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아름다운 문학

<김종해> 바람부는날 / 항해일지 / 그대앞에봄이있다

이름없는풀뿌리 2024. 1. 2. 04:20
바람부는 날 - 김종해 / <사랑아, 나를 몰아 어디로 가려느냐> 글빛 / 2004년 05월 - 사랑하지 않는 일보다 사랑하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나는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날마다 가고 또 갑니다. 어둠뿐인 외줄기 지하통로로 손전등을 비추며 나는 당신에게로 갑니다. 밀감보다 더 작은 불빛 하나 갖고서 당신을 향해 갑니다. 가서는 오지 않아도 좋을 일방통 행의 외길, 당신을 향해서만 가고 있는 지하철을 타고 아무도 내리지 않는 숨은 역으로 작 은 불빛 비추며 나는 갑니다. 가랑잎이라도 떨어져서 마음마저 더운 여린 날,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그래서 바람 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항해 일지 1 - 무인도를 위하여 - 김종해 / <문학세계사>(1984) - 을지로에서 노를 젓다가 잠시 멈추다. 사라져 가는 것, 떨어져 가는 것, 시들어 가는 것들의 흘러내림 그것들의 부음(訃音) 위에 떠서 노질을 하다. 아아, 부질없구나. 그물을 던지고 낚시질하여 날 것을 익혀 먹는 일 오늘은 갑판 위에 나와 크게 느끼다. 오늘 하루 집어등(集魚燈)을 끄고 남몰래 눈물짓다. 손이 부르트도록 날마다 을지로에서 노를 젓고 저음이여 수부(水夫)의 청춘을 다 바쳐 찾고자 하는 것 삭풍 아래 떨면서 잠시 청계천 쪽에 정박하다. 헛되고 헛되도다. 무인도여 한 잔의 술잔 속에서도 얼비치는 저 무인도를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다. 그러나 눈보라 날리는 엄동 속에서도 나의 배는 가야 한다. 눈을 감고서도 선명히 떠오르는 저 별빛을 향하여 나는 노질을 계속해야 한다. 그대 앞에 봄이 있다 - 김종해 / <그대 앞에 봄이 있다>(문학세계사, 2017) -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 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 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 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 김종해(1941-) 시인, 출판인 출생 : 1941. 7. 23. 부산광역시 소속 : 문학세계사(대표) 데뷔 : 1963년 자유문학에 시 '저녁' 신인상 당선 1965년 〈경향신문〉신춘문예 시 당선 수상 : 1982년 제28회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한국시협상, 공초문학상, PEN문학상, 구상문학상 등 수상 경력 : 2004.03~2005 제34대 한국시인협회 회장 시집 『인간의 악기』『신의 열쇠』, 『왜 아니 오시나요』『천노, 일어서다』, 『항해일지』『바람 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별똥별』『풀』『봄꿈을 꾸며』, 『눈송이는 나의 角을 지운다』 그대 앞에 봄이 있다(김종해) / 시낭송 이서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