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
- 권영국 / 2003/02/11 -
바람이 문풍지를 붙들며 구시렁대다
어둠 속 개 짖는 소리로 잠이 들면
새벽 닭 회 치는 소리로 오감은 열리고
숨차게 발 밑으로 벗기는 산등성이
천만년 세월동안 약속을 기다린 듯
서서히 태백의 자태가 빗장을 풀어내니
용광로 쇳물을 부은 듯이 이글이글
동해를 박차고 떠오는 붉은 해
영겁의 청년 주목을 벅차게 끌어안는다.
칼바람 물기 빠진 태백의 주목 관목
가지로 피어나던 눈 같은 상고대는
살며시 얼굴 붉히며 이 순간을 함께 하니
발아래 우뚝 솟는 긴 세월 천년 풍파
온몸에 피돌기가 한없이 되살아나고
웅장한 네 모습으로 장쾌함을 표출한다.
한강은 흐른다
- 권영국 / 2003/03/07 -
금대산 고목 샘아 하얗게 햇살 먹고
한강 길 계곡으로 갈증 난 울부짖음
와르르 메밀꽃 같은 물안개 숲을 흔들고
긴 세월 굽어 돌던 의구한 저 물결은
언제나 곰비임비 다붓하게 흐르는데
과거사 갑남을녀들 가뭇없이 강물만 운다
노을로 내려놓는 말 많은 너섬에는
자기 살 태우던 인걸은 간데 없고
철새들 단작스러운 주둥이만 고리다
선착장 유람선은 고즈넉이 넘실대다
강 언덕 가녘으로 삿대를 놓아도
쉼 없이 걱실거리다 황해를 두드린다.
*곰비임비 : 물건이 거듭 모이는 모양
*가뭇없이 : 소식이 없다.
*단작스러운 : 하는 짓 이 매우 치사스럽다.
*걱실거리다 : 너그럽고 활발하게
횟집
- 권영국 / 2003/01/24 -
60촉 알 전구가 부스스 눈 비비면
통통히 물이 오른 횟집이 술렁이고
고요한 수족관으론 긴장감이 감돈다.
딴청을 피우면서 돌아서는 숭어 녀석
광어도 슬금슬금 배 깔고 눈 돌릴 때
획 하니 부는 바람에 큰 파도가 일렁인다.
도마로 발가벗은 긴장이 팔딱 이고
회칼은 잔뜩 고인 군침을 삼키며
쓰으윽 베는 소름에 슬픈 눈빛이 짜다.
첫사랑
- 부제:사과 / 권영국 / 2002/12/04 -
꼭 다문 붉은 입술 발갛게 부끄럼 타고
숨겨진 비밀들이 한 올 한 올 벗겨지면
물오른 탐스런 속살 첫사랑에 어쩔 줄 모르네
베어 문 네 향기가 내 혀를 감치고
살포시 사각이며 은은하게 부서지면
상큼한 네 첫사랑이 입안 가득 피어난다
고추잠자리
- 권영국 / 2002/12/04 -
햇살이 현을 퉁겨 고추밭에 내려앉고
한 마리 잠자리가 햇살 한 입 갈겨 물며
처마 끝 간들 바람에 날개 짓 살랑 인다.
청청(靑靑)한 가을 하늘 해(太陽) 타는 네 모습에
꼬리로 붙은 불이 송이송이 붉어지고
부끄런 가을 하늘은 발갛게 눈을 뜬다
*갈겨물며 : 떼어 물며
권영국 시조집 『세월의 흔적』 발간(2018)
저자 : 권영국
충남 洪城 출생
1958년 공주사범학교 졸업
1975년 중등교사(국어) 고시검정 합격
1958년 4월~1999년 8월 초등·중학교·고교 근무(42년)
시조·동시조·시 부문 등단
시 집 : 『가던 걸음 머문 곳에』
『꽃밭에서 노는 꽃사슴』
『에둘러 온 세월의 길목』
『뒤돌아 보면 그리운 사람』
『세월의 흔적』
교차로·한밭생활 : 생활칼럼 200회 연재
시조시인 권영국 선생이 시조집 『세월의 흔적』을 발간하였습니다. 오늘의문학사에서 ‘오늘의문학
시인선 시리즈 417번’으로 발간한 이 시조집에는 1부 단시조, 2부 연시조, 3부 동시조 작품이 선생
의 시조사랑 정신을 전하고 있습니다.
시조를 빚는 의미를 선생은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문학의 여러 장르 가운데 時調는 우리나라
의 固有문학이다.” “3章 6句 45字 내외의 平時調는 우리 시조의 主流를 이루어 오고 있다. 특히 종
장의 첫 구 3.5 음수율을 맞춰야 하는 것이 평시조의 명령이다. 鷺山 李殷相 씨가 終章이 없는 兩章
시조를 試圖해 보았지만 독자들의 呼應을 별로 얻지 못하였다. 사설시조, 엇시조 등이 있지만 평시조
가 지금까지 시조의 主流를 이루고 있는 것은 그만큼 독자층의 호응이 높다는 證據다.”
시조의 매력에 대하여도 간략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짧은 글 속에 많은 생각을 넣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몇 수의 시조를 써 보면서 느낀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은 고려 말 시조가
처음 誕生하면서부터 時調가 그 시대의 역사적 사실이나 애국적 감정, 개인적 사상 감정을 여실히 드
러내었으니 이것이 시조가 갖는 문학적 魅力이다.”
시조시인 권영국 선생이 시조를 만난 것은 초등학교 고학년 때였다고 합니다. 특히 애국 및 충효를
주제로 한 시조를 배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처음으로 시조에 魅惑된 것은 1945년 광복 후 초등학
교 5,6학년 때 國語讀本에 金尙沃의 ‘봉숭아’ 聯時調 2首와 정몽주의 丹心歌, 이순신의 忠孝歌, 성
삼문의 忠節歌, 김종서의 大丈夫歌, 李退溪, 李栗谷의 시조, 윤선도의 五友歌, 정철의 關東別曲 등을
배우면서부터다. 光復은 되었지만 곧 이어 찾아온 한국전쟁으로 愛國愛族 精神을 啓蒙하기 위해서 敎
科書에 이런 애국적 시조가 많은 紙面을 차지했다.”
선생은 시조를 암송하면서 시조에 대한 사랑을 가꾸었다고 밝힙니다. “배움에 대한 熱望은 솟구쳐
올랐다. 그때부터 ‘논개’는 물론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詩와 時調를 메모해 호주머니에 항
상 넣고 다니면서 지금까지 暗誦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중등학교 국어과 교사로 봉직
할 때도 시와 시조를 소개하면서 문학에 대한 열정을 갈고 닦았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국어시간 授
業 始作 前 國內外 有名 詩를 감정을 살려 리드미컬하게 한 편 암송해 주면 조용한 수업분위기도 造
成되고 문학에 關心을 誘發시키는 作用도 되었다. 지금도 제자들 모임이나 어떤 모임에서 詩 한 篇을
朗誦해 주면 雰圍氣도 한껏 부드러워지고 고즈넉하게 차분해짐을 느꼈다.”
최근에는 어르신들에게 한글 해득과 표현하기 교육을 봉사하는 삶을 영위하며, 때로는 시-시조 짓기
지도를 하고 있습니다. “내년에는 초등학교 과정을 履修한 어르신들에게는 국가에서 인정하는 所定
의 졸업장을 授與토록 교육청과 協議할 예정이다. 올해에는 11년간 蓄積된 어르신들의 솜씨를 모아
작품집을 만들고 있는데 대한민국에는 아마 이런 稀貴한 문집이 없을 것이며, 그 어느 무엇보다도 훨
씬 값어치가 있다고 自負하고 싶다.”이러한 시조 사랑, 시조 창작에 대한 열정, 시조짓기 지도를 통
한 우리 말글 사랑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는 권영국 시조시인의 정신이 내면화된 시조집입니다.
시조창 강좌 3 / 시니어학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