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
- 백윤석 -
어슬렁이는 추억을 미끼로 매어 달고
밤하늘에 낚시대를 길게 누워 드리우면
눈 멀은 작은 별 하나 깨작깨작 신호하네.
길가에 나트륨등 드넓게 핀 빛 부러워
온 몸 살라 남늦은 별빛 달빛 흉낼 내다
기어이 제 빛 마져 잃고 달빛에 넘어가네.
낚시 걸린 별을 따다 등불로 매어달고
어린 시절 별 헤던 추억에 잠기노라면
서러운 가슴 달래던 그 별 아직 깜빡이고.
크레파스
- 백윤석 -
색색의 병정들이 갑옷을 두르고
불려갈 날 기다리며 사열하고 서있네
어떤 건 불려 나갔다가 동강나 돌아오고
아마도 바깥세상은 치열한 전쟁터인듯
불려나간 것들마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곳곳에 선혈을 묻히고 돌아오는 귀향길
개중에 온전한 것은 빈자리를 지키고
순국한 동료들을 애도하고 섰는데
그래도 한번 뽑히지 않는 불공평한 색의 나라.
도장집 박씨
- 백윤석 -
도장집 박씨는 상이군인이다 수선 집에서 고친 긴 소매 안에는 주인말도 듣지 않는 죄많은
손이 숨겨져 있다 나라를 위해 바쳤던 몸 온전하게 돌아오지 못한 것이 죄라면 죄였다 가게
에 온 사람들은 한쪽 손 만으로도 능숙한 손놀림을 보며 똑 바로 쳐다 보지도 못한 채 제
각각으로 부지런을 떠는 시계들이 도장집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곤 했으리라
바로 새기고
바로 보이는
똑 바른 세상은 없을까
거꾸로 새겨야
바로 보이고
화장을 해야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얼굴이
어쩌면 자기 모습이라고 생각한 듯
도장집 박씨는 꾸벅꾸벅 조는 일이 많아져도
하는 일을 그만 두지 않았다
도장을 찾으러 온 사람들은 거꾸로 세상을 새겨야 하는 박씨의 인생을 잊은 채 제 이름의
현란함만을 부르짖으며 저리도 거꾸로 된 제 이름을 자랑스레 이 곳 저 곳에 찍어대고 있는
것이었다
그림자
- 백윤석 -
햇살이 나를 범해 나는 그를 낳는다
배부름도 산통도 없이 쑤욱쑥 낳은 그
그래서 만만한 게다 가슴에 그를 품는다
편안하다 그의 속은 그에겐 굴레가 없다
아침이면 눈을 떠 옆에 누운 그를 깨우고
쓰디 쓴 내 십자가를 그에게 지운다
단 한벌 뿐인 무채색 의복을
평생동안 한번도 갈아 입지 못하면서도
그는 참 비위도 좋다 나를 따르는 것을 보면
햇볕에 그을린 몇평의 절망을
아무 일도 아닌 듯 나를 따라 접선하고
샘많은 어둠의 비위를 살알살 건드리고 있는 그는...
낙엽
- 백윤석 -
지난 가을
윤회(輪廻)를 경험하지 못한 잎새들이
어미를 떠나 살아야 하는
극도의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몸소 체험하지 못한 윤회는 전설일 뿐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한 채
여위어 갔다
찬바람이 몹시 불던 날
바람이 들려주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태생의 비밀에
몸을 달구어 사위어 가고
오랜 사유의 시간을 지나
그들 중 용감한 몇 몇이
가슴에 촘촘히 유서를 쓰고는
공중에 몸을 날려
불안했던 사유의 시간을 접는다
처음 느껴 보는 자유로움에
주저하던 잎새들이
몸을 얶어 뒤따르고
세월에 곰삭는 몸을 추스려
어미 몸이 추울까
곁에 눕는다
참 따스하다 어미 몸은...
바람도 쉬어 넘고(남창지름시조) / 이준아 시조집
바람도 쉬어 넘고 구름이라도 쉬어 넘는 고개
산진이 수진이 해동청 보라매라도 다 쉬어 넘는 고봉 장성령 고개
그 넘어 임 왔다 하면 나도 한번도 아니 쉬고 (넘어 가리).
* 작품 해설 : 작자 미상의 시조이다.
바람도 쉬어 넘는 고개 구름이라도 쉬어 넘는 고개. 산지니, 수진니, 송골매, 보라매라도 다 쉬어 넘
는 높은 봉우리, 긴 성, 영 같은 고개. 그 너머에 임이 왔다고 하면 나는 한 번도 아니 쉬고 넘어가
리라.
산진이는 산에서 자란 야생매이며 수진이는 사람의 손으로 길들여진 매이다. 해동청은 매산냥에 쓰이
는 참매인 송골매를 말하며, 보라매는 1년이 안 된 새끼를 잡아 길들인 사냥 매를 말한다. 1년에서 2
년 사이를 ‘초지니’, 3년째가 되면 ‘재지니’라고 한다. ‘장성령’은 올라가 별을 딸 수 있다는
높고 높은 고개이다. 장성령은 전라북도 정읍 사람들이 남도로 가고자 할 때 넘어야 했고 남도 사람
들이 서울로 갈 때 넘을 수밖에 없었던 험한 고개이다. 노령으로도 불리워지며 갈재라고도 한다. 바
람도, 구름도 쉬었다 가는, 산지니, 수지니, 해동청, 보라매라도 쉬었다 넘는 불가능한 장성령 고개
도 한번도 쉬지 않고 단숨에 넘어가겠다는 것이다. 임에 대한 사랑이, 사랑에 대한 의지가 어떤지를
짐작할 수 있다. 임에 대한 그리움을 진솔하고도 담대하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에도 이런 여유로운 풍류과 진솔한 사랑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