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교2 - 라포로그에게
- 오규원 /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11월 -
사랑이 기교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나는
사랑이란 이 멍청한 명사에
기를 썼다. 그리고
이 동어 반복이 이 시대의 후렴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까지도 나는
이 멍청한 후렴에 매달렸다.
나뭇잎 나무에 매달리듯 당나귀
고삐에 매달리듯
매달린 건 나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사랑도 꿈도.
그러나 즐거워하라.
이 동어 반복이 이 시대의 유행가라는
사실은 이 시대의
기교가 하느님임을 말하고, 이 시대의
아들딸이 아직도 인간임을 말한다.
이 시대에 가장 아름다운 기교, 나의 하느님인 기교여.
(1978년)
* 라포르그(Jules Laforgue) :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서정적 반어법의 거장이며 베르 리브르(vers
libre : 자유시) 창안자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은 T. S. 엘리엇을 비롯한 여러 20세기 미국시인
들과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의 평론들은 다소 경시되어왔으나, 역시 주목할 만하다.
비가 와도 이제는
- 오규원 / 시집 <사랑의 기교>(민음사, 1975 초판, 1995 개정판) -
비가 온다. 어제도 왔다.
비가 와도 이제는 슬프지 않다.
슬픈 것은 슬픔도 주지 못하고
저 혼자 내리는 비뿐이다.
슬프지도 않은 비속으로
사람들이 지나간다.
비속에서 우산으로 비가 오지 않는 세계를
받쳐 들고
오, 그들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비가 온다.
슬프지도 않은 비.
저 혼자 슬픈 비.
우산이 없는 사람들은
비에 젖고
우산이 없는 사람들은 오늘도
가면도 없이
맨얼굴로
비 오는 세계에 참가한다.
어느 것이 가면인가.
슬프지도 않은 비.
저 혼자 슬픈 비.
프란츠 카프카
- 오규원 / <가끔은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1987) -
- MENU -
샤를르 보들레르 800원
칼 샌드버그 800원
프란츠 카프카 800원
이브 본느프와 1,000원
에리카 종 1,000원
가스통 바슐라르 1,200원
이하브 핫산 1,200원
제레미 리프킨 1,200원
위르겐 하버마스 1,200원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
* MENU → 대상의 상품화, 계량화, 수치화, 물신화 등을 상징하는 표
* 샤를르 보들레르 → 프랑스 시인
* 칼 샌드버그 → 미국 시인
* 이브 본느프와 → 프랑스 시인
* 에리카 종 → 미국 소설가
* 가스통 바슐라르 → 프랑스 철학자
* 이하브 핫산 → 포스트모더니즘 주창자
* 제레미 리프킨 → 미국의 문명 비평가
* 위르겐 하버마스 → 독일 철학자
* 1~3연 → 모든 것이 상품화되어 교환 가치에 의해서만 평가되는 현대 사회에 대한 풍자
* 시 → 화자의 제자가 추구하는 정신적 가치이지만, 현대의 물질 문명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본래
의 가치가 사라지고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한 문학을 의미함.
* 미친 제자 → 제자에 대한 안타까움의 반어적 표현
* 시를 공부하겠다는 ~ 커피를 마신다. → 문학을 논하는 것의 무의미함을 자조적이고 반어적으로 표현함
* 제일 값싼 → 반어. 문학이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 값으로 정할 수 없는 정신적 가치의 중요성을 드러냄.
*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 → 체코 소설가, 오스트리아ㆍ헝가리 제국의 유대계 작가.
인간 운명의 부조리, 인간 존재의 불안을 통찰하여, 현대 인간의 실존적 체험을 극한에 이르기까지
표현하여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받는다. 《변신(變身)》(1916년 간행) 등을 썼다.
커피나 한 잔
- 오규원 / <현대문학>(1999) -
커피나 한잔, 우리들께서도 커피나 한잔, 우리들의 함묵(緘默), 우리들의 거부(拒否)께서도
다정하게 한잔, 우리들을 응시하고 있는 창께서도, 창 밖에 날개를 비틀고 있는 새께서도
한잔. 이 50원의 꿈이 쉬는 곳은 50원어치의 포도덩굴로 퍼져 50원어치의 하늘을 향해
50원어치만 웃는 것이 기교주의라고 우리들은 누구에게 말해야 하나.
용납하소서 기교주의여. 기교주의의 시간이여 커피나 한잔. 살의 사실과 살의 꿈을 지나
살의 노래 속에 내리는 확인의 뿌리께서도 한잔 드셨는지. 저 바람의 비난과 길이 기르는
불편한 발자국과 그 길 위에 쌓이는 음울한 사자(死者)의 목소리를 지나 우리들께서는
그 무엇을 확인하시려는가. 우리들께서는 그 패배로 무엇을 말하시려 하는가?
풀잎은 이유 때문에 흔들리지 않고, 풀잎은 풀 때문에 흔들린다고 잠 못 드신 들판께서도
피곤하실 테니 커피나 한잔.
하늘과 돌멩이
- 오규원 / 시집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1999 -
담쟁이덩굴이 가벼운 공기에 업혀 허공에서
허공으로 이동하고 있다
새가 푸른 하늘에 눌려 납작하게 날고 있다
들찔레가 길 밖에서 하얀 꽃을 버리며
빈자리를 만들고
사방이 몸을 비워놓은 마른 길에
하늘이 내려와 누런 돌멩이 위에 얹힌다
길 한켠 모래가 바위를 들어올려
자기 몸 위에 놓아두고 있다
* 오규원(吳圭原, 1941-2007)
본명은 오규옥(吳圭沃). 1941년 경남 밀양 삼랑진에서 출생했고, 부산중학교를 거쳐 1958년 부산사범
학교에 진학했다. 1961년 부산사범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부산 사상초등학교 교사로 첫 부임을 했
고, 교편을 잡은 다음해인 1962년 동아대 법학부에 입학했다. 1964년 5월 시 「겨울나그네」로 『현
대문학』 초회 추천을 받았고, 이 지면에서부터 ‘오규원’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67년
「우계의 시」로 2회 추천을 받고, 1968년 「몇 개의 현상」으로 추천이 완료되어 등단했다. 추천자
는 김현승 시인이었다. 1969년 동아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1971년 첫 시집 『분명한 사건』을 한림출
판사에서 출간했다. 1973년 두 번째 시집 『순례』를 민음사에서 출간하고, 『현대시학』 주간인 전
봉건 시인의 권유로 시평을 쓰기 시작해서 잡지와 일간신문의 월평을 쓰기 시작했다.
1975년 『분명한 사건』『순례』 개봉동 시리즈를 포함시킨 시선집 『사랑의 기교』를 민음사에서 출
간하고, 1976년 그동안 썼던 시에 관한 산문들을 모은 시론집 『현실과 극기』를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했다. 1978년 세 번째 시집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를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했다. 1979년
태평양화학을 사직하고 『문장』이라는 출판사를 직접 경영하여 『김춘수전집』 1,2,3권, 『이상전집』
1,2,3권 등 50여권의 단행본을 출간했다. 1981년 네 번째 시집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를 출간
하고 1982년 이 시집으로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에세이집 『한국만화의 현실』을 열화당에서, 『볼
펜을 발꾸락에 끼고』를 문예출판사에서 출간했다.
1983년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전임교수가 되었다. 시론집 『언어와 삶』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하고, 1985년 시선집 『희망 만들며 살기』를 지식산업사에서 출간했다. 1987년 다섯 번째 시집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를 문학과지성사에서, 문학 선집 『길밖의 세상』을 나남출판사에서
출간했다. 1989년 「비디오가게」 외 4편으로 제2회 연암문학상을 수상하고 수상작품집 『하늘 아래
의 생』을 문학과비평사에서 출간했다. 1990년 이론서 『현대시작법』을, 1991년 여섯 번째 시집
『사랑의 감옥』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했다. 1995년 일곱 번째 시집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
물소리』, 1999년 여덟 번째 시집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를 민음사에서 출간하고, 2002년
『오규원시전집』(전2권)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했다. 2005년 아홉 번째 시집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와 시론집 『날이미지와 시』를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했다.
2007년 작고한 후 다음해인 2008년 유고시집 『두두』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초기시에 해
당하는 『분명한 사건』(1971), 『순례』(1973)는 관념을 언어로 구상화하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
다. 특히 관념적 의미에 물들지 않은 절대 언어를 지향하며, 시인의 상상과 사유 속에서의 언어를 시
적 대상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초기시는 현실적인 시공간보다는 주체의 내면의식과 환상이 결합된
가상세계가 중요한 소재가 된다. 중기시인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
시』는 산업화와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그는 광고를 시에 도입하는 등 형태적인
실험을 통해 물신주의 사회를 비판하고, 아이러니를 이용하여 억압적인 정치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후기시는 『사랑의 감옥』부터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
다』,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두두』 까지의 시들이다. 이 시기에 오규원은 날이미
지 시론을 전개하며 환유적인 방식에 의거한 시 쓰기를 시도한다. 그것은 현상과 그 이면의 생성과
변화 과정을 읽어내는 주체의 해석이 결합된 것이다. 이처럼 오규원은 언어와 이미지에 대한 탐구를
바탕으로 하여 시 쓰기 방식 자체에 대한 끊임없는 사유와 실험의식을 보여준 시인이다.
현대문학상(1982), 연암문학상(1989), 이산문학상(1995),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문화부문 (2003) 수상
『오규원 깊이 읽기』(이광호 편, 문학과지성사, 2002)
「오규원의 시론 연구」(문혜원,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25, 2004)
「오규원 시의 변모 과정과 시 쓰기 방식 연구」(이연승, 이화여대 박사논문, 2002)
「타락한 말, 혹은 시대를 헤쳐가는 해방의 이미지」(김동원, 박혜경, 오규원 좌담, 『문학정신』, 1991.3)
하늘과 돌멩이 / 오규원 시 해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