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아름다운 문학

<백윤석> 밤하늘 / 크레파스 / 도장집박씨 / 그림자 / 낙엽

이름없는풀뿌리 2024. 3. 2. 07:13
밤하늘 - 백윤석 - 어슬렁이는 추억을 미끼로 매어 달고 밤하늘에 낚시대를 길게 누워 드리우면 눈 멀은 작은 별 하나 깨작깨작 신호하네. ​ 길가에 나트륨등 드넓게 핀 빛 부러워 온 몸 살라 남늦은 별빛 달빛 흉낼 내다 기어이 제 빛 마져 잃고 달빛에 넘어가네. ​ 낚시 걸린 별을 따다 등불로 매어달고 어린 시절 별 헤던 추억에 잠기노라면 서러운 가슴 달래던 그 별 아직 깜빡이고. 크레파스 - 백윤석 - 색색의 병정들이 갑옷을 두르고 불려갈 날 기다리며 사열하고 서있네 어떤 건 불려 나갔다가 동강나 돌아오고 ​ 아마도 바깥세상은 치열한 전쟁터인듯 불려나간 것들마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곳곳에 선혈을 묻히고 돌아오는 귀향길 ​ 개중에 온전한 것은 빈자리를 지키고 순국한 동료들을 애도하고 섰는데 그래도 한번 뽑히지 않는 불공평한 색의 나라. 도장집 박씨 - 백윤석 - 도장집 박씨는 상이군인이다 수선 집에서 고친 긴 소매 안에는 주인말도 듣지 않는 죄많은 손이 숨겨져 있다 나라를 위해 바쳤던 몸 온전하게 돌아오지 못한 것이 죄라면 죄였다 가게 에 온 사람들은 한쪽 손 만으로도 능숙한 손놀림을 보며 똑 바로 쳐다 보지도 못한 채 제 각각으로 부지런을 떠는 시계들이 도장집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곤 했으리라 ​ 바로 새기고 바로 보이는 똑 바른 세상은 없을까 거꾸로 새겨야 바로 보이고 화장을 해야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얼굴이 어쩌면 자기 모습이라고 생각한 듯 도장집 박씨는 꾸벅꾸벅 조는 일이 많아져도 하는 일을 그만 두지 않았다 ​ 도장을 찾으러 온 사람들은 거꾸로 세상을 새겨야 하는 박씨의 인생을 잊은 채 제 이름의 현란함만을 부르짖으며 저리도 거꾸로 된 제 이름을 자랑스레 이 곳 저 곳에 찍어대고 있는 것이었다 그림자 - 백윤석 - 햇살이 나를 범해 나는 그를 낳는다 배부름도 산통도 없이 쑤욱쑥 낳은 그 그래서 만만한 게다 가슴에 그를 품는다 ​ 편안하다 그의 속은 그에겐 굴레가 없다 아침이면 눈을 떠 옆에 누운 그를 깨우고 쓰디 쓴 내 십자가를 그에게 지운다 ​ 단 한벌 뿐인 무채색 의복을 평생동안 한번도 갈아 입지 못하면서도 그는 참 비위도 좋다 나를 따르는 것을 보면 ​ 햇볕에 그을린 몇평의 절망을 아무 일도 아닌 듯 나를 따라 접선하고 샘많은 어둠의 비위를 살알살 건드리고 있는 그는... 낙엽 - 백윤석 - 지난 가을 윤회(輪廻)를 경험하지 못한 잎새들이 어미를 떠나 살아야 하는 극도의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몸소 체험하지 못한 윤회는 전설일 뿐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한 채 여위어 갔다 ​ 찬바람이 몹시 불던 날 바람이 들려주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태생의 비밀에 몸을 달구어 사위어 가고 ​ 오랜 사유의 시간을 지나 그들 중 용감한 몇 몇이 가슴에 촘촘히 유서를 쓰고는 공중에 몸을 날려 불안했던 사유의 시간을 접는다 ​ 처음 느껴 보는 자유로움에 주저하던 잎새들이 몸을 얶어 뒤따르고 세월에 곰삭는 몸을 추스려 어미 몸이 추울까 곁에 눕는다 참 따스하다 어미 몸은... 바람도 쉬어 넘고(남창지름시조) / 이준아 시조집 바람도 쉬어 넘고 구름이라도 쉬어 넘는 고개 산진이 수진이 해동청 보라매라도 다 쉬어 넘는 고봉 장성령 고개 그 넘어 임 왔다 하면 나도 한번도 아니 쉬고 (넘어 가리). * 작품 해설 : 작자 미상의 시조이다. 바람도 쉬어 넘는 고개 구름이라도 쉬어 넘는 고개. 산지니, 수진니, 송골매, 보라매라도 다 쉬어 넘 는 높은 봉우리, 긴 성, 영 같은 고개. 그 너머에 임이 왔다고 하면 나는 한 번도 아니 쉬고 넘어가 리라. 산진이는 산에서 자란 야생매이며 수진이는 사람의 손으로 길들여진 매이다. 해동청은 매산냥에 쓰이 는 참매인 송골매를 말하며, 보라매는 1년이 안 된 새끼를 잡아 길들인 사냥 매를 말한다. 1년에서 2 년 사이를 ‘초지니’, 3년째가 되면 ‘재지니’라고 한다. ‘장성령’은 올라가 별을 딸 수 있다는 높고 높은 고개이다. 장성령은 전라북도 정읍 사람들이 남도로 가고자 할 때 넘어야 했고 남도 사람 들이 서울로 갈 때 넘을 수밖에 없었던 험한 고개이다. 노령으로도 불리워지며 갈재라고도 한다. 바 람도, 구름도 쉬었다 가는, 산지니, 수지니, 해동청, 보라매라도 쉬었다 넘는 불가능한 장성령 고개 도 한번도 쉬지 않고 단숨에 넘어가겠다는 것이다. 임에 대한 사랑이, 사랑에 대한 의지가 어떤지를 짐작할 수 있다. 임에 대한 그리움을 진솔하고도 담대하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에도 이런 여유로운 풍류과 진솔한 사랑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