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향
- 유하(維夏) 나순옥(羅旬玉) -
잉걸불로 펴오르던 그리움도 사위고
미워 할 그 무엇도 남지 않은 세월 밖에서
끝끝내 지우지 못한 종두 자국 같은 것아.
* 잉걸불 : ① 불이 이글이글하게 핀 숯덩이 ② 다 타지 아니한 장작불
* 작품해설 / 조옥동 : 이 시조를 읽으면서
나순옥 시인의 꼭 아물은 입술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호흡을 느낄 수 있다.
지우고 싶어도
끝내 지우지 못한
종두자국 같은 것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묻고 싶은 그것아
어머니의 품속 체취 같은
시조 「고향」에서 「종두자국 같은 것아」, 「잉걸불로 타오르던 그리움」, 이 몇 마디가 나로 하여
금 한동안 멀리 감춰 둔 '고향'의 이미지에 덮인 고운 먼지를 털어 내게 한다. 너무 안이한 생각으로
풀어 두었던 思惟의 앞섶을 여미게 만든 작품이다. 평범한 것에서 비범한 것 예사로운 것에서 색다른
맛을 솎아내는 그의 멋이 보인다.
시조가 시와 다른 것은 특유의 형식미를 가지고도 우리 고유정서에 맞는 고도로 여과되고 정제된 시
어를 꼭 있어야할 자리에 놓으므로 울컥 심연에 파동을 일으킬 만큼 감동을 가져오는 선명한 이미지
에 있다. 같은 언어라도 시에서보다 시조에서 더 빛이 나는 경우가 많다. 또 같은 이미지를 나타내는
데도 시에서 맛이 나는 언어와 시조에서 맛이 나는 언어가 때로는 달라야 함을 시조의 멋을 아는 사
람은 알고있다.
고향은 내가 태어난 곳,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 생명을 잉태 할만큼 모든 조건이 최상으로 알맞은 그
자궁 속에서 胚胎되고 나의 생명과 어머니의 생명이 공존하였던 곳이다. 그러기에 고향은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곳, 고향이 없는 사람은 어머니가 없는 사람이다. 어머니 없이도 내어나는 생명은 정상
적인 태어남이 아니다. 하늘이 노하리만큼 고도로 발달하는 현대의 유전학, 고분자생화학의 소산, 시
험관의 고아일 뿐이다. 출생이란 어머니 몸에서 진통을 통하여서만 처음으로 분리되어 세상에 떨어지
는 현상이다. 그후에도 어머니의 젖과 체취로 근심 걱정 모르고 유년기를 보낸 곳이 고향이다. 뒷산
의 진달래나 할미꽃 냇가의 송사리 작은 돌멩이 하나까지 내 고향 것은 모두 그리움의 앨범에서 예쁘
게 웃고 있다. 나순옥 시인의 작품에는 특별히 고향 곧 어머니를 그리고 그에 대한 사랑과 애틋함을
노래한 것이 많다.
타향살이가 고추보다 맵고 非情하여 고향이란 말만 들어도 눈물이 맺히고 잉걸불로 타오르던 그리움
사무치면 모든 것 손놓고 금새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지. 그러나 鄕愁에도 이력이 날만큼 귀밑머리
희끝하게 바래고 감정도 다스릴 줄 아는 성숙한 나이에 찾은 고향은 너무 변하여 고향에서 오히려 타
향사람이 되어 서먹해지는 나를 발견한다. 정말 고향은 있는 것 일가? 현대인은 진정한 고향을 잃고
있다. 그러기에 미워 할 것조차 남지 않은 고향을 차라리 잊고 싶다. 잃을수록 집착 욕이 생기 듯 점
점 잃어 가는 고향에 대한 귀소본능의 발동은 외국도 마찬가지 추수감사절이나 성탄절에는 항공편과
차량이 그리고 우편물이 평소의 몇 배로 늘어 법석을 떨 때 해외의 외로운 실향민은 먼 고향하늘 바
라고 눈물만 삼킨다. 아마도 고향은 가슴속에 묻어 둔 눈물의 보석이다. 우리가 돌아 갈 진정한 고
향을 찾아야 한다.
귀농일기 - 눈먼 땅
- 유하(維夏) 나순옥(羅旬玉) / 계간 《시조시학》(2023, 봄호)
두 번째 출발의 꿈 야무지게 부여잡고
한평생 일한 대가 다 퍼부어 얻은 이 땅
남으로 비스듬히 누워 가슴 뛰게 하던 곳
앙칼진 가시덤불 할퀴고 후벼 파고
정강이며 허벅지 직직 그은 핏자국
나날이 목을 조이며 덤벼드는 칡덩굴
장알진 손발이 거북등처럼 굳어가도
얻어지는 것만으론 목구멍에 거미줄 쳐
떠나라 등떠밀어도 발을 뗄 수 없는 곳
오막살이 집 한 채도 지을 수 없는 눈먼 땅
매물로 내놓아도 모두들 눈이 밝아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눈먼 나의 눈먼 땅
* 장알(이) 지다 :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이다.(북한어)
귀농일기 - 저런 저런
- 유하(維夏) 나순옥(羅旬玉) / 계간 《시조시학》(2023, 봄호)
취미로 시작했다
노역에 발이 묶여
씨 값도 못 찾는 농사
떠나야할지 골몰할 때
생각을
산산이 흩어놓고
사라져버린 헬리콥터
사랑으로 1
- 유하(維夏) 나순옥(羅旬玉) -
만성결핵 앓는 하천
미움만 부글대도
패랭이 꽃대 만한
사랑 하나 안고 서면
거품 속
각혈 멈추어
자리 털고 일어설까
* 작품해설 / 조옥동 : 소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가 자연의 일부라면 사람은 자연의 한 부분이며
자연을 떠나 살 수 없기 때문에 자연을 살리고 친화적이고 공생하여야 하거늘 산업의 근대화가 가져
온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하여 마을 밖 작은 하천까지도 「만성결핵을 앓는」병든 몸으로 누워있다.
유년기 물장구를 치고 송사리 떼를 몰던 실개천은 동화속의 얘기처럼 되었고 현재 미움만 부글거리는
현상은 자연의 성난 모습이요 병든 하천의 원망일 수도 있다. 오히려 시인이 자신을 포함한 인간들에
게 치미는 분노 일 것이다.
자연에 대한 환경친화적 감정을 아주 간결한 몇 줄의 시어들로 柔軟하게 표현하면서도 은유로 아픈
곳을 꼬집고 있다. 나순옥 시인은 단청의 채색뿐만 아니라 수채화의 솜씨도 있다. 「사랑으로 1」을
세운 뜻은 2, 3, 4……이렇게 계속 사랑에 관하여 할 얘기가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인류역사가 끝
나는 날에도 사랑 얘기는 끝이 날 것 같지 않다. 사랑이 없는 세상은 상상을 하고싶지 않다. 사랑의
근본은 우리의 생명에 닿는다. 종교적인 의미를 강조하지 않아도 사랑은 가장 큰 선물이며 사랑은 본
능적이다. 갓난아기는 엄마에 대한 사랑을 말로는 못해도 물고 있던 엄마의 젖꼭지를 한번 꼭 깨물어
사랑을 표현한다. 사랑의 원칙은 순수함이요 상호작용적인 사랑만이 건강한 사랑이다.
「패랭이 꽃대 만한/ 사랑 하나 안고 서면」「각혈 멈추어/ 자리 털고 일어설가」우리 같은 소시민이
무슨 힘이 있어 병든 자연을 치유하여 살려 낼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주저앉아 탄식만 하는 대신 패랭
이 꽃 만한 비록 작고 연약한 사랑의 힘으로 덤벼드는 것이다. 이러한 용기와 열정이 우리 시인들의
정신이어야 할 것이다. 굴착기를 정지시켜 천성산의 도마뱀을 즉 자연생태계를 보호하려던 스님의
100일 단식 투쟁이 고귀하면 할수록 사회와 문명에 대한 미래지향적 비평과 주장을 시민정서에 호소
하는 강렬한 시정신도 매우 필요한 때이다.
나순옥 시인은 충남 서천 출생으로 고향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계속 충청도의 소도시에 살면서 고
향의 정서를 바탕으로 좋은 시를 우려내고 있다. 중앙일보 지상시조백일장 연말장원과 조선일보 신춘
문예 당선으로 문단에 나온 시인으로「바람의 지문」과 다수의 공저시집이 있다. 좋은 작품을 계속
발표하며 문인활동도 활발한 이 시조시인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머니
- 유하(維夏) 나순옥(羅旬玉) -
거친 손 끝으로 새벽을 여시고
가녀린 몸으로 바람막이 되시어
하 많은 세월들을 자식 위한 열정 하나로 넘기시고
이제 남은 것은 흰머리와 굽은 허리뿐
어머니
그것은 우리들의 고향입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욱 찾고 싶어지는 고향입니다
어머니
터무니없는 투정으로 울고 때를 써도
당신의 손등으로 닦아주시던 눈물
사랑스레 토닥여 주시던 손길 손길들이
오늘의 저를 길러 주셨듯이
저 또한 아이들의 너그러운 고향이 되어
당신의 멍에를 이어 가리다
어머니
나지막하게 내려앉은 잿빛 하늘 밑에서
얼가사리 추위가 옷깃을 파고드니
흰 머리 굽은 허리 더욱 그리워
머언 고향 하늘 바라봅니다.
가족사진(김진호) / 불후의명곡(2014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