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아름다운 문학

<백윤석> 강 / 거미 / 안나를보며 / 마흔의강가에서 / 발자국

이름없는풀뿌리 2024. 3. 1. 04:20
- 백윤석 / 2003/05/04 - 온 세상 곳곳으로 흐르던 강물이 높고 낮음 필요 없는 사람들 사이로 흘러 깊고 긴 장벽 쌓으며 서로를 가른다 ​ 낮은 데로 향한다는 가증스런 강의 위선 장벽 위에 우뚝 서 바라만 보는 그들 갈수록 더 깊어만 가는 사람 사이 깊은 골 ​ 우리는 어찌하여 다리를 놓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고 발만 동동 구르는가 하찮은 징검다리도 놓고 나면 편한 것을. ​ 거미 - 백윤석 / 2003/04/30 - 휘어진 여름의 허리를 감아 감아 열린 하늘 틈새로 새어 나는 물레 소리 조상의 슬픈 전설을 이우며 실을 짠다 ​ 흉측한 신의 형벌도 재주는 어쩌지 못해 곱디 고운 은실로 짠 끈적한 삶의 요람 지나는 날벌레들의 영혼을 뒤흔든다 ​ 은빛 그네 넋 잃은 너희가 잘못이다 아아! 이를 끝으로 업보 마칠 수 있다면 산 채로 갉아 먹으며 읊조리는 피울음. 안나를 보며 - 백윤석 / 2003/03/26 - 안나의 가슴에 떠있는 태양은 피곤해도, 때가 되어도 저물지 않는다. 수많은 좌절과 바꾸었을 맑은 영혼, 저 불빛 ​ 늘 보던 빛 앗아간 신의 이기 투정하던 내게 빛은 마음으로 보는 거라고 일깨우는 그녀는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암흑 속의 빛이었다 ​ 태양을 가슴에 꽃으로 피우기까지 얼마나 오랜 인내가 피고 지고 했을까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홀로도 밝은 저 혼불 ​ 근심과 걱정을 기도로 승화하고 마음에 눈을 열어 세상의 빛을 보는 눈 뜬 날 부끄럽게 하는 사무치는 통점(痛點)이었다 마흔의 강가에서 - 백윤석 / 2003/03/31 - (1) 그날, 내 마흔의 강가에는 실종된 희망을 찾아 철새들이 특파되고, 날마다 여위어 가던 햇살 몇몇이 내장을 드러낸 채 숨 헐떡이는 강바닥을 부축해 세웠다. ​ 끊어져 버린 희망의 보급로를 이으려고 바람은 이리 저리 아우성치며 뛰고. ​ (2)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해 1급 안개경보가 내려지고 정액처럼 흐릿한 안개를 뚫고 어디선가 어머니의 음성이 들려왔다. ​ "사람이 욕심으로만 사는 거이 아니여, 다 털고 일어나거레이. 애덜 생각해야제." ​ 귓전에 매미소리처럼 윙윙 거리던 말들이 '애덜'이라는 말끝에 가슴에 꽂힌다. 아침 햇살 같은 아이들의 미소가 파도처럼 밀려들자 제멋대로 흐르던 혈류가 방향을 찾은 듯, ​ 잠시 정적이 흘렀다. ​ (3) 실핏줄 같은 빛줄기가 보였다 순간, 나는 내 엉덩이를 핥고 있는 먼지들을 떼어내고 자리에 우뚝 섰다. ​ 참아 보리라 이겨 보리라 ​ 내 피가 말라야 강바닥에 물이 고이고, 내 몸을 떼어내야 강가에 푸른 잎 피울 수 있다면... ​ (4) 그날 이후도 안개는 가시지 않았다. 희망을 찾으러 특파된 철새는 행방이 묘연해도 ​ 찾지 않았다. ​ 희망은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고 산다는 일 자체가 희망이라고 깨달은 내 마흔의 강가에도 아주 미약하나마 물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 발자국 - 백윤석 / 2003/03/04 - 중천에 달과 별을 다 동원해 놓고서 오늘밤도 발자국들 회의중인 모양이다. 내일은 주인인 나를 무엇으로 따를까를. ​ 소리로 따를 때는 섬뜩하기 그지 없고 모양으로 따르자니 답답도 하여서 밤새워 토론해 봐도 내려지지 않는 결론. ​ 그들인들 못난 주인 따르고야 싶겠냐만 잘나고 못나고를 따지는 건 사치여서 묵묵히 따르는 것만이 그네들이 받은 특명. ​ 냄새 나는 발끝에 눌려야만 사는 삶. 숨인들 크게 한번 내쉴 수나 있겠냐만 그래도 싫다 하잖고 날 따르는 발자국. 푸른산중백발옹(남창지름시조) / 자평 김성수 원로명창 푸른 산중(山中) 백발옹(白髮翁)이 고요 독좌(獨坐) 향남봉(向南峰) 이로다. 바람 불어 송생슬(松生瑟)이오. 안개 걷어 학성홍(壑成虹)을 주곡제금(奏穀啼禽)은 천고한 (千古恨)이오. 적다정조(積多鼎鳥)는 일년풍(一年豊)이로다. 누구서 산을적막(寂寞)하다던고. 나는 낙무궁(樂無窮)인가 하노라. * 작품 해설 : 푸른 산중에 백발의 노인이 고요히 홀로 남쪽 봉우리를 향해 앉아있더라. 바람 부니 소나무에는 거문고 소리가 들리고 안개가 이니 골짜기에는 무지개가 뜨더라. 주걱새 우는 소리는 천 고의 한을 노래하고 소쩍새 우니 이 한 해 또한 풍년이 들겠구나. 누가 산이 적막하다고 하였던고? 나에게는 이곳이 즐거움이 끝이 없는 곳이라 생각하노라. 주걱새는 두견새의 사투리이다. 우리말로는 접동새라고 하며 한자어로는 두우·자규라고도 한다. 사전에는 소쩍새라고도 되어 있는데, 소쩍새는 올빼미과에 속하는 새로 두견새와는 그 생김새가 다르다. 작자 미상의 시조로 산속의 다양한 풍경과 소리들을 묘사하여 인간 세상의 이상향을 노래하고 있다. 이상향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다. 화자는 산 속의 삶이 낙무궁이라하나 그것은 화자가, 아닌 누구나 다 꿈꾸고 있는 우리들의 이상적인 세계일 것이다. 석암제 남창 지름 시조로 널리 불리 워지고 있는 곡이다. 남창 지름시조는 초장도 높은 소리로 질러서 부르고 중장에서도 높은 소리로 질 러서 부른다. 종장은 평시조 가락과 같다. 지름시조는 가곡「두거」를 본받아 평시조를 변형시켜 만 든 곡조이다. 두거는 ‘머리를 든다’는 뜻으로 초장 처음을 높은 소리로 질러내기 때문에 두거시조 라고도 한다. 삼죽금보에는 지름시조가 소이시조라는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