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
- 이문재 / <제국호텔> 문학동네 / 2004년 12월 -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거미줄
- 이문재 / <제국호텔> 문학동네 / 2004년 12월 -
거미로 하여금 저 거미줄을 만들게 하는
힘은 그리움이다
거미로 하여금 거미줄을 몸 밖
바람의 갈피 속으로 내밀게 하는 힘은 이미
기다림을 넘어선 미움이다 하지만
그 증오는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이어서
고요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팽팽하지 않은 기다림은 벌써
그 기다림에 진 것, 져버리고 만 것
터질 듯한 적막이다
나는 너를 잘 알고 있다
너는 내 운명
- 이문재 / <제국호텔> 문학동네 / 2004년 12월 -
예술가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가 없어서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지식인이란
인류를 사랑하느라
한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성인이란
우주 전체를 사랑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없앤 사람이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법을 몰라서
풀 한 포기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 이문재(1959-)
* 1959년 경기도 김포 출생
* 경희대 국문과 졸업
* 1982년 동인지 [시운동] 4집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 수상 : 김달진문학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소월시문학상, 지훈문학상
* 시집으로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산책시편』, 『마음의 오지』, 『제국호
텔』, 『지금 여기가 맨 앞』, 『혼자의 넓이』 등
* 산문집으로는 『내가 만난 시와 시인』,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 등
*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현재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강의
농담(이문재) / 시낭송 이경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