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아름다운 문학

<이승만> 고목가外 詩篇들과 건국전쟁

이름없는풀뿌리 2024. 2. 17. 08:01
▲ 죄수복을 입은 이승만(왼쪽끝)이 기독교를 전도하여 개종한 전직고관 양반들과 자제들. 앞줄 왼쪽 부터 강원달, 홍재기,유성준, 이상재, 김정식. 뒷줄 왼쪽부터 안명선,김린, 유동근, 이승인(이상재아 들), 무명의 소년(부친대신 복역중).ⓒ연세대이승만연구원. 죄수복을 입고 감옥살이를 하며 - 이승만 - 선비가 궁해지면 독서를 후회하니 벼슬이 빚어낸 삼년간의 감옥살이 쇠줄에 묶여 다니며 새롭게 정들지만 죄인 얼굴을 가린 용수를 쓰니 옛 친구도 낯설구나 예부터 영웅은 옷 속에라도 이가 있다는데 지금은 고기 없이 밥 먹는 나그네 신세 때가 되면 모든 일이 뜻대로 되리니 죽을지언정 장부의 마음 변함이 있으랴 * 우남은 스물 세 살에 한성감옥에 갇힙니다. 감옥에서 그의 몸은 매였지만, 마음은 시의 세계를 자 유롭게 노닐었습니다. 감옥에 함께 있었던 유성준은 우남이 시를 짓는 정황을 멋스럽게 들려줍니다. “교교한 달빛이 철창으로 들이치는 밤이면, 시를 지어 들려주었다.” 한성감옥에서 지은 우남의 시, “죄수복을 입고 감옥살이를 하며”를 소개합니다. 나라를 위해서 헌신했건만, 돌아온 것은 역적이라 는 죄목입니다. 감옥살이를 하면서 선비는 지나간 세월을 후회합니다. 죄인이라 얼굴을 가려야 하니, 옛 친구를 보아도 낯설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죽을지언정, 나라를 사랑하는 장부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선비요 지사(志士)였던 우남 이승만의 절개를 보여주는 노래입니다. ▲ 중국인으로 변장한 이승만. 상하이로 밀항할때부터 중국 가서 활동기간중 신변안전을 위해 중국인 옷을 입었다. 경호담당 경무국장 김구(오른쪽). 당시 일제가 이승만을 체포하기 위해 30만 달러 거액 의 현상금을 걸어 일본의 체포를 모면하기 위해 완전 중국인 복장으로 위장하여 하와이행 화물선 갑 판 밑창 시체실 관옆에서 20 여일을 견디며 하와이에 돌아온 후 이승만은 상해 임시정부의 심한 분열 상(당파싸움)에 환멸을 느끼며 1939년 그의 정치무대를 하와이에서 워싱턴 D.C.(Washington D.C.)로 옮기게 된다 ▲ 1920년12월28일 이승만 임정 대통령의 상하이 부임 환영식. 가운데 화환을 건 이승만 대통령. 오 른쪽에 안창호. 왼쪽에 이동휘 국무총리. ⓒ연세대이승만연구원 황천객의 망명 - 이승만 - 민국(民國) 2년 동짓달 열 엿셋 날 하와이서 남몰래 배를 탔다네 겹겹의 판자문에 화로불은 따듯하니 사면이 철벽이라 칠흑같이 어두웠네 내일 아침이면 산천도 아득하리니 이 밤엔 세월도 어찌 길다냐 태평양 바다 위를 둥실 떠가니 이 안에 황천객을 누가 알리요 * 1919년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됩니다. 초대 대통령으로 하와이에서 활동하시던 이승만 박사가 추대되었습니다. 1920년 이승만은 하와이를 떠나서 상해로 가는 배에 오릅니다. 당시 일본 제 국주의는 독립 투사들을 가혹하게 탄압했습니다. 특히 독립 운동의 최고 지도자였던 이승만에게는 30 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려있었지요. 곳곳에 감시의 눈이 번득이는 상황에서 상해로 가는 긴 여정은 대 단히 위험했습니다. 그때 우남을 도와준 분이 하와이의 미국인 친구 보스윅이었습니다. 보스윅의 기 발한 도움이 있어서 우남께서는 상해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스윅의 직업이 장의사 였습니다. 그가 도와준 방법은 시체들 틈에 숨겨준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미국에서 일하던 중국인 노 동자가 숨을 거두면, 그 시신을 중국으로 보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국인의 시체를 담은 관들 의 틈에, 살아있는 우남이 몰래 숨었습니다. 이때의 경험을 읊은 시입니다. 황천객들 틈에 망명객이 숨어들었습니다. 죽은 사람들 틈에 산 사람이 끼어있었으니, 얼마나 무섭고 불편하고 힘들었을까요. 밤을 지새우며 기다려야하는 그 시간은 얼마나 길게 느껴졌을까요. 그래서 우남은 노래했습니다. “이 밤엔 세월도 어찌 길다냐.”일제는 서슬이 퍼런 감시의 눈빛을 반짝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다 위를 두둥실 떠가는 황천객들 사이에 있는 우남을 누가 알겠습니까. 동시에 시체들 틈에 섞여 있어야 하는 독립지사의 마음을 또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 워싱턴 임정대통령 사무실의 이승만. 오른쪽은 일본천황에게 보낸 '한반도 철수 요구' 영문 통고 문.ⓒ뉴데일리DB 조국의 땅 남산 - 이승만 - 하늘과 물 사이를 이 한 몸이 흘러서 그 끝없는 바다를 얼마나 여러 번 오갔나 닿는 곳곳에는 명승지도 많더라만 내 꿈의 보금자리는 서울 남산뿐 * 나라를 구하기 위한 우남의 일생은 끝없이 길을 떠나야 하는 여정이었습니다. 당시의 한국인으로서 는 드물게 세계를 누비신 분이셨습니다. 정처 없는 나그네처럼 떠돌면서 많은 곳을 보셨지만, 그분이 늘 그리워하셨던 땅은 조국이었습니다. 우남은 어린 시절을 보낸 남산을 떠올리는 노래를 지으셨습니 다. ▲ 1905년 8월4일 미국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났을 때 예복을 입은 유학생 이승만.ⓒ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아리랑 - 이승만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청천하늘엔 별들도 많고, 우리네 가슴속엔 시름도 많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오다 가다가 만난 님이지만 살아서나 죽어서나 못잊겠네 * 한국인이 있는 곳에는 아리랑이 있습니다. 일제 시대에 종군 위안부들이 머물렀던 마을의 주민들은 조선 여자들이 불렀던 아리랑의 가락을 기억합니다. 조선 남자들이 일했던 탄광에는 “어머니”라는 글자와 “아리랑”이라는 글자가 새겨져있습니다. 우남 이승만에게도 아리랑이 있었습니다. 독립운동 을 위해서 동분서주하다가 우남은 오스트리아 여인 프란체스카를 만납니다. 제네바의 숲속을 거닐면 서, 우남은 그녀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단어였습니다. 1940년과 41년, 우남 이승만은 미국의 워싱턴에서 을 집필했습니다. 태평양 전쟁을 예언해서 세계 적인 주목을 받았던 불후의 명저이지요. 그 책의 타이피스트는 프란체스카 여사였습니다. 쓰고 고치 고 쓰고 고치는 작업을 반복하면서, 훗날의 첫 번째 영부인은 어깨 통증에 시달렸습니다. 통증이 너 무 심한 날이면, 우남은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포토맥 강변으로 갔습니다. 아내의 어깨를 주무르면 서, 우남이 부르신 노래가 아리랑이었습니다. 마지막 줄은 우남이 직접 지으신 가사였습니다. “오다 가다가 만난 님이지만 살아서나 죽어서나 못잊겠네”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나그네로 떠돌다가 운명 적으로 만난 님을 우남은 참으로 아름답게 사랑하셨습니다. ▲ 1904년 11월 이승만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청계천 모전교 근처 사진관에서 찍은 가족사진.ⓒ연 세대이승만연구원 偶 吟 - 이승만 - 有誰三尺劍 剖我九回腸 丈夫無限恨 滌盡太平洋 유수삼척검 부아구회장 장부 무한한 척진태평양 그 누가 석자의 칼 가지고 있어 나의 구곡간장을 도려 내나 대장부의 끝없는 한을 태평양 물에다 씻어 버리리 * 1904년 29세의 나이에 미국에 간 이후 나라를 잃어 그 잃은 나라를 다시 세우려는 열망으로 태평양 을 건널때 위 偶 吟이라는 시를 썼다고 한다. 나라 잃은 한이 곳곳에 박혀 있다. 歸國有感 - 이승만 - 三十離鄕七十歸 歐西美北夢依依 在家今日還如客 到處逢迎舊面稀 삼십이향칠십귀 구서미북몽의의 재가금일환여객 도처봉영구면희 서른에 고향 떠나 일흔에 돌아오니 구라파 서쪽 미주 북쪽이 꿈속에 아득구나 돌아와 고향집에 있는 오늘 내가 손님만 같고 곳곳이 맞이하는 사람들 옛 얼굴 드물구나 1954년 8월 24일 미국을 국빈 방문 중이던 이승만 대통령이 뉴욕 맨해튼 영웅의 거리에서 카퍼레이드 를 하는 모습. 영화 '건국전쟁'의 김덕영 감독이 2023년 6월 미 워싱턴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서 발굴한 약 45초 분량의 동영상 일부다. /김덕영 감독 제공 在美旅行時卽事(미국 여행 중에) - 이승만 / 丁亥년 4280(1947)- 六萬里行坐往還 只要四十四時間 浮空一萬六千尺 上無雲霧下無山 육만리 먼길을 앉아서 가고 오네 게다가 단지 사십사시간 허공에 떠서 일만육천척 위로는 구름 없고 아래로는 산도 안보여 釣 歸(고기 낚고 돌아오며) - 이승만 / 甲午早春 於 鎭海 1954년 이른 봄 鎭海에서 - 折得柳條數尺餘 穿魚如葉葉如魚 魚兒巨細何須問 志不在魚只在漁 꺽어든 버들가지 꿰어든 고기새끼 자냐 굵으냐 물어 무엇하오 내 뜻이 낚는데 있고 고기 탐이 아닌걸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이승만(1875~1965) 杆城淸澗亭 韻 - 이승만 / 杆城 淸澗亭에서 - 半島東邊地盡頭 蓬萊咫尺是瀛洲 秦童昔日求何藥 漢帝幾時夢此樓 濊貊靑山當戶立 扶桑紅日上欄浮 亂中風月無人管 一任漁翁輿白鷗 동으로 바닷가 뭍이 다한 곳 蓬萊 瀛州 선경이 예가 아닌가 秦始皇 무슨 약을 구하렸던고 漢武帝도 이 다락을 꿈꾸었으리 濊貊땅 푸른 산들 앞에 둘리고 扶桑의 아침 해 솟아 오른다 난리 통에 좋은 풍정 주인이 없고 어부와 백구에게 맡겨 버렸군 ▲ 워싱턴서 [JAPAN INSIDE OUT]을 집필하던 1941년 무렵 이승만과 프란체스카.ⓒ연세대이승만연구원 연서 - 프란체스카 도너 리 - 이 세상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백 사람 있다면 그중에 한 사람은 나입니다. ​ 이 세상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열 사람 있으면 그중에 한 사람은 나입니다. ​ 이 세상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밖에 없다면 그 한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 이 세상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그건 내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 20대 청년 이승만이 힌성감옥에서 옥중동지들과 찍은 사진 ⓒ자료사진 고목가(Song of an Old Tree) - 이승만 / <협성회보> 제10호 (1898. 3. 5) - [일] 슬프다 뎌 나무 다 늙었네 병들고 썩어셔 반만 셨네 심악ᄒᆞᆫ 비바람 이리저리 급히 쳐 몃 ᄇᆡᆨ년 큰 남기 오ᄂᆞᆯ 위ᄐᆡ [이] 원수에 ᄯᅡᆺ작ᄉᆡ* 밋흘 ᄶᅩᆺ네 미욱ᄒᆞᆫ 뎌 ᄉᆡ야 ᄶᅩᆺ지 마라 ᄶᅩᆺ고 ᄯᅩ ᄶᅩᆺ다가 고목이 부러지면 네 쳐ᄌᆞ 네 몸은 어ᄃᆡ 의지 [삼] 버틔셰 버틔셰 뎌 고목을 ᄲᅮ리만 굿박여 반근되면 새 가지 새 입히 다시 영화 불 되면 강근이 자란 후 풍우불외 [ᄉᆞ] 쏘하라 뎌 포수 ᄯᅡᆺ작ᄉᆡ를 원수에 뎌 미물 남글 ᄶᅩ아 비바람을 도아 위망을 ᄌᆡ촉ᄒᆞ야 너머지게 ᄒᆞ니 엇지 ᄒᆞᆯ고 (『ᄆᆡ일신문』, 1898. 3. 5.) 고목가(Song of an Old Tree)​ (일) 슬프다 저 나무 다 늙었네 병들고 썩어서 반만 섰네 심악한 비바람 이리저리 급히 쳐 몇 백년 큰 나무 오늘 위태 (이) 원수의 땃작새 밑을 쪼네 미욱한 저 새야 쪼지 마라 쪼고 또 쪼다가 고목이 부러지면 네 처자 네 몸은 어디 의지 (삼) 버티세 버티세 저 고목을 뿌리만 굳박여 반 근 되면 새 가지 새 잎이 다시 영화 봄 되면 강근이 자란 후 풍우 불외(風雨不畏) (사) 쏘아라 저 포수 땃작새를 원수의 저 미물 나무를 쪼아 비바람을 도와 위망을 재촉하여 넘어지게 하니 어찌할꼬​ * ᄯᅡᆺ작ᄉᆡ : 딱따구리 * 해설 : 이 작품은 번역 찬송가를 모방하여 만든 정형시로서, 행과 연의 배열 방식이 눈에 띤다. 행 의 배열 방식은 매연 모두 3·3·4/3·3·4/3·3·7/3·3·4의 음수율로 일정한데, 이처럼 정교한 음 수율은 시조나 가사와 같은 전통 시가의 경우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또한 매연마다 3음보·3음 보·4음보·3음보로 동일하게 처리한 행 배열 역시 이 작품이 서양 악곡에 쓰인 가사라는 느낌을 갖 게 한다. 일반적으로 신체시는 자유시를 일컫지만, 전통시 형식을 벗어나기만 하면 그것을 전형시든 자유시든 상관없이 신체시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한 경우에는 이 작품을 최초의 신체시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시는 붕괴 직전의 대한제국을 '고목'에, 친러파 관료들을 '딱따구리'에, 러시아 의 위협을 '비바람'에, 애국지사들을 '포수'에 비유하여 친러 매국 관리들을 제거하고 나라의 기초를 굳건하게 하여 조국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하자는 내용의 작품이다. [일]에서는 ‘고목’이 처해 있는 ‘위태’로운 현실 상황을 보며 ‘슬프다’는 감정을 비추고 있다. [이]에서는 그 ‘위태’로움을 알 지 못하는 ‘딱따구리’가 고목의 ‘밑을 쪼’고 있다. ‘처자’와 ‘몸’을 의지할 곳이 ‘고목’밖 에 없으면서 ‘고목’을 쪼는 딱따구리를 ‘미욱하다’고 평하고 있다. [삼]에서는 ‘뿌리만 끝 박 혀’ 얽힌 나무의 뿌리가 되면 언젠가 ‘새 가지 새 잎’이 나고 다시 ‘영화가 불’ 것이며, 강한 뿌리가 자란 후에는 바람은 두렵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사]에서는 ‘포수’가 ‘비바람을 도와 위 망을 재촉’하는 ‘원수의 미물(딱따구리)’을 쏘기를 바라고 있다. ​ ▲ 1919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된 44세 이승만.ⓒ연세대이승만연구원 * 이승만 : 황해도 평산 출생(1875), 배재학당 입학(1895), 협성회보 기자(1896), 독립협회사건으로 7년간 옥고(1898), 석방·도미(1904),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국제정치학 박사(1910), 하와이에서 태평 양주보 창간(1914), 호놀룰루에 기독교학원 독립군관학교 설립(1917),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와 대통 령 역임(1919), 상해임시정부의 배척으로 사임. 미국에서 독립운동(1921), 제헌국회의장. 초대 대통 령 취임(1948), 자유당 창당 총재(1951), 4·19혁명으로 하야. 하와이로 망명(1960), 사망(1965) 이승만 건국사 https://inyeon33.tistory.com/8749771 ▲ 20대초반 이승만이 창간한 3개신문. 1898년1월1일 주간 협성회회보. 4월9일 매일신문, 8월10일 제 국신문. 매일신문은 한국민간인 최초의 일간지. 제국신문도 일간지, 모두 한글전용. ⓒ뉴데일리DB 건국 대통령 이승만이 쓴 고목가 출처 : 뉴데일리 기사 “이승만 作 ‘고목가’, 국내 최초의 신체시로 인정을” 이승만포럼 이복규 교수 "음보율 같은 최남선 ‘해에게서 소년에게’보다 10년 앞서" ​https://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9/08/26/2019082600104.html https://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9/08/21/2019082100151.html https://www.newdaily.co.kr/site/data/html/2019/06/24/2019062400161.html 이승만 전 대통령의 한글시 ‘고목가(영문명 Song of an Old Tree)'(1898)가 국내 최초의 신체시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최초의 신체시로 학계가 인정하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와 같은 음보율로 구성된 데다, 시가 발표된 시점은 최남선의 시보다 10년 정도 앞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0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제102회 이승만포럼의 주제강연 ‘이승만 작 <고목가>의 문학사적 의의’에서 이복규 서경대(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이승만의 '고목가'는 최초의 신체시로 문학계의 인정을 받고, 한국문학사에도 (최초의 신체시로) 편입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목가, 이승만 정치의식 표현한 작품” 이 교수에 따르면 이승만의 순한글 시 ‘고목가’는 1898년 3월5일자 협성회보(제10호)에 발표됐다. 현대문으로 고쳐 쓴 시는 지난 6월18일 열린 ‘이승만포럼 100회 기념 학술세미나’에서 허경진 교수 가 소개했다.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고목가(Song of an Old Tree)​ 슬프다 저 나무 다 늙었네 병들고 썩어서 반만 섰네 심악한 비바람 이리저리 급히 쳐 몇 백년 큰 나무 오늘 위태 원수의 땃작새 밑을 쪼네 미욱한 저 새야 쪼지 마라 쪼고 또 쪼다가 고목이 부러지면 네 처자 네 몸은 어디 의지 버티세 버티세 저 고목을 뿌리만 굳박여 반 근 되면 새 가지 새 잎이 다시 영화 봄 되면 강근이 자란 후 풍우 불외(風雨不畏) 쏘아라 저 포수 땃작새를 원수의 저 미물 나무를 쪼아 비바람을 도와 위망을 재촉하여 넘어지게 하니 어찌할꼬​ 이 교수는 “이 시가 이승만의 정치의식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고목’은 대한제국, ‘땃작새(딱따구리)’는 친러 관료들, ‘비바람’은 러시아의 위협, ‘포수’는 독립협회나 협성회의 개화파 인사들을 지칭한다는 주진오 교수의 해석에 동의했다.​ 이 작품의 원시는 조선후기 사람 이양연(1771~1853)의 ‘啄木(탁목)’이다. ​ 啄木(탁목)​ 啄木休啄木 딱따구리야 나무를 쪼지 말아라 古木餘半腹 고목 속이 반 넘게 텅 비었구나. 風雨寧不憂 비바람 까짓것 걱정 없지만 木摧無汝屋 나무가 부러지면 네 집도 없지​ 이 교수는 이 작품의 소재가 딱따구리이고, 늙고 병든 고목을 쪼는 딱따구리에 고목이 쓰러지면 네 둥지도 사라지니 나무 쪼는 행동을 중지하라고 권고하는 점 등으로 봤을 때 ‘고목가’의 원시가 확 실하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탁목에는 없는 ‘고목더러(또는 고목을) 버티자’고 한 것과 ‘포수더러 딱따구리를 쏘 라’고 한 대목을 ‘고목가’에 넣은 것은 현실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 노력을 기울일 것을 주 장하는 이승만의 실천적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이어 “이승만은 한문학을 경험한 사람이지만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을 여러 사람에게 알려 소통하며 공감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한시가 아닌 한글시로 작성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고목가, 노래로 불린 증거 없어 창가로 보기 힘들어”​ 이 교수가 '고목가'를 우리 문학사 최초의 신체시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음보율 때 문이다. 이 시의 각 연은 3음보, 3음보, 4음보, 3음보의 행으로 구성됐는데, 이는 최초의 신체시로 학계에서 인정받는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와 같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고목가를 신체시가 아닌 창가로 봐야 한다’는 일부 학자들의 견해에 대해서는 “일부 학자들은 자 수율을 기준으로 정형성 면에서 문제가 있어 이 작품을 신체시로 보지 않는다고 설명한다”며 “하지 만 중국이나 일본의 작품들과 달리 우리 시가에는 자수율 면에서 정형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단 지 자수율을 기준으로 고목가가 신체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 작품을 창가로 보려면 이를 노래로 불렀다는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이런 증거가 없기 때 문에 창가로 보기도 힘들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이승만의 '고목가'가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보다 10년 앞서 나온 신체시로 우리 문 학사적으로 새롭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 ▲ 김덕영 감독은 “이승만 대통령이 망명했던 하와이에서 세상을 떠난 뒤에야 그토록 그리던 고국 땅에 올 수 있었다”며 “나라를 그토록 사랑하고 자유를 갈망했던 노인의 삶이 너무나 안타깝고 미 안한 마음에 영화를 통해 그를 추모하게 된다”고 밝혔다. * 건국전쟁영화를 통한 이승만 재조명​ ■들어가는 말 이승만 대통령은 당연히 “선구자, 선각자, 예언자, 애국자, 불출세의 영웅, 위인”이라고 불러야 할 사람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지금까지 이승만은 “독재자, 미국의 앞잡이, 친일파, 양민 학살의 주범, 부정선거 방조자, 하와이 망명자, 막대한 비자금 조성자, 플레이보이” 등 악담들이 따라다녔다​ 필자는 지난 2월 7일 이승만 대통령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영화 <건국전쟁> 영화감상후 필자 소감 을 다음과 같이 요약정리하였다.건국전쟁영화는 사실(FACT)에 기반한 충격과 감동의 연속이었다. 필 자는 독자제위께서 본 요약물을 정독한후 건국전쟁영화를 시청할 것을 강추드린다.​ ■ 주요 내용 다음은 전기와 영화에서 소개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의 중요 행적이다. ● 성장과정 1)1875년 3월 26일 전주이씨 후손으로 황해도 평산군에서 출생하셨다. 2)1895년 구한말에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에 수학하던 중 독립협회에 참여하였다. 1897년 만민 공동회에서 조선이 군주국에서 공화정으로 체제변화를 주장하여 사형선고를 받고 투옥되었다. 조선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인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의 집요한 구명운동에 의해 무기징역으로 감형 1904년 6년 만에 석방되었다. 20대 청년 이승만은 옥중에서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집필하였는데, 여기에서 5천 년 동안 지속되어온 우리나라 왕정(王政)을 민주공화정(共和政)으로 탈바꿈시키고 세계 화와 선진화를 지향하는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을 제시하였다.​ 3)1904년 미국으로 유학길을떠나 6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조지 워싱턴대 학사, 하버드대 석사, 프린 스턴대 박사과정 이수하였고 ​이때 맥아더 장군과 민족자결주의 선언으로 식민지 국가의 큰 희망이 되 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을 만나게 된다.​ 4)1910년 일시 귀국하여 YMCA 간사를 하다가 다시 도미.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폭력적 항거보다 외교를 통한 방법을 지속적으로 모색함과 동시에 국민들의 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이주민이 가장 많았 던 하와이에 정착하여 육영사업에 매진하였다. * 이승만이 폭력대신 외교적 방법을 택한것은 당시 700여만 일본군대에 비해 우리 독립군은 단지 2000여명 내외로인해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5)1919년 3·1 운동 직후 상해임시정부가 세워질 때 초대 대통령으로 옹립되었다. ​1922년 도미. 1930년 미국에서 한국 독립을 위한 적극적 외교활동을 하였고 1942년 얄타회담에서 미ㆍ소의 한반도 통치 방안을 비판하였다.​ 1945년 해방 후 40년간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였다.​ ● 주요 업적 이승만은 1948년 초대 대통령 당선되어 3대 대통령인 1960년까지 12년간 재임하셨다.​ 1) 건국(자유민주/시장경제) 북한은 1946년 1월 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하였기에 이승만이 1946년 6월 3일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 정부수립발언은 소련주도의 한반도 공산화를 막았으며 뒤이어 1948년 건국에 기여하였다. 당시 한국 민의 70%이상은 사회주의를 선호하였으며 극한적 이념갈등으로 인한 내전상황이었으나 이승만은 이런 내전을 극복한후 대한민국을 건국하였다. 당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만이 살길이며 공산주의는 절 대불가함은 40년간 미국생활을 하고 미국에서 학사ㆍ석사ㆍ박사확위를 취득한 이승만 대통령만이 체 득하였다. 이승만의 건국은 518년 조선왕조를 민주공화정으로 바꾼 대혁명이었다. * 참고 대한민국 여성 독립운동가인 김활란(金活蘭)여사는 “이승만은 미국의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그리고 에이브러햄 링컨을 모두합친 만큼의 위인이라고 극찬하였다. ​ 2) 국가보안법을 제정(구국을 위한 신의한수) 1948년 여순반란사건을 계기로 제헌국회에서 반국가활동을 규제할 목적으로 제정하였다. 국보법은 5 천여 명의 간첩 색출, 33만 명의 남로당원 숙청을 하여 대한민국 공산화를 저지하였다. 당시 남로당 숙청이없이 1950년 6·25가 발발하였다면 지금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라는것을 생각만해도 오금이 절린다. 이승만은 공산주의는 콜레라와 같다는등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주월 미대사인 테일러(한국 전쟁시 미 8군 사령관)는 월남에 이승만같은 분이 계셨더라면 월남은 공산화가 안되었을 거라는 아쉬 움을 표했다. 3) 토지개혁으로 공산화방지/ 경제발전도모 6.25 전쟁발발 직전에 토지개혁을 완료하여 북한군이 남침이후 남한인들에게 토지재분배 회유를 해 도 북한군 기만에 넘어가지 않았다. 이승만의 토지개혁으로 인해 지주에게는 삶을 보장하고, 농민에 게는 토지를 분배하여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으며, 사업가에게는 사업을 통한 자본의 축적을 가능케하 여 경제발전계기를 마련하는 등 일거삼득을 이루었다. * 참고 서남아시아,필리핀 및 중남미 국가들은 토지개혁을 못해 지주층이 그대로 상류층에 남아있어 가난하 게되었고, 파키스탄은 봉건적 잔재가 남아 아직도 가난하다. 4) 국군통수권자로서 탁월한 리더십 발휘 첫째. 미국내 인맥을 활용 한국전에 미군의 조기참전을 유도했다. 이승만은 오랜 미국생활을 통해 쌓 은 미국내 인맥을 동원하여 미국등 UN참전을 이끌었다.​ ※ 이승만은 1942년 발족한 미국내 한미우호 협회구성원인데 당시 헤리슨 목사도 한미우호협회구성원으로서 미상원 원목이고 투르만대통령은 부통 령 시절 상원의장으로서 상원 원목인 헤리슨 목사와 밀접한 관계였다. ※이승만은 미국내 미군의 한국전 참전을 적극 지지한 빌리 그레함 목사와도 인연이 깊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전쟁 발발직전에 한국을 방문한 미 국무부 고문인 달라스를 설득시켜 미군을 한국전에 참전토록 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 (UN군 사령관) 소령때 인연을 맺었다. 예컨데 이승만의 이런 인맥들이 작용하여 미국은 6월 25일 북한 남침후 5일만에 미지상군 파병을 신 속결정하고 뒤이어 7월 초 UN군을 구성하였다.​ 둘째, 맥아더 사령관에게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이양하여 전쟁의 효율성을 높였다.​ 셋째, 전선지역에 UN군과 국군 격려 방문 80을 바라보는 노구에도 매주 1회이상 총 279회, 부산에서 포탄이 빗발치는 전방격전지(백마고지,단 장능선 및 펀치볼 지역등)까지 쌍발기와 연락기를 번갈아 타고 순시하였다. 이승만은 이런 열정으로 국군과 미군장성들의 충성과 존경을 받았다. 넷째, 전쟁중에도 전후복구대비 인재를 양성하였다. 한국전쟁중 부산에 연합대학을 설립하여 전쟁후 전후복구할 인재(군복무 면제)를 양성했다.​ ※ 당시 이승만은 하와이 회관을 팔아 인천에 인하대학을 설립했는데 여기서 인은 인천,하는 하와이 앞글자를 딴 것이다. 그런데 오래전 인하대 내 이승만 대통령 동상이 제거되 창고에 처박혀 있다고 한다.​ * 참고 6.25 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주한대사인 무초는 이승만대통령에게 망명정부를 요청하자 이승만은 무초 대사에게 권총으로 위협을 가했으며 이승만은 최악의 경유 총으로 북괴군을 죽인 다음 나의 가족을 죽이고 맨 마지막에는 자신을 죽이겠다는등 대한민국수호에 결연함을 보였다.​ 5) 평화선 이승만은 6.25 전쟁중인 1952년 1월 18일 해안으로부터 60마일 이내는 우리영토임을 선언하여 미국등 연합군의 승인을 받았다. 평화선 선언으로 오늘날 독도는 한국땅이며 독도수역의 광물과 수산자원을 확보하였다. * 참고 혹자는 이승만을 친일파로 매도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북한 김일성은 친일파라도 김일성에 충성 하면 각료로 기용했지만 이승만 내각에는 친일파가 없었다. 이승만이 전쟁중에도 평화선을 선포하여 독도를 한국영토로 하였고, 한국전쟁에 일본군이 한국에 주둔하면 총부리를 일본군에게 겨냥하겠다는 단호함을 보였다. 6) 6.25 전쟁중 일본군과 대만군 주둔과 지원을 거부 이승만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청군을 끌여드린것이 결국 1885년 텐진조약에 의거 일본 군도 개입하여 청일전쟁이 발생한것을 교훈삼아 6.25 전쟁기간 일본군과 대만군의 한국내 주둔 및 지 원을 강력거부하였다.​ 7) 성공적인 휴전협정 이승만은 성공적인 휴전협정으로 3가지를 이루었다. 첫째, 한미상호방위조약체결이다. 2만 7천여 명의 반공포로들을 석방하는 강수로 미국에 압력을 가하 여 기적적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1953년 휴전 이후 대북 전쟁 억제와 안정적인 안보 환경 을 보장하였다.​ * 참고 당시 한미상호조약체결이 없었다면 남한보다 40배 국력을 갖춘 북한, 압록강 북쪽에는 한반도 100배 인 중국 그리고 두만강 넘어 한반도 영토 200배인 소련이 대한민국을 삼켰을 것이다. ​ 둘째,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8억달러 경제원조를 받아냈다. 셋째,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강시켰다.​ 8) 교육정책 이승만은 오랜 미국생활과 미국에서 석ㆍ박사학위까지 받은 당대 최고의 지성인으로서 유독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이다. 이승만 정부가 재임 12년간 지출한 정부 예산 집행내역을 보면 국방비로 51%, 교육비로 17%를 지출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교육입국론은 80% 문맹률을 20%로 감소시킴이 만 30 여년만에 조국 산업화 달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고등교육기관은 해방 당시 대학과 전문학교를 합쳐 19개교, 학생 8,000여 명에 불과했으나 1960년에는 총 68개교, 학생 수 약 10만명으로 늘었다. 국가 예산이 모자라 고등교육기관을 지을 형편이 못되자 이 대통령은 사회 지도층 인사들에게 “독립운동 하는 심정으로 학교를 세워달라”고 호소했다. 9) 기타 * 최초의 일간지인 매일신문을 창간하여 민중을 계몽시켰다. * 미국 화와이에 최초 남녀공학학교인 한인기독학원을 설립하였다. * 이승만은 40년간 미국생활중 미국국적취득을 끝까지 거부하였다. * 한국의 최초독립을 위한 1943년 카이로 선언에 이어 1945년 얄타회담과 포츠담회담에서도 한국독립 이 거론되도록 하였다. * 1948년 스위스와 프랑스보다 앞서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였다. * 이승만은 당시 정치적으로나 자본면에서 열악함과 특히 전쟁상황임을 고려하여 내각제 보다 대통령 중심제에 의원내각제를 가미하여 강력한 정책을 추진토록 하였다. ● 대통령 하야 이승만은 4·19 의거 발생시 “불의를 보고 침 묵하지 않는 학생들이 있으니 나는 성공한것 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1주일 뒤 자진 하야하는 선진정치문화를 남기었다.​ * 이승만 대통령은 젊은 학생들이 경찰이 쏜 총알로 피살되자 내가 총알을 맞아야 할텐데 하면서 그 렇게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 이승만은 1960년 4·19 의거 후 하야 후 1주일 뒤 하와이로 출국, 5년 뒤인 1965년 (90세) 해외에서 영면한 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 맺음말​ 1.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을 향한 미국인의 사랑과 관심은 시대를 초월해 뜨겁다. 기념관은 물론 미국전역에 수많은 기념비와 동상은 물론 그에 대한 전기·영화·TV드라마가 넘친다. * 워싱턴 대통령은 여자관계가 복잡한것도 있었지만 미국인들은 옥에 티를 침소봉대하여 워싱턴 업적 을 결코 훼손하지 않았다. 일본에선 봉건제를 허물고 근대국가를 세운 메이지 일왕과 중국에선 모택 동의 영화와 드라마가 만들어졌다. * 모택동도 대약진운동 실패와 처참한 문화혁명을 초래했지만 등소평은 모택동에 대해 공7, 과3으로 모택동의 업적을 부각시켰다.​ 2. 우리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하여 그동안 정치역학의 희생물로 제대로 된 평가와 미화작업이 이 루어지지 않았으니 만시지탄의 감이 있다. 다행이 2023년 6월 28일, 전직 대통령 5명의 아들들이 한 자리에 모여 초대 대통령 '이승만 기념관' 건립의 필요성에 동감하였고 뒤이어 전직 운동권과 진보정 치인등 각계각층이 범국민적으로 동참하고있다. 3.진정한 보수는 먼저 산 사람들의 수고를 잊지 않는다. -소설가 이문열​ * 우리국민들도 미국민이나 등소평같이 건국지도자에 대해서는 과보다는 공(업적)을 중시하는 균형된 역사인식을 갖길 바란다. 한국문화안보연구원. 김명수(육사 31)박사 2024년 2월 9일 ▲ 20대 이승만(오른쪽)과 아버지 이경선 옹. 6대독자 이승만은 열여섯살에 결혼,아들을 낳았다. ​ ▲ 1898년 3월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 연단 앞에 태극기를 세웠다.(자료사진) ​ ▲ 1910년8월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승만(왼쪽),오른쪽 책 표지는 프린스턴대학 이 단행본으로 출판한 이승만의 박사학위 논문집.ⓒ뉴데일리DB ▲뉴욕에서 발간한 이승만의 영문 저서 일본 내막기, 1941 ▲1952년 7월 9일, 이승만 대통령이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시찰하고 있다. 반공포로들이 태극기를 흔 들며 대통령을 열렬히 환영하고 있다. 1953년 6월 중순 이승만은 바로 이 포로들을 포함한 2700여 명 의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공공부문 ▲유엔 측 대표 해리슨 중장(왼쪽 테이블 착석)과 북한 대표 남일 대장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문에 서명하고 있다. /공공부문 ▲ 統一最先(통일최선) 北進통일(북진통일) ▲ 南北統一(남북통일) 盛振內外(성진내외) ▲ 平天下之道(평천하지도)-나라를 잘 다스리는 길 ▲ 萬枝同根(만지동근)-만가지로 나누어 있어도 뿌리는 같고 百波一源(백파일원)-백번 갈라진 물도 근원은 하나로세 尊祖崇宗(존조숭종)-조상을 높이고 조상을 존중하며 愛親睦族(애친목족)-어버이를 사랑하고 동족이 화목하게 하라 敬老慈幼(경노자유)-노인을 공경하고 어버이를 사랑하고 斥邪護正(척사호정)-틀린것을 물리치고 바른 것을 두호하라 一意循此(일의순차)-한결같이 이 뜻을 따라 永無或替(영무혹체)-길이길이 변함없게. 저 바다 너머 그리운 나라 / 영화『건국전쟁』주제가 / 송도로얄합창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