 출간하지 못했고, 동인지 『시인부락(詩人部落)』과 『자오선(子午線)』에 「해바래기의 비명
(碑銘)」·「형화(螢火)」·「홍도(紅桃)」·「그애」·「무서운 밤」·「조개비」·「해골(骸骨)의 추억(追憶
)」·「회상(回想)의 방(房)」·「유폐행(幽閉行)」·「손있는 그림」·「부친후일담(父親後日譚)」·「성야(星
夜)」·「구화행(求花行)」·「신기루(蜃氣樓)」·「교상(橋上)의 소녀(少女)」·「자전차상(自轉車上)의 소년(少
年)」·「어떤 애사략(愛史略)」 등 17편이 실려 있는데, 이 중 「해바래기의 비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소년행
(少年行)’시편이다.
그밖에 『동아일보』 신춘문예당선작 「마음」(1940.1.)과 「개아미와 같이」(인문평론, 1940.10.)등이 있다. 내
무덤 앞에 빗돌을 세우지 말고 노란 해바라기를 심어달라는 「해바래기의 비명」은 그의 대표작으로 문학사에 자
주 인용되고 있다.
해바라기의 비명(함형수) / 시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