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1
- 서 벌(서봉섭) / 서벌 삼장시집(三章詩集) <각목집(角木集)>(금강출판사, 1971) 96~97쪽 -
내 오늘
서울에 와
萬坪(만평) 寂寞(적막)을 산다(買).
안개처럼 가랑비처럼
흩고 막
뿌릴까보다.
바닥난 호주머니엔
주고 간
벗의 명함(名啣)...
* 나와 서벌(1939 - 2006) 선생, 그리고 류제하(1940 - 1991) 선생 / 남진원
벌써 40여 년 전이구나 서벌 선생을 뵌 것은 서울의 한국시조시인협회 모임에서였다. 그때 옆의 문인
들이 서벌 선생을 ‘시조의 맹장’이라고 알려주셨다. 나는 전에 현대시학에서 이미 서벌 선생의 시
조와 평론을 읽은 바가 있었다. 시조에 대한 평론을 현대시학에 연재하였는데 그 필법이 독특하였다.
순수한 우리 말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기법이었다. 대학교수들이 쓰는 글과는 판이하게 차별감이 들어
났다. 그래서 무척 신선했던 기억이 난다. 시문학에는 또 금성출판사에 근무하던 류제하 시조시인이
작품 평을 연재하셨다. 서벌 선생과 류제하 선생은 그 당시 문명을 날리는 걸출한 중진 그룹이었다.
아쉽게도 두 분은 오래전부터 이 세상 분이 아니다. 서벌 선생은 서울살이의 각박한 삶에서 처절한
절망과 한이 배어 나오는 아픔이 작품에 배어있다. 류제하 선생은 당시 건강이 안 좋아 만나면 얼굴
이 매우 창백해 보이셨다. 그래도 작품 쓰기에는 선비의 단단한 기질이 그대로 드러나는 시조의 명장
이셨다. 내가 1976년 샘터시조상을 받았을 때 제일 먼저 연락을 주신 고마운 분이였다. 나는 두 분이
돌아가셨을 때 문상도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늘 죄책감이 있다. 내 삶 역시 60이 될 때까지 어렵고
힘든 생활이었기 때문에 옆으로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강원도문화상 수상식에 갔을 때에도 돈이
없어 서울에서 사진사들이 내려와 찍은 수상 기념 사진값도 보내지 못하는 형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문화상 수상자들은 모두들 부유하지는 않아도 그런대로 생활에 여유가 어느 정도 있는 교수
들이나 부유한 집들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내가 어렵게 살았기 때문에 서벌 선생의 시조 작품을 읽으
면 더욱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서울 – 서벌
읽으면 가슴이 저며오는 시조 작품이다. 가난하지만 비굴하지 않고 오히려 그 멋스러움의 기개까지
서려 있는 작품이 아니던가. 만 평 적막을 산 것으로 문을 열었는데 그 시적 전개가 얼마나 시원하고
통쾌한가 말이다. ‘안개처럼 가랑비처럼 흩고 막 뿌릴까보다’ 고 하며 가난의 아픔을 시원하게 토
로하고 있다. 고려말부터 조선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누가 이렇게 시원하게 가난의 배설을 통쾌
하게 나타냈단 말인가. 그저 음풍농월에 젖어 술찌꺼기 같은 작품들만 써놓은 부류가 옛날에도 많았
지만 지금도 그런 부류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종장을 보라! 화룡점정이 아닌가
내가 정선에 있을 때 전화가 왔다. 받으니 서벌 선생이셨다. 어니에 계시냐고 물으니 정선읍에 오셨
다고 하셨다. 반가운 마음에 문래 초등학교에서 근무하던 내게 전화 연락을 하신 것이다. 나는 정선
으로 가서 선생을 뵙고 돌아왔다. 그 후 1980년을 전후하여 어느 날인가, 강릉대학교에서 중앙일보사
와 함께 시조 문학강연과 시조낭송이 있었다. 그때 서울에서 이태극 박사와 서벌 선생 등이 내려오셨
다. 나도 낭송자로 나셨다. 그날은 만나서 함께 잠을 자면서 시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그때 강릉문인협회 회장은 김원기 선생이었는데 잠시 오셔서 인사를 드리고 돌아가셨다.
* 작품해설/석야 신웅순 : 필자가 서벌 선생을 만난 것은 80년 대 중반, 한국시조시인협회 여주 세미
나 때였다. 여주 문화원장의 인사말도 있었는데 여주는 조선 후기 시인 석북 신광수가 여강록을 남길
만큼 유서깊고 아름다운 고을이라고 소개했다. 문화원장에게 필자가 석북 8손이라고 말했더니 매우
반가워하면서 어디 석북의 시 전모를 구할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후에 필자는 석북 4남매 시인의 시
집을 묶은 『숭문연방집』을 그해 원장님께 보내드렸다. 서벌 선생은 그 말을 듣고 ‘그 유명한 채재
공의 친구 석북 시인이 자네 선조인가’ 하면서 석북 선생을 가까이에서 본 듯 말석 시인인 필자의
손을 덥썩 잡으며 매우 반가워했다. 그만큼 선생은 시를 사랑했다.
시인은 필자에게 이런 말씀을 했다. 석북과 동시대의 인물이기도 했던 채재공의 『번암집』을 보면
시조가 음악상의 명칭으로만 불리워진 것이 아니라 당시에도 문학상의 명칭으로도 불리워졌었다는 것
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시인이 발굴했던 자료이다.
余嘗侯藥山翁 翁眉際隱隱有喜色 笑謂余曰 今日吾得士矣 其人姓黃思述其名 貌如玉 兩眸如秋 水袖中出
詩若于篇 皆時調也 而其才絶可賞 請業』於余 余肯之 君其興之遊……
내 일찍이 약산옹을 찾아뵈었더니 그 어른의 눈썹 사이에 즐거워하는 빛이 은은하게 서려 있었다. 미
소띤 어조로 내게 말씀하시기를,“오늘 선비를 얻었다네. 그의 성은 황씨이고 이름은 사술이 라하지.
얼굴은 옥같고 두 눈동자는 가을 하늘처럼 맑더군.” 하면서 소매 속에서 시 몇 편을 꺼내 시었다.
“이것이 다 시조인데 그의 재주가 썩 뛰어나서 칭찬할 만하다네. 내게 수업을 요청하므로 허락했지.
자네도 그 사람과 잘 사귀도록 하게.” 하시었다. 이런 교감이 있은 후 필자를 만날 때마다 ‘어이,
석북 후손’ 이렇게 부르며 필자에게 각별히 대해주시는 것이었다. 그 때의 빛나는 눈빛과 시조에 대
한 열정을 필자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시인과는 그런 인연이 있었다.
엊그제 같은데 30년이 훌쩍 넘었다. 그분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필자는 교수 정년을 맞이하게 되었
다. 다시는 뒷걸음 칠 수 없는 세월이 되었다. 서벌 선생에 대해 무언가를 쓰고 싶었는데 이제야 쫓
기듯 필을 들었다.
「서울․1」은 시조 시인들에게 회자되었던 명작이다. 나그네의 처절한 비애감! 만평의 적막을 사다니.
시인에게는 적막보다 더 비싼 땅이 어디 있으며 그의 형이상학적 정신은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말했을
까. 원은희는 『서벌 시조연구』 머리말에서 이 시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시민으로 살면서
도 흔들리지 않는 시정신으로 사회적 통념에 집중했던 기존 시단과 맞선 그 의 활약은 시조부흥과 시
조 대중화로 이어져 현대시조의 면모와 위상을 드높였다. 주제의 차원에 서 혁신을 이룬 작품인 「서
울․1」은 정형시와 자유시의 경계를 초월한 명작으로 현대시조의 전 범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실존주
의 경향을 띤 현대시조 작품들이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시인은 달랐다. 열정과 정서가 달랐고 현실과 형태가 달랐다. 기존 시조 그 가치마져 다른 그는 천생
시인었다. 1964년「관등사」로 시조문학지에 3회 추천 완료되었다. 한국시조작가협회 창립 위원이었
으며 시조동인지 『율』을 창간, 주관했다. 시조집으로 『각목집』,『걸어다니는 절간』,사설시조집
『휘파람새 나무에 휘파람으로 부는 바람』등이 있으며, 중앙일보 시조대상, 남명문학상 등을 수상했
다. 한국문협이사, 한국시조시인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대전 유성구 구암사 납골당에 안장되어
있다. 문틈으로 보는 달과 뜰에서 보는 달과 언덕에서 보는 달이 서로 다르다. 시인은 세상을 어떻게
보고 또한 자신을 어떻게 보았을까.
서울·3
- 서 벌(서봉섭) -
발에 감긴 밤하늘이 시려서 우는 기러기
30원이 없었던가
막차 놓친 외기러기
못 가눠
뽑은 외마디
둘 데 찾는 이 기러기
* 작품해설/석야 신웅순 : 선생은 자신을 막차를 놓친 외기러기라고 했다. 물론 시인과 텍스트의 화
자는 다를 수 있으나 확언컨대 선생은 분명 외기러기였다. 30원이라는 상징적인 액수는 시인을 이해
하는데 중요한 키워드이다. 시인은 몸 하나 가눌 수 없고 둘 데가 없어 ‘꺼억꺼억컥’ 기러기 외마
디 소리를 뽑아냈다. 얼마나 절절했으면 시린 밤하늘을 혼자 뽑아내는 것인가. 아마도 가난은 일생
그의 자화상이 아니었을까.
시인은 1970년 32살 때 군에서 제대, 상경했다. 만만치 않은 것이 서울 생활이다. 문학이라는 외줄기
에 기대어 살아야만했던 시인에게 서울 생활은 고통, 그 자체였다. 시인은 1985년 47세 때 별거.
2001년 뇌출혈로 쓸어질 때까지 17년 동안 혼자 살았다. 이 즈음에 쓴 것이리라. 그의 삶을 생각하면
30원의 상징은 자명해진다.
모든 문학 작품은 자신의 삶을 벗어나 존재할 수가 없다. 무심코 던진 한마디 말, 무심코 칠한 낙서,
무심코 그린 그림도 결국 자신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잃어버린 기억도 무의식도 수천 물길로 길어
올리는 것이 시이다. 시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사실은 아니되 진실인 것이 바로 시이다.
누설
- 서 벌(서봉섭) -
제주섬 감싼 바다를 가슴에 넣고 사는
아내는 여전한 섬
오로지 섬으로 산다.
해와 달
별이란 별들
다 섬이라 말하면서.
그가 온섬(全島)으로 드센 파도 일으킬 땐
반섬(半島)인 나는 다만
늘 밀리는 기슭이다.
아이 둘
가파도·마라도
온 섬의 편이 되고
* 작품해설/석야 신웅순 : 아내는 제주섬, 아이 둘은 가파도와 마라도. 가파도는 우리나라 최남단 마
라도와 제주도의 중간에 위치한 섬이다. 둘 다 파도가 가파른 제주도에 딸린 섬이다. 지형도 지형이
거니와 아이들도 다 엄마 편, 자신은 언제나 밀리는 기슭이다. 가정에서도 이렇게 버림을 받았으니
가장으로써 심정은 오죽하였으랴. 적막은 깊어지고 그럴수록 술에 대한 의존도는 심해져갔다. 시에서
밥이 나오는가 쌀이 나오는가 아니면 술이라도 나오는가. 삶은 현실이다. 늘 밀리는 기슭으로 출렁거
리는 그의 시조. 시인들의 운명이란 바로 이런 것인가 생각하면 씁씁하기만 하다. 지금도 아버지들의
신세와 다를 게 없는 것을 보면 이 시조가 시사하는 바는 크다.
아침 구름
- 서 벌(서봉섭) -
모로 누웠다가, 일어나 앉았다가
길게 생각한 끝에
엉금엄금
기는 구름.
간밤에 꾸다가 놓친
꿈 찾고 있나 보다.
열세 살 때
- 서 벌(서봉섭) -
장날 어른들 틈에 나뭇짐 지고 갈 때
장터 어귀 제재소 앞 잠깐 쉬고자들 할 때
나무에 드는 톱날에 희누름히 내리던 쌀.
수북히 쌓여오른 톱밥은 쌀이더라.
허어연 밥이되고자 몇 가마니나 되더라.
뛰어가 식구 모두 다 불러오고 싶더라.
하늘은 쌀만 널린 크나큰 멍석이고
산과 산 쌀섬으로 사방 새로 두르더라.
내 그만 어질어질하여 곤두박고 말았었지.
* 작품해설/ 원은희 : 장날이면 나뭇짐을 지고 나르던 열세 살 어린 시인은 허옇게 흩날리는 제재소
의 톱밥을 굶주린 가족에게 보내는 흰 쌀밥 세상으로 그려내고 있다. 허기진 유년이 토해낸 눈물겨운
사랑과 연민의식이 톱밥이라는 구체적 등가물을 통해 쌀밥과 쌀섬이라는 이미지를 획득하고 있다. 그
의 심저에 깔려있는 사랑과 그리움의 방식은 자신의 춥고 메마른 현실을 초극하려는 몸부림의 산물이다.
금엽(金葉)
- 서 벌(서봉섭) -
갈 길, 이 길밖에
더는 없어
혼자 간다.
몰래, 산이 내게
가보라고
내어준 길.
오다가
옛일 하나가
눈에 들어 줍는다.
* 작품해설/홍성란 : ‘몰래, 산이 내게 가보라고 내어준 길’이되 본시 ‘갈 길은 이 길밖에’ 없었
다. 갈 길은 절대고독, ‘혼자’ 걸어간 시인의 길이었다. 그러나 산이 내게 가보라고 내어준 시인의
길은 ‘몰래’ ‘내어준 길’이다. 남에게 함부로 내어줄 수 없어 나에게만 몰래 내어준 길. 누가 내
게 몰래 무언가를 내어주는 일은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인가.‘금엽’은 엄정(嚴淨)한 시조세계를 보
여준 시인의 유훈(遺訓) 같은 시조다. 유다른 시인의 더할 수 없는 형식과 내용의 조화와 절제! 인생
길 가다가 만들어 놓은‘옛일’은 무엇일까. 멀리 간 길을 되짚어‘오다가’‘눈’에 밟히는‘옛일 하
나’는 무엇일까. 옛일. 마지막 시인이 가슴에 품어 본 그 금빛 잎사귀는.[불교신문 2447호/7월30일자]
너의 모습 / 박인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