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아름다운 문학

<이병률> 사랑의역사 / 바람의사생활 / 봉인된지도

이름없는풀뿌리 2024. 1. 8. 06:35
사랑의 역사 - 이병률 / <바람의 사생활> 창비 / 2006년 11월 - 왼편으로 구부러진 길, 그 막다른 벽에 긁힌 자국 여럿입니다 깊다 못해 수차례 스치고 부딪힌 한 두 자리는 아예 음합니다 맥없이 부딪혔다 속상한 마음이나 챙겨 돌아가는 괜한 일들의 징표입니다 나는 그 벽 뒤에 살았습니다 잠시라 믿고도 살고 오래라 믿고도 살았습니다 굳을만하면 받치고 굳을만하면 받치는 등 뒤의 일이 내 소관이 아니란 걸 비로소 알게 됐을 때 마음의 뼈는 금이 가고 천정마저 헐었는데 문득 처음처럼 심장은 뛰고 내 목덜미에선 난데 없이 여름 냄새가 풍겼습니다 바람의 사생활 - 이병률 / <바람의 사생활> 창비 / 2006년 11월 - 가을은 차고 물도 차다 둥글고 가혹한 방 여기저기를 떠돌던 내 그림자가 어기적어기적 나뭇잎을 뜯어먹고 한숨을 내쉬었던 순간 ​ 그 순간 사내라는 말도 생겼을까 저 먼 옛날 오래전 오늘 ​ 사내라는 말이 솟구친 자리에 서럽고 끝이 무딘 고드름은 매달렸을까 ​ 슬픔으로 빚은 품이며 바람 같다 활 같다 그러지않고는 이리 숨이 찰 수 있나 먼 기차소리라고 하기도 그렇고 비의 냄새라고 하기엔 더 그렇고 계집이란 말은 안팎이 잡히는데 그 무엇이 대신해줄 것 같지않은 사내라는 말은 서럽고도 차가워 도망가려 버둥거리는 정처를 붙드는 순간 내 손에 뜨거운 피가 밸 것 같다 ​ 처음엔 햇빛이 생겼으나 눈빛이 생겼을 것이고 가슴이 생겼으나 심정이 생겨났을 것이다 한 사내가 두 사내가 되고 열사내를 스물, 백, 천의 사내로 번지게 하고 불살랐던 바람의 습관들 ​ 되돌아보면 그 바람을 받아먹고 내 나무에 가지에 피를 돌게 하여 무심히 당신 앞을 수천년을 흘렀던 것이다 그 바람이 아직 아직 찬란히 끝나지 않은 것이다 ​ 봉인된 지도 - 이병률 / <바람의 사생활> 창비 / 2006년 11월 - 지구와 달의 거리가 지금보다 훨씬 가까워 달이 커보였던 때 일년은 팔백일이었고 하루는 열한 시간이었을 때 덫을 놓아 잡은 짐승을 질질 끌고 가는 당신, 당신이 낸 길을 없애려 눈은 내려 덮이고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얼어붙은 날이 있었다 다시 얼음 녹으면서 세상은 잠시 슬퍼지고 그 익명의 밤은 다시 강처럼 얼고 언 밤 저편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듯 강가에 모여 불을 피우자 밤 이편의 사람들도 강 건너를 걱정하느라 불을 피웠다 그 어두운 밤 서로를 생각하고 생각하느라 당신은 그만 손가락을 잘랐다 ​ 지구와 달의 자리가 가까워 달이 커보였던 때 일년은 오백일이었고 하루는 열여섯 시간이었을 때 당신은 나를 데리러 왔다 신(神)과의 약속 발설할 것 같지 않던 당신은 지금 그 시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백스물 아흔 여든두 살 쭈글쭈글한 얼굴로 돌아가자 말했다 허나 내가 지켜야할 약속은 검고 고요한 저 소실점을 향해 가는 일 ​ 달과 지구의 자리가 멀어져 달이 작아 보일 때까지 일년은 삼백육십오일이고 하루는 스물네 시간일 때까지 * 이병률(1967-) * 1967년 충북 제천 출생. *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좋은 사람들」 「그날엔」 두 편이 당선되어 등단. *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찬란』『눈사람 여관』, 산문집 『끌림』 등. * 제11회 현대시학 작품상, 발견문학상을 수상 여름 감기(이병률) / 시읽는 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