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아름다운 문학

<성미정> 사랑은야채같은것/처음엔당신의착한구두를/시인의폐허/심는다

이름없는풀뿌리 2024. 1. 16. 06:48
사랑은 야채 같은 것 - 성미정 / <사랑은 야채 같은 것> 민음사 / 2003년 07월 -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씨앗을 품고 공들여 보살피면 언젠가 싹이 돋는 사랑은 야채 같은 것 그래서 그녀는 그도 야채를 먹기를 원했다 식탁 가득 야채를 차렸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오이만 먹었다 그래 사랑은 야채 중에서도 오이 같은 것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야채뿐인 식탁에 불만을 가졌다 그녀는 할 수 없이 고기를 올렸다 그래 사랑은 오이 같기도 하고 고기 같기도 한 것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의 식탁엔 점점 더 많은 종류의 음식이 올라왔고 그는 그 모든 것을 맛있게 먹었다 결국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사랑은 그가 먹는 모든 것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 성미정 -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다 그 안에 숨겨진 발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다리도 발 못지 않게 사랑스럽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당신의 머리까지 그 머리를 감싼 곱슬머리까지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저의 어디서부터 시작했나요. 비딱하게 눌러쓴 모자였나요, 약간 휘어진 새끼손가락이었나요. 지금 당신은 저의 어디까지 사랑하나요. 몇 번째 발가락에 이르렀나요 혹시 아직 제 가슴에만 머물러 있는 건 아닌가요.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그러했듯 당신도 언젠가 저의 모든 걸 사랑하게 될 테니까요. 구두에서 머리카락까지 모두 사랑한다면 당신에 대한 저의 사랑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거 아니냐고요, 이제 끝난거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처음엔 당신의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구두가 가는 곳과 손길이 닿는 곳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언제나 시작입니다. 시인의 폐허 - 성미정 - 어느 날 책을 정리하여 갑자기 시를 쓰고 싶은 마음과 시에 대한 열정에게 트렁크 가득 주고 나니 남은 것은 수경야채 입문과 베란다 가든 그의 도자기 책과 차 관련 서적 이걸로 무슨 시를 재배하고 우려낼 수 있으랴 이제 그는 아끼는 책들의 제목을 나직이 불러주지도 않고 더 이상 쓸 수 없다는 느낌에 대부분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듯 어쩌면 이제 시인은 시인의 시인과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시인 또한 하나의 환영 속에서 사실 다른 시인이 시인을 꿈꾸고 있을지도 그 꿈 또한 어지럽고 지리멸렬한 서로 만들어진 낡은 트렁크 하나를 두고 한 말일 뿐일지라도 * 시인의 폐허 : 보르헤스의 소설 「원형의 폐허」에서 제목과 모티브를 빌려옴. 심는다 - 성미정 - 꽃씨를 사러 종묘상에 갔다 종묘상의 오래된 주인은 꽃씨를 주며 속삭였다 이건 매우 아름 답고 향기로운 꽃입니다 꽃씨를 심기 위해서는 육체 속에 햇빛이 잘 드는 창문을 내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너의 육체에 창문을 내기 위해 너의 육체를 살펴보았다 육체의 손상이 적 으면서 창문을 내기 쉬운 곳은 찾기 힘들었다 창문을 내기 위해서는 약간의 손상이 필요했 기 때문이다 나는 밤이 새도록 너의 온몸을 샅샅이 헤맸다 그 다음날에는 너의 모든 구멍을 살펴보았다 창문이 되기에는 너무 그늘진 구멍을 읽고 난 후 나는 꽃씨 심는 것을 보류하기 로 했다 그리곤 종묘상의 오래된 주인에게 찾아가 이매우 아름답고도 향기로운 꽃을 피울 만한 창문을 내지 못했음을 고백했다 새로운 꽃씨를 부탁했다 종묘상의 오래된 주인은 상점 안의 모든 씨앗을 둘러본 후 내게 줄 것은 이제 없다고 했다 그 밤 나는 아무것도 줄 수 없 으므로 행복한 나를 너의 육체 모든 구멍 속에 심었다 얼마 후 나는 너를 데리고 종묘상의 오래된 주인을 찾아갔다 종묘상의 오래된 주인은 내가 키운 육체의 깊고 어두운 창문에 대 해서 몹시 감탄하는 눈치였다 창문과 종묘상의 모든 씨앗을 교환하자고 했다 나는 창문과 종묘상의 오래된 주인을 교환하기를 원했다 거래가 이루어진 뒤 종묘상의 오래된 주인은 내 육체 속에 심어졌다 도망칠 수 없는 어린 씨앗이 되었다 * 성미정(1967-) * 1967년 강원도 정선 출생. * 199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 시집 『대머리와의 사랑』『사랑은 야채 같은 것』『상상 한 상자』『읽자마자 잊혀져버려도』 읽자마자 잊혀져버려도(성미정) / 뒷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