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허씨
- 서 벌(서봉섭) -
살그머니 집을 나와 어슬렁거리는 허씨
시청역 지하도에서
웅크린 채 날밤 샌다.
무슨 말 나올 듯하지만
목안 넘지 못한다.
한 때 잘 나가던 가장 허씨 그는 이젠
허기진 아나키스트
가족은 흩어진 구름.
세상을
어떻게 버려야할지
그것조차 모르는 그.
아닌 밤 홍두깨도 마른 하늘 날벼락도
시방은 두렵잖은
사금파리 깔린 마음
허씨는
빈 항아리였다가
어떤 판에 박살났나.
허공, 지하 허공에 한산(寒山)의 달 오르고
습득의 빗자루
떵떵 언 얼음판 쓸어
드디어 허씨는 일어선다 갈 데 가기 위하여
* 작품해설/석야 신웅순 : 중산층에서 갑자기 빈민층으로 추락한 한 노숙자의 실상을 이렇게 고발했
다. IMF사태가 가장을 직장에서 노숙으로 몰아낸 것이다. 노숙자와 다름 없는 시인도 어느 노숙자의
허씨에게 자신을 투영시켜 노래했다. 이 시조가 더욱 공감이 가는 이유이다. 자신은 아나키스트이며
사금파리이며 빈항아리이다. 시인에게 세상 앞은 언제나 아슬아슬한 것들뿐이다. 그러나 살아야겠기
에 빗자루를 들어 꽁꽁 언 얼음판이라도 쓸어야할 게 아닌가. 갈 데를 찾기 위해 일어서야 한다. 어
떻게 해서라도 고통에서 벗어나야 한다. 왜 그는 자신을 저항의 대명사 아나키스트라고 했을까. 그리
고 사금파리, 빈항아리라고 했을까. 이런 현실과 정치에 대해 원은희는 시인의 시조를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서벌은 민중과 더불어 뼈저린 삶의 체험에서 우러난, 시대가 짊어져야할 공동의 부채를 갚
기 위 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현실에의 목소리를 드높였다.그 소리는 해당시기의 정치 상황과 현실
태를 향한 비판과 함께 사회적 비리와 악을 개선하려는 목적의식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는 어두운
현 실의 구석구석을 들춰냄으로써 이 시대의 아픔을 함께 해야할 시인의 소명의식을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그런 시인이었다. 그런 그에게도 부처님같이 자애스럽고 한없이 따뜻한 시조가 있다. 이렇게
도 섬세하고 빈틈없이 그려냈을까 싶을 정도이다. 동자승같이 천진난만한 그의 불심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혼잣말
- 서 벌(서봉섭) -
이따금 고향 옛집 시누대 대밭 바람이 죽순보다 살지게 올라와“요즘 어찌 사누?” 이러곤
한다.
대답은“어찌 살기는......, 그저 살지.”아무렴, 그저 살지 그저 살지 않으면 당장 죽었것
제. 그러나 니것만은 내 알고 살았제 먹이에 접근하는 사자의 참을성 말이세.
그렇게
사는 데까지
내 살고 갈거야.
1959년 8월 21일 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는 국민학교 학생들.
넷째 시간
- 서 벌(서봉섭) -
초침은
달리는 말
분침은
달팽이 발.
가는 건지
마는 건지
시침은
부처님 손.
손 얼른
움직이셔야
도시락
먹을 텐데
풀 한 잎 생각 한 잎
- 서 벌(서봉섭) -
풀 한 잎 또옥 따서
냇물에 띄웁니다
생각 한 잎 또옥 따서
내 마음에 띄웁니다.
잠길 듯
배 되어 가는
풀 한 잎, 생각 한 잎
풀 한 잎 생각 한 잎
자꾸 따서 띄웁니다.
숙이네 아랫마을
돌아앉은 꽃마을로
잠길 듯
아, 잠길 듯이
내 하루가 떠내려갑니다
* 작품해설/석야 신웅순 :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바람 불어도 흠이 질 것 같은 천진난만한 동시조
2편을 소개한다.그의 동시조를 읽으면 저절로 마음이 순해진다. 묘한 치료약이다. 시인은 고등학교도
중퇴할 정도로 참으로 가난하게 살았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에도 문학에 대한 열정만은 대단했다. 평
생 가난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시인, 그래서 가난이라는 트라우마를 일생 안고 살아야만
했던 시인. 시인에게서 시는 끝내 진흙 속에서 피는 연꽃과 같은 것인가. 순수가 미칠 수도 있겠구나
싶을 정도이다. 붉은 고통 속에서 나온 시인의 시조는 다이아몬드같이 순도가 이리도 높고 높다.
사서思書·6
- 서 벌(서봉섭) -
풀꾹새 우짖는 소리를 평생토록 가슴 안에다 들여놓고 산 당신은 지금 풀꾹 울음빛 청산 바
다 떠도는 섬
한 점 섬 반은 떠 있고, 반 잠기어 있음. 반 떠있음은 못 두고 갈 이승 때문이었음. 반 잠
기어 있 음도 이승을 감추어 깔고 바닥으로 디딘 때문임. 망개를 따 먹어도 이승이 나은 거
라고 풀꾹풀꾹 우지짖던 그 때문에었음.가슴 안에 들어와 치던, 평생토록 치던 소리가 하룻
날 풀꾹풀꾹 새어나가 청산바다 펼쳐 당신은 섬이 되고 발이 묶여 오도가도 못하게 된 것임.
어머니, 당신의 소자는
일기 이리 철없게 씀.
* 작품해설/석야 신웅순 : 고성 장터 생어물로 청춘을 다 판, 살아 생전 가족들의 생계를 끌어안고
행상을 하며 살았던 어머니이다. 죽어서도 반은 떠 있고 반은 잠겨 있다고 했다. 그나마 반 잠기어
있는 것은 이승을 깔고 바닥으로 디뎠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제는 저승에 가서도 발이 묶여 오도가도
못한 어머니는 끝내 ‘청산 떠도는 섬이’이 되었다. 소자인 시인이 이렇게 철없이 일기를 쓰지 않으
면 안되는 이유들이다. 몇번 강추위가 왔다가 갔다. 겨울도 중반에 접어들었다. 시인의 시조를 읽으
며 며칠 동안 시인을 생각하며 지냈다. 밖에는 겨울 햇살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세상은 춥지만 햇살
같은 시인의 따뜻한 가슴이 있기에 우리의 영혼도 이리 따뜻해지는 것이 아닌가. 필자도 시인이 되기
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서예문인화,2017.2,106-111쪽.
내 소중한 사람에게 / 박경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