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아름다운 문학

<남진우> 어느사랑의기록 / 처형 / 별똥별

이름없는풀뿌리 2024. 1. 4. 06:54
어느 사랑의 기록 - 남진우 / 시집『죽은 자를 위한 기도』(문학과지성사, 1996) - 사랑하고 싶을 때 내 몸엔 가시가 돋아난다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은빛 가시가 돋아나 나를 찌르고 내가 껴안는 사람을 찌른다 가시 돋힌 혀로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핥고 가시 돋힌 손으로 부드럽게 가슴을 쓰다듬는 것은 그녀의 온몸에 피의 문신을 새기는 일 가시에 둘러싸인 나는 움직일 수도 말할 수도 없이 다만 죽이며 죽어간다 이 참혹한 사랑 속에서 사랑의 외침 속에서 내 몸의 가시는 단련되고 가시 끝에 맺힌 핏방울은 더욱 선연해진다 무성하게 자라나는 저 반란의 가시들 목마른 입을 기울여 샘을 찾을 때 가시는 더욱 예리해진다 가시가 사랑하는 이의 살갗을 찢고 끝내 그녀의 심장을 꿰뚫을 때 거세게 폭발하는 태양의 흑점들 사랑이 끝나갈 무렵 가시는 조금씩 시들어간다 저무는 몸 저무는 의식 속에 아스라한 흔적만 남긴 채 가시는 사라져 없어진다 가시 하나 없는 몸에 옷을 걸치고 나는 어둠에 잠긴 사원을 향해 떠난다 이제 가시 돋친 말들이 몸 대신 밤거리를 휩쓸 것이다 처형 - 남진우 - 목공이 나무를 다듬고 이방인을 매달 십자가를 만들어 세우듯이 시인은 말을 다듬어 스스로를 달아맬 십자가를 만든다 겨울밤 흰 대지 위에 둔중하게 내리찍히는 누군가의 못 박는 소리 별똥별 - 남진우 - 그날 밤 내 방 문턱에 지친 고래 한 마리 떠밀려 들어왔을 때 나는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고래는 숨 한 번 크게 들이쉬고 쿨럭이며 엄청난 물을 마루 위에 쏟아 냈다 입 벌린 고래의 깊은 목구멍 저편에서 누군가 촛불을 켜 들고 책을 읽고 있었다 내 망원경 속으로 떨어져 내린 별똥별 하나 불꽃을 일으키다 타 없어지고 고래 뱃속 낡은 책상에 몸 구부리고 책 읽던 노인은 아무리 불러도 고개를 들지 않더니 책장에 얼굴을 파묻고 졸기 시작했다 망망한 우주의 대양을 떠돌다 풍랑을 만나 그날 밤 내 방 문턱에 밀려온 고래 한 마리 한동안 쉰 다음 힘을 회복한 고래는 꼬리로 벽을 한 차례 힘껏 내리치더니 다시 물기둥을 뿜어내며 창문을 빠져나가 유유히 밤하늘 저편으로 멀어져 갔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 아득히 멀리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은하계 별 무리 사이를 헤엄쳐 가는 고래가 내쉬는 숨소리였다 내 방은 고래 꼬리에 맞아 그어진 금만이 선명하게 남아 오래 빛나고 있었다 ​ * 남진우(1960-) 1960년 전북 전주에서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였다. 1981년 《동아일보》에 시가, 1983년 《중앙일보》 평론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깊은 곳에 그물을 드리우라』『죽은 자를 위 한 기도』『타오르는 책』등과 평론집에『신성한 숲』『바벨탑의 언어』『숲으로 된 성벽』『그리고 신은 시인을 창조했다』이, 그리고 산문집 『올페는 죽을 때 나의 작업은 시라고 하였다』 등이 있 음. 대한민국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소천비평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명지대학교 문예창 작과 교수로 재직 중. 별똥별(남진우) / 시낭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