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아름다운 문학

<서벌> 그사람의바다/뒤늦게캔느낌/하늘색일요일/백도라지꽃/산수유꽃

이름없는풀뿌리 2024. 3. 25. 04:09
그 사람의 바다 - 서 벌(서봉섭) - 남녘, 그의 바다를 한 삽 뗏장으로 떠 고향 두고 올 때 품에 넣어 왔었던가. 서울도 그에겐 한려수도, 날마다 그러했네. 인왕산 인수봉이 얼른 바위섬 되고 남산 수락산 다름 아닌 섬이어서 키 큰 집 키 작은 집 모두, 섬 사이의 해초였네. 태풍에 마음의 기둥 갯바위로 어지러울 땐 동대문 남대문도 다만 한 척 배였다네. 용케도 뒤집히지 않아 머리 세고 빠졌을 뿐. 버스 지하전차 옆으로만 기는 게들. 속엔 든 사람들 알처럼 빽빽하네. 숨 가쁜 틈바구니에 끼인 그, 어느 굽에 그는 있나. 그 사람의 바다 - 서 벌(서봉섭) - 영산홍 그늘 먹은 그 사람의 바다에는 전생부터 쩌려 있던 갈매기 소금울음 댕기빛 숨긴 말씀을 반달이 물고 있네 뒤늦게 캔 느낌 - 서 벌(서봉섭) / 2003 가람시조문학상 수상작 - 그대의 것도 되고, 나의 것도 되곤 하던 목너머 마을로 가는 나지막한 이 오솔길. 인기척 혼자 내고 가는 항가새꽃 핀, 이길. 이 길 고전(古典)의 갈피, 양켠은 율려(律呂)의 숲 어떤 봄 가을로 내 넘어가고 넘어왔나. 구절초 긴 휘인 마디마디 서리 감고 넘어선다. 얼른 날 저물어 달 오르면 좋겠다만 시절끝 융랑찮아 난데 없는 찬바람 훽. 우우(愚愚)히, 아니 수수(愁愁)히 다 탄 불 잎들 지네. * 항가새꽃 : 엉겅퀴꽃이 가시가 크다고 하여 항가시, 항가새꽃이라 함. * 율려(律呂) : 음악, 음성의 가락을 이르는 말. 율(律)의 음과 여(呂)의 음이라는 뜻에서 나온 말 * 융랑(融朗)하다 : 환하고 맑다, 화평하고 밝다. 하늘色 日曜日 - 서 벌(서봉섭) / 첫시집<하늘색 일요일> 1961 - 母音의 江물 줄기를 줄잡아 다리고는 노오란 餘白을 안고 談笑한 午後를 간다 꽃노을 피는 方向에 배잦아드는 鄕愁. 旅情이 나비처럼 닥어드는 窓가에서 서러운 일 괴로운 일 모다 그리고픈 하늘색 고운 日曜日 哀愁의 畫幅이여. 하루를 살다 가도 悔恨 모르게 살고퍼라 오렌지 물든 愛慕의 情 아리 아리 허리에 감고 다수굿 안은 得望에 괴로운 몸 풀고지고. * 작품해설 : 올해의 가람시조문학상 수상작 "뒤늦게 캔 느낌"은 서벌 시인이 40여년 동안 경영해온 문학적 숙련미가 녹아 있는 것으로 평가되어 이 작품은 "말 부림"의 기교가 탁월하다. 말(言語)을 다 스리는 솜씨가 능란함을 뛰어넘어 가히 가피(得道)의 경지에 이르고 있음을 일깨워 준다. -심사평중에서- * 경남 작가, 서벌 시조시인의 첫 시집 『하늘색 일요일』 1. 서벌 시인의 생애 서벌 시조시인은 1939년 경남 고성군 영현면 봉발리에서 3남 2녀 중 첫째이자 장손으로 태어났습니 다. 본명은 서봉섭(徐鳳燮), 호는 평중(平中), 필명은 서벌(徐伐)이었습니다. 그가 태어난 봉발리는 그 당시 오지 중에서도 오지였는데 1939년은 일제의 수탈로 인해 우리 민족의 삶은 피폐할 수밖에 없 었습니다. 가진 것 없는 몰락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시인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다섯 살 무렵 봉발리에서 새띠이로 이주하였으나 형편은 결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가족을 먹여 살 리기 위해 서벌의 아버지와 형제들은 머슴살이를 하러 떠나고 오두막 단칸방에는 어린 서벌과 할머니 와 어머니 그리고 집안의 숙모들이 궁핍한 시간을 견뎌야 했습니다. 김열규 평론가는 「서벌시조론」 에서 ‘그가 직접 들려준 그의 소년기는 고난과 인고의 기록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시인의 부모님은 밥 굶는 일이 다반사인 아들이 안쓰러워 1945년 만 6세가 되던 해 해방을 맞아 외가 가 있는 남포 바닷가로 이주하고 마을의 훈장으로 있던 외할아버지의 잔심부름꾼으로 보내게 됩니다. 시인은 ‘만 6세의 직장인’(『자연과 어린이』, 1989)이라는 글에서 ‘나는 그 무렵 어엿한 직장인 이었다. 외가에 맡겨진 나는 공밥을 먹지 않으려고 마을 훈장이셨던 외할아버지의 비서로 채택되어 긴 담뱃대에 불을 붙여드리고, 벼룻물에 먹을 갈아 드리고, 마실 물을 떠 드리고, 요강을 비워 드리 고, 5리 밖에 있는 당신의 벗을 불러오라는 심부름 등...... 내가 맡았던 일들은 결코 소소하지 않았 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7살 어린 나이에 이미 철이 들어버린 소년은 외할아버지를 첫 스승으로 삼아 ‘사자소학’, ‘천자문’, ‘동몽선습’을 모두 익히고 ‘명심보감’, ‘논어’, ‘소학’까지 학습하면서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에게서 귀동냥으로 들은 시조들은 서벌을 시조시인으로 살게 한 자 양분이 되었을 것입니다. 시인은 19세가 되던 해 가정형편이 어려워 더 이상을 학업을 계속할 수 없어 고성농고 2학년을 중퇴 하게 되지만 20세 때 시전문지 『신시학』에 자유시 2편이 뽑혀 시인이 되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그 리고 꾸준히 시동인지나 시전문지 등을 직접 펴내면서 『이호우 시조집』을 통해 시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마침내 23세 때 첫 시조집 『하늘색 일요일』을 출간합니다. 이 시조집을 『시조문학』 1 회 추천 과정으로 간주하고 이때 처음으로 서벌이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합니다. 이후 1963년 25세 때 ‘연가’, ‘가을은’으로 2회 추천되고, 64년 26세의 나이로 ‘관등사’가 천료되어 등단을 합니다. 이후 32세 때 출향하기 전까지 경남 고성에 살면서 결혼을 하고 농사를 지으며 영현중학교와 야간공 민학교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1970년 32세 때 서울로 상경한 시인은 2005년 66세로 사망하기까지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출향문인으 로 활동을 합니다. 시인은 『하늘색 일요일』 이후 모두 7권의 시집을 상재하였고 경남문학관에는 『하늘색 일요일』, 『휘파람새나무에 휘파람으로 부는 바람』, 『간이역에서』, 『걸어다니는 절 간』, 『습작65편』의 초간본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2. 서벌 시인의 작품과 세계관 제1집 : 하늘색 일요일(1961), 18편 수록 제2집 : 각목집(1971), 45편 수록 제3집 : 서벌사설(1977), 61편 수록 제4집 : 간이역에서(1990, 3인 사설집), 18편 수록 제5집 : 휘파람새나무에 휘파람으로 부는 바람(1991), 72편 수록 제6집 : 담부랑(1995, 4인사화집), 15편 수록 제7집 : 걸어다니는 절간(2001.1), 71편 수록(우리시대 현대시조 100인선) 제8집 : 습작 65편(2001.9), 65편 수록 시인의 첫 시조집 『하늘색 일요일』은 시인이 23세가 되던 단기 4296(1961)년에 출간되었습니다. 한 끼를 해결하는 것도 버거운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인해 고등학교 2학년을 중퇴한 시인은 실의에 빠져 있다 운명처럼 『이호우의 시조집』을 읽게 되고 이후 여러 동인지를 만들고 동인들과 함께 문학활동 을 하면서 가난에 대한 절망을 극복하고자 합니다. 이때 출간한 시조집이 『하늘색 일요일』이었습니 다. ‘고2 중퇴생 열여덟 살의 뜰에는 정말 못살겠다는 어머니 고함소리와 병들어 누우신 아버지 신음소 리만이 찌들리고 찌들린 가난에 범벅이 되어 늘 어지러운 시간들’, ‘복학은 아득하기만 하고, 이래 저래 내, 시를 몰래 쓴다. 몰래 다듬을 수밖에 없는 나의 시간이 시켜서 하는 짓’, ‘새벽이 꼭두새 벽이 그의 시계의 태엽을 쪼로록 쪼로로록 감으면서 “벌이가 신통잖은 네 어머니, 병든 네 아버지, 늙으신 네 할머니, 어린 동생들 두고 어디로 가려느냐”하신다. “그럼 난 어쩌고 말이요?” 한다’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가난에 대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시인이 열정적으로 여러 동인 활동을 활발하게 한 것은 어쩌면 문학만이 시인이 기댈 수 있는 언덕이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인에 게 시조는 위로이며 위안이고 내일의 아주 작은 희망이었습니다. 이태극의 서문을 받아 1961년 첫 시 조집을 발간하고 이 시조집을 《시조문학》 1회 추천 인정을 받아 이때부터 ‘서벌’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백도라지꽃 - 서 벌(서봉섭) - 조심조심 빨아서 시원히 헹구고는 간짓대에다 방금 건져 넌 듯한 세모시 저고리빛 백도라지꽃. 초가을 하늘 떠서 조리질 하옵신다. 얼핏 보아도, 아무리 뜯어보고 고쳐 보아도, 어디 한 군데 흐린 데 없는 얼굴. 관음보살 미소로 세수하신 얼굴. 그 마음 속속들이 은은히 번져나 온 골안 다 백도라지 꽃빛일레. 저승이 호출할 때에도 몸만 실어 보내셨구려. 밀양 박씨密陽 朴氏. 웃마을댁 울 할머니. 바루절 깊디깊은 마을에 늘 늘 계시는 꽃. * 간짓대 : 대나무로 된 긴 장대. * 조리질 : ①조리로 쌀 따위를 이는 일 ②몹시 일렁거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작품해설/원은희 : 바루절 깊디깊은 시인의 마을에 백도라지 꽃으로 살아있는 할머니의 생시와 사 후의 세계를 분리가 아닌, 백도라지라는 대상으로 일원화시킴으로서 하늘과 지상의 경계를 무화시켰 다. 따라서 할머니를 백도라지 꽃으로 표현했다. 그리하여 시인은 대상과의 관계를 이미지의 전이를 통해 죽음의 공간에서 삶의 공간으로 끌어 들이는데, 고향의 자연을 상징적 이미지로 삼았다. 관음보 살 미소처럼 늘 자신을 다독이던 할머니가 백도라지 꽃과 동일시되는 순간 할머니는 저승길에 몸을 실어 보내도 그 미소만큼은 시인 고향의 정서를 환기시켜주고 있다. 노란 물감을 뿌려놓은 듯한 구례 산동면 반석마을의 산수유 풍경(주간조선/2023/03/18) 산수유꽃 - 서 벌(서봉섭) - 외진 산 기슭에 선 꿈 유별난 저 산수유. 바람이 간청하여 봄 일찍 뽑았을까? 노란 봄, 배 저어 가듯 살몃살몃 몸흔드네. 한 철 초여름 넘고 삼복도 바삐 넘어 드디어 빨간 별들 초롱초롱 빛날 세상. 그 때를 이루기 위해 유난한 봄 노란 봄. * 氣와 實存的 호흡의 採想 - 姜鎬寅 시조집『따뜻한 등불 하나』의 작품세계 - / 徐 伐(시조시인) 佛家쪽에서는 수행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沙門이라 한다. 어느날 부처께서 한 사문에게 "사람 목숨이 얼마 동안에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며칠 사이에 있다고 대답했다. "너는 아직 道를 모르는구나"하 면서 다른 사문에게 다시 물었다. 밥 먹는 사이에 있다고 하자 "너도 아직 도를 모르는구나"하면서 또 다른 사문에게 물었다. 그는 호흡 사이에 있다고 대답했다. 그제서야 "그렇지, 너는 도를 아는구 먼"하였다. ≪사십이장경≫에 나오는 한 부분이 이러하다. 호흡이 바로 목숨, 그 자체임을 명쾌하게 설파한 일이었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호흡하는 존재들이다. 호흡이 끝나는 순간부터 現世를 누비던 모든 목숨은 죽 음의 세계로 가는 문지방을 딛고 넘는다. 태어나고 늙어가고 병들어 죽는 과정이 호흡 사이의 현세 현상이므로, 그러한 호흡이야말로 미묘한 그 무엇이다. 미묘한 그 무엇, 현세를 만들어 주는 그 무 엇, 그러한 호흡 이전의 세계로부터 와서 그러한 호흡 이후의 세계로 가는 우리들이다. 그래서 옛사 람들은 天地를 旅館이라 하였을까. 나그네로 온 저마다의 존재들이 잠시 묵었다가 가는 여관, 그 같 은 逆旅 관점은 前世와 來世 사이에 現世가 놓여 있다고 본 감각이자 비유였다. 그러한 현세를 살아 가는 목숨이 호흡의 사이에 있다하는 것이므로, 도대체 그 호흡이란 무엇인가. 가령 풍선에 비유해 보자. 풍선은 그 속의 바람 때문에 팽팽할 수 있다. 팽팽하지 않으면 이미 풍선 이 아니다. 한데 그 바람은 풍선 껍질을 만나야 바람 구실을 한다. 풍선 껍질 바깥으로 천만 날을 어 떻게 불어도 바람은 바람이 아니다. 바람을 만나 부푸는 풍선처럼 죽음을 만나 活力을 찾는 삶이 있 다고 가정해 보자. 독일 낭만주의는 이 풍선의 원리를 生과 死에서 찾으려 한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어디 그리 쉬울까. 조피.폰.큔을 잃은 노발리스의 고심이 그것의 어려움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그것 은 정작 찾기 힘든 <푸른 꽃>인지도 모른다. 〔金烈圭, 《詩的 體驗과 그 形象》(大邦出版社) 63쪽 중에서〕 바람을 만나 부푸는 풍선처럼 죽음을 만나 活力을 찾는 삶이란 사실상 <모순어법>이다. 아이러니와 逆說, 여기에다 矛盾語法까지 더해야 詩的 대조법이하 할 수 있다는 것이고 보아, 그러한 對照의 종 합성 획득이 결코 쉬운 일 아니었을 터이다. 노발리스의 고심참담함이 그러했던 반면에 한국의 경우 花潭 徐敬德은 바람을 <氣>라 하면서 부채를 통해 그것을 다음과 같이 캐고 있다. 묻노니, 부채는 휘두르면 바람이 나오게 되어 있는데, 바람은 이디로부터 나오는가./만약에 부채에서 나온다고 한다면, 부채 속에 언제 바람이 들어가 있었단 말인가./만약에 부채에서 바람이 나오지 않 는다고 한다면, 도대체 바람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부채에서 나온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거니와, 부채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만약에 허공에서 나온다고 한다면, 부채를 잊었거 나 떠난 듯한 허공은 어떻게 스스로 바람을 나게 하는 것일까./이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그렇게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 같다./ 부채는 부채된 그것으로 바람을 쳐서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지 부채 속에서 바람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바람이 공중에다 몸을 맡긴 채 쉬고 있을 때에는 고요하고 맑아서 아지 랑이나 먼지가 일어나는 것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부채를 휘두르기만 하면 곧바로 그 바람이 쳐내어지는 것이다./ 바람이란 氣이다./ 氣는 공간에 꼭 차 있고, 물이 골짜기에 가득 차 있는 것과 같아서, 빈 공간이란 없는 것./ 바람이 고요하고 잠잠한 때에는 모이고 흩어지는 그의 형체를 전혀 보여 주지 않는다./ 그런 氣가 어찌 공간을 떠날 수 있겠는가./ 老子가 "비었으면서도 다함이 없고, 움직일수록 더 나온다."고 말한 것도 이것이다./이 부채 휘둘러 움직임을 받자마자 밀리고 쫓기면서 氣는 물결치듯이 바람이 된다./ 그래서 일찍이《詩傳》에서도 "형체에 氣가 밀려 불게 된다."고 말한 것이다. 花潭는 金安國으로부터 부채를 선물로 받고 두 수의 시를 지었다. 인용문은 그 2수 앞에다 놓은 序文 전문이다. 일종의 序詩로 봄직하다. 동시에 그의 궁리의 도저함, 그 氣觀의 일면을 선명하게 요간해 볼 수 있다. 부채로 말미암아 氣는 밀리고 쫓기면서 물결치듯이 바람이 된다. 이 때에 있어서의 바람 은 부채의 호흡이다. 아주 망가져 바람을 일으킬 수 없는 부채는 이미 부채가 아니다. 氣를 호흡할 수 없으므로 부채의 목숨이 남긴 시체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의 숨틀 또한 다를 바 없다. 신체와 외 계 사이에서 개스교환을 하도록 하는 器官系가 호흡기이므로, 이 숨틀의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氣는 목숨이 필요한 만큼 거듭거듭 들여지고 내보내어지는 것이다. 그러한 숨틀이 터져버린 풍선이나 아주 망가진 부채처럼 되고 말면 목숨은 그로부터 마침표를 찍는다. 사실이 이러하므로 사람도 부채나 풍 선처럼 사물의 편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다. 호흡이 가능할 때에만 현세의 사람일 수 있기 때 문이다. "바람이 분다. 이젠 살아봐야지"하고 노래한 발레리의 이 言響的 行爲(perlocutionary act) 가 널리 크나큰 진폭을 일으켜 내는 것도 기실은 氣의 話行(speech-act)이어서 그러할 것이다. 바람 이 오는 해변 묘지, 거기에 있는 무덤은 풍선처럼 바람을 들이고 부채처럼 바람을 쳐낼 수 있으리라 는 거다. 지나간 현세를 돌이킨다는 감각, 그로부터 빚어지는 상상력의 역동성이 아니라 다른 삶을 호흡하게 되리라는, 그만한 상상력의 역동성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한 만큼 그것은 變身을 뜻 한다. .....모든 행위 속에서 가장 완전한 것은 뭔가를 만드는 창조행위다. 하나의 作品은 애정을, 명상을, 가장 아름다운 그대의 思念에의 복종을, 그대의 넋에 의한 法則의 발견을, 그것 말고도 많은 것을 요 구한다.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었다. ......많은 것들...그대는 作品에 대해서 하나의 神으로 변신한다....... 문학평론가 金聖旭의 말(「詩에 關한 노트(B)」)대로 이 구절은 "발레리의 作品「建築家 유빠리느 스...Eupalinos oul, Architecte」에서 메가라의 石工 유빠리느스에 대하여 對話를 나누는 소크라테 스와 빠이도로스의 한 구절"이다. 여기에 이어 金聖旭은 "詩人 릴케가 극구 찬양해 마지 않았던 이 작품에서 발레리는 메가라의 石工의 입을 빌려 얘기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나의 神殿은 사랑하는 대상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처럼 사랑을 움직이어야만 한다"고. "...네 낱의 기둥...극히 단순한 양식...그곳에다 나의 삶의 밝은 하루의 추억을 새긴 것이다. 오! 황홀한 變身!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저 凡雅한 전당은 내가 행복한 사랑을 했었던 저 코린트 의 아가씨의 數學的인 형태다. 저 신전은 그 아가씨 특유의 몸매의 아름다운 균형을 충실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저 神殿은 살아 있는 거다. 그것은 내가 그에게 주었던 것을 나에게 다시 돌려준 다......." 다시 빠이도로스의 입을 빌려 그는 이 作品에서 이렇게 중얼거린다. "...아름다운 것은 뭐 하나 生命과 떼어놓을 수가 없다. 生命이라는 것은 죽는 것을 말함이다..." 氣가 형체로 말미암아 밀려서 바람 불게 되듯이, 모든 창조행위는 그 같은 變身의 始動이고 滑着이므 로 황홀하다. 감동을 더불지 않는 황홀함이란 있을 수 없다. 완전한 황홀함이라야 비로소 아름다울 수 있다. 그처럼 아름다운 것들은 목숨과 동뜬 것들 아니다. 목숨을 가장 목숨답게 갖추어 지닌 것 들, 그 변신의 妙는 죽음을 황홀하게 입맞추게 되어 있는 종당성에 맞닿아 있다. 바람으로 변신된 기 가 氣 본래로 되돌아가는 장엄함을 소스라치도록 감지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창조행위 는 生과 死 사이에서 일으켜져 生과 死를 고리 걸도록 하는 변신을 낳는다. 그러한 변신이 앞의 인용 문에서는 "저 凡雅한 전당은 내가 행복한 사랑을 했었던 저 코린트의 아가씨의 數學的인 형태다. 저 신전은 그 아가씨 특유의 몸매의 아름다운 균형을 충실히 나타내고 있는" 경우로 나타나 지극히 미묘 할 뿐 아니라 황홀하다. 이제 이쯤에서 신진 시조작가 姜鎬寅의 「바람」5수에 나타난 氣論的 美學의 話行애다 눈 주어야 하겠다. 황막한 골짜구니 빈 수레 몰아가다 별빛 저민 가락 풀어 영원을 비질하는 형해도 자취도 없이 뒤척이는 넋이다. 나울 미쁜 파도 위에 갈매기 나래칠 때 펄럭이는 깃발 아래 목쉰 고동 부리면서 때로는 사공이 되어 망망대해 노를 젓고 청산 오르다가 숨이 차 잠시 쉬면 이름 모를 풀꽃망울 살며시 귀를 열어 한 말씀 새겨들을 듯이 반기면서 모신다. 능금알 익어가는 과원 들러 정을 주어 갈햇살 볕여울로 속살 헹궈 꿈 쟁이고 단풍잎 품에 안기면 춤사위도 황홀해. 천심 지심 깨울 소명 신탁 받은 숙명이거나 행여의 고된 사역 못 떨칠 천형이든간에 내민 손 아랑곳 않는 그 무위 거룩하네. 예컨대, 발레리가 메가라의 石工의 입을 빌려 말하는 神殿은 극히 단순한 양식, 즉, '네 낱의 기둥’ 이 그 골격이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시조작가 姜鎬寅이 노래한「바람」은 복잡한 양식이 아니다. 3장 양식으로 구조화한 평시조형 5층이다. 맨아래층에 해당하는 제1수와 맨위층에 해당하는 제5수를 특히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 작품에 관한 논의를 위해서 새삼스럽게 부연해 보는 것이지만, 氣의 평상적 인 상태에서는 그 氣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가름도 가늠도 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그 상태가 무엇 으로 말미암아 바람으로 바뀌면서 움직이는 다른 무엇을 낳는다. 이 때에 있어서의 무엇이란 오늘의 우리가 호흡하는 우리 現世의 "황막한 골짜구니"이고, 다른 무엇이란 '빈수레'이다. 거칠고도 아득하 게 드넓은 골짜구니, 그런 골짜구니가 있을까. 일상적인 어법에서는 서로 모순되는 두 용어의 결합이 므로, 이는 명백하게도 矛盾語法(oxymoron)에 해당한다. 이러한 逆說 방법은 아이러니와 함께 평범하 거나 진부한 언어 관습을 부수어 버린다는 전달 능력이고, 몸만 가지고는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높이를 장대에 의지하여 단숨에 훌쩍 뛰어넘는, 그 같은 어법이다. 일곱 글자로 조여놓은 제1수 초장 의 앞부분이 그 같은 모순어법으로 함축성 있게 전제되어 있거니와, 이는 공업화.도시화 사회로 치닫 는 오늘의 우리 현세가 따로 더불은 背面性이다. 가장 살만한 곳이 팽개쳐져 살지 못할 곳으로 바뀐 한국의 두메 현실을 심각하게 본 데서 나온, 이 역설적인 전제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확신 일 것이다. 이를테면 빨래는 더럽혀진 옷을 더럽혀지기 전의 상태로 돌이키는 일이다. 여기에는 더럽 혀진 것을 빨아내도록 하는 물질이 잇어야 하고, 그 물질이 제 구실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데는 물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법이어서, 빨래는 이 두 가지의 확신으로부터 거듭되는 역동성인 것이다. 이 시 조의 역설적인 전제가 요구하는 것 또한 그 같은 확신성이다. 따라서 이 시조는 그러한 주제 의욕으 로 '바람'을 선택하여 그 정체 찾기를 하고 있다. 결국은 氣라고 하는 原質을 姜鎬寅의 언어 능력이 바람으로 뽑고 일으켜 3장 6구의 호흡으로 불어가게 한 것이다. 그로부텨 확신되는 것은 '無爲'사상 이다. 인간의 본질이 이미 자연으로 갖추어진 그것이며, 그러한 삶의 본질이 더럽혀졌을 때 無爲自然 觀으로 씻어낼 수 있다는 것을 놓칠 수 없게 된다. 이같은 처음과 끝을 납득하고 보면 이 시조의 호 흡이 나래치는 상상력의 역동성은 어떤 추상적인 관념론에 떨어질 것 아님을 심도있게 조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익명을 고집하는 큰 손의 농간이다 끝내는 시야비야를 온 천하에 묻게 될 걸 산산이 조각난 유리 파편가루 흩뿌린다. 복면 너머 터뜨리는 隱者의 하얀 홍소 산지사방 덫을 놓고 시치미 뚝 떼면서 뉘 홀로 칼춤이라도 추다가 퇴장하란 휘장인가. 바퀴벌레 기어가듯 저 행간은 섬뜩하다 짝이 못될 자음과 모음 뒤엉켜 나뒹굴고 풍경을 채어 비트는 백미러 응시하는 눈도 있다. -「안개論」전문. 이것은 오늘의 우리 시대를 함축적 은유, 특히 換喩의 방도로 채택하여 꼬집고 비웃는 장면 셋이다. '익명' '큰 손' '복면' '덫' '시치미' '칼춤' '퇴장' '행간' '자음과 모음' '풍경' '백미러' 등은 액 면대로 받아들일 단어 본래의 기능 아니다. 하나의 사물을 가리키는 말, 그 용어가 어떤 경험을 통해 서 그것과 밀접하게 고리를 거는 경우일 때, 그 용어들의 기능은 환유법적 기능으로 바뀐다. 시조 「안개論」에 채택된 위의 용어들은 오늘의 우리 시대를 안개사회의 시대로 보면서, 다시 말하면 역 사의식의 눈을 뜨고 보면서 기능화시킨 말들이다. 언필칭 고도산업시대 혹은 고도정보화사회로 싸잡 는 오늘의 우리 시대가 초근목피로 목숨을 잇던 보릿고개의 참담함을 올챙이꼬리 자르듯 우리들의 뇌 리로부터 가위질한 것만은 사실이지만, 그로부터 야나치게 야기된 극단적 이기주의의 팽배 현상은 보 릿고개보다 몇 갑절 더 어려운 고개를 만들고 말았다. 이런 어려움이 오늘의 우리 현실 위에 숨가쁘 도록 竝置된 逆作用이어서 姜鎬寅의 시적인 역사의식은 꼬집는 손이 되고 비웃는 입이 되어 그것들을 조목조목 換喩의 방도로 들춰내면서 환기시켜주고 있다. 문명이, 과학 기술이 밝은 누리를 닦아 이타 의 선명함을 펴야 한다는 原意를 엄청나게 훼손시키면서 원찮은 보자기를 둘러씌운 꼴, 그 꼴사나움 을 취재하고 편집한 것이 이 시조다. 굴착기 진동 따라 갱도가 입을 열면 탐조등 부신 빛살, 그 외가닥 믿음으로 시간은 거슬러 오를 탐사의 강물이다. 꿈의 촉수 뻗쳐 가는 일개미의 고운 소망 흐려진 고전 갈피 끊긴 맥 닦고 이어 변신한 新生代의 수풀이 흑진주로 달려온다. 등타 내린 땀방울이 살속 깊이 저며들고 紙鳶 띄울 하늘 한 폭 저승이듯 감감한데 삽질이 퍼담은 하루 빠지는 해 시커멓다. - 막장에서」전문. 사람은 누구나 자체의 生存을 위해서 삶을 영위한다. 살아야 한다는 의식이 있는 한 연속적인 영위의 움직임을 포기하지 않는다. 짐승 푸나무서리 심지어는 미생물 따위도 그만한 움직임으로 그들의 생존 을 응연히 지속시키는 것이겠으나, 사람들의 경우란 인위적인 움직임을 더하고 더함으로써 응연한 지 속성이 파괴되고 생태계 본연의 質을 변질되도록 한다. 광의적인 생존 實在에 포괄되지 않으려는 데 서 때로는 무자비한 악순환을 속출시키기도 한다. 앞서 잠시 말한 바 있는 「안개論」은 그러한 악순 환의 현장을 취재 편집한 것이었지만, 이 「막장에서」3수는 한 인간이 어디에서 어떻게 존재하고 있 는가를 뚜렷이 조명해 내고 있다. 이3수는 자연 과학에 대하여 정신 과학을 방법론적으로 확립한 독 일 철학자 딜타이의 설파와 연관되면서 《존재와 시간》의 저자인 하이데거의 實存哲學을 동시에 떠 올려주는 오늘의 한 텍스트(Text)이다. 딜타이에 의하면, 문학 혹은 그 밖의 인문학 텍스트의 진정한 이해는 텍스트가 표현하고 있는 〈內的 생활〉을 독자가 〈다시 경험하는 데 있다〉는 것이었고, 그 것은 生의 내면적인 직접 체험에다 기초를 둔 데서 나온 설파였다. 또한 거기로부터 역사적 세계를 파악하는 그의 해석학이 제창되었던 것으로, 하이데거 역시 거기로부터 출발하여 인간 존재를 世界內存在〉로 보면서 일상성 속에 전락해 버린 그러한 〈사람〉으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죽음에의 존재〉를 외쳤고, 그러한 결론으로 그는 실존적 자각을 통해 원래의 自我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상불 실존이란 현실적인 존재를 말함이고, 그러한 실재를 뜻함이다. 동시에, 본 질에 대립하는 개체적인 존재를 뜻한다. 플라톤 이래 실존은 본질을 원형으로 하여 만들어진다고 여 겨져 왔으나, 실존주의에 의해 뒤집혀지고 만다. 19세기의 합리주의적 관념론 혹은 실증주의를 반대 하고 나온 것이 실존주의이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점에서 출발하여, 인간이 현실적 존재임을 주창하고, 인간의 주체적.자각적 생존을 실존이라 했다. 인간의 현실적 존재가치는 본질에 앞선다는 주장이었다. 사물이 무엇(what)인가를 정하는 객관적인 본질에 우선하여, 사물이 어떻게(how) 존재하 고 있는가, 특히 자기 자신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 또 어떻게 존재해야 할 것인가를 누구 아닌 스스로가 결정해 가려는 데서 나온 것이었으며, 자각하는 인간 존재를 부르짖은 것이었다. 그것은 예 컨대 죽음.절망.불안.허무 등 인간 개개인이 일정한 상황에서 스스로 진지하게 다루지 않으면 아니 될 문제들과 직면함으로써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주체성으로 돌이킬 것을 말해 준 의의 위에 선다. 그 러한 돌이킴이 다름 아닌 자아회복이다. 姜鎬寅이 採想한「막장에서」3수 또한 한 인간 존재를 막장으로 들여보내어〈世界內存在〉임을 인식 케 하면서 자아 회복을 위한 텍스트로 제시해준 役事 장면이다. 막장은 이 텍스트에 놓여 있는 현실 의 일상성이고, 그 속에 전락해 버릴 수 없는 한 존재가 일개미의 작업을 거듭하고 있다. 그의 작업 은 현실을 採壁하는 시간 의미이다. 이 의미를 위하여 굴착기는 진동하고, 그 때문에 갱도가 입을 열 어준다. 採壁되어야 할 현실의 일상성은 언제나 깜깜한 굴속이어서 탐조등을 앞세우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다. 탐조등은 일개미의 시간을 이끌어 주는 외가닥 믿음이다. 그래서 부신 빛살이다. 여기에 이끌리는 일개미의 작업, 그 시간은 묘하게도 逆化된다. 그것은 일개미가 고운 소망으로 뻗어서 뻗 쳐지는 꿈의 촉수 때문에 그러하고, 그 때문에 그의 그 시간은 거슬러 오르는 탐사의 강물로 막힌 데 를 뚫어 나간다. 그러한 逆化 통로는 일찍이 매몰되어 "흐려진 고전의 갈피"를 닦아내고 '끊긴 맥'을 잇는 의미 심장한 통로이다. 그리하여 "변신한/新生代의 수풀이/흑진주로 달려온다"는 엄연한 돌이킴 을 만나게 된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상상력과 사실의 엄연성을 따로따로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환 상적인 기술 방법에 의해 사실의 엄연성을 텍스트로 제공받는다는 점에서다. 사실 막장에 대한 일반 적인 인식은 막다른 인생들이 들어가 자신의 현실과 맞다닥뜨려지는 곳이다. 죽음.절망.불안.허무 의 식이 엇섞이는 현장이어서 누구나 선뜻 들어서기를 꺼린다. 그러나, 작중의 화자는 감연히 들어가 매 몰된〈죽음에의 존재〉를 돌이켜 내고 있는 것 아닌가. 《壯子》의 〈吾喪我〉와 연결되는 일이기도 하다. 眞我가 자기를 벗어났다는 것이 吾喪我이고, 자기를 잃어버린다는 차원이다. 지금까지 지녀온 나(吾)를 잃어버림으로써 참된 나(我)를 찾는다는 것은 달마의 9년 面壁과 매우 통하고, 물레 잣는 간디의 역설적 실천과 다름없이 통하며, 실존주의가 제기한 자유로운 주체성의 돌이킴과 영락없이 통 하는 차원이다. 그러므로 여느로운 자기 상실일 수 없다. 잃어버려라, 그래야 얻게 될 터이다. 소경 이 되어라, 그래야 보게 될 터이다. 귀머거리가 되어라. 그래야 듣게 될 터이다. 죽음과 부딪쳐라, 그래야만 살게 될 터이다. 吾喪我는 바로 이만한 逆化에서 나와 인간을 인간 스스로 진지하게 다루도 록 한다. 등타내린 땀방울이 살속 깊이 저며들고 紙鳶 띄울 하늘 한 폭 저승이듯 감감한데 삽질이 퍼담은 하루 빠지는 해 시커멓다. 보기에 따라 이것은 막장 인생이 토로하는 한갓 푸념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빠지는 해 시커멓다"는 함축적인 이 끝마무리를 다시 잘 여겨서 새겨야 할 것이다. 삽질이 퍼담은 하루, 그 상 징인 해가 시커멓다는 것은 실의와 절망을 뜻한다기보다 변신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1수와 제 2수의 採想들을 통해서 일상성에 전락되지 않은 표현들을 생생하게 호흡할 수 있었거니와, 그러한 끝 마무리인 이 종국성은 "변신한/新生代의 수풀이/흑진주로 달려온다"하였듯이 다시 생생하게 변신되리 라는 암시이다. 불기운을 얻은 연탄을 생각해 보면 많은 말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삽질 이/퍼담은 하루"는 그처럼 생생한 하루로 새롭게 바뀌리라는 그것이고, 지는 해가 빛깔을 바꾸어 뜨 는 해로 생생하게 변신하리라는 종국성이 사뭇 이채롭다. 여기에 이어진 것이 「밤의 노래」4수이다. 영혼 깎는 대팻날로 앞당기는 푸른 젊음. 우수의 지평 너머 지는 해 배웅하면 눈 맞출 별들이 떠서 잔뜩 어지럽누나. 아슴한 기억의 바다 그리움의 해일 몰아 햇살로 헤엄치는 감성의 물고기떼. 어화등 불빛 아래로 누벼지고 누벼지네. 샘물 괴듯 차오르는 인식의 두레박질. 저 산하 슬픈 배경 신명 잡는 어릿광대 오늘의 일기 갈피엔 달빛 몇 스산하고. 미지의 꿈 채광하는 사유의 막장에서 어둠 찍는 정 소리 미리내로 흘러갈 녘 한잠 깬 누에 한 마리 비로소 벗는 허울. "영혼 깎는 대팻날로/앞당기는 푸른 젊음"이 "한잠 깬 누에 한 마리"가 되어 비로소 허울을 벗는다는 發話-着話 사이, 그 사이가 이처럼 4수 連形으로 질펀하다. 희.노.애.락의 뭍과 바다가 靜中動 動中 靜으로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다. 감성의 思辨化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만 보게 되면 流麗美文 化된 겉보기만 따라잡을 수밖에, 이 시조의 話發이 어떤 話着으로 종국화된 것인가를 놓치게 된다. 작중의 화자는 영혼을 깎는 대팻날이다. 그의 영혼을 그의 손이 혼신을 다하여 밀고 당길 때 그의 젊 음의 결은 '푸른 젊음'으로 확신된다. 그렇게 그는 그의 대패로 앞당겨서 삶의 질을 벗겨 내지만, 그 러한 질의 결들이 결국 겉옷.속옷처럼 희.노.애.락의 허울로 감싸고 있었던 것임을 소스라치면서 깨 닫는다. "어둠 찍는 정소리"가 그 같은 소스라침의 분위기를 대변하고 있다. 그 다음, 작중의 화자는 홀연히, 그러나 태연히 자신의 허울을 벗는다. "미지의 꿈 채광하는/사유의 막장"에서 캔 "한잠 깬 누에 한 마리/비로소 벗는 허울", 이것이야말로 吾喪我의미의 소리 反響인 것이다. 지금까지 이 글은 姜鎬寅의 몇 작품을 텍스트로 붙들어 연결시키면서 그것들이 氣의 인식에 입각한 실존적 삶의 호흡 의의였음을 불충분하게나마 밝히려고 했다. 평시조 詩形이 주는 제약성이 오히려 그의 시정신의 難易度를 용이한 성취 차원으로 이끈 것임을 알 수 있었고, 脫骨되지 않은 유연한 氣 의 운동성을 짚어 볼 수 있었다. 때절은 그릇마다 오두마니 담겨 있는 한 시절 꿈의 조형 소롯한 온갖 물상 말없이 일별만 해도 그들 고향 선연하다. 청과전 어름에선 과원의 고운 향이 어물전 모퉁이 돌면 철썩이는 해조음이 그날의 운세와 함께 푼수대로 환전된다. 탐욕의 촉각을 세운 극성스런 파리떼 속 팔 것도 살 것도 없는 무욕의 바람처럼 염낭이 텅 빈 사람이여 어이 그대 서성이나. -「경매장에서」전문. 조금도 맺힌 데 없이 풀어 낼 만큼 풀어 낸 그의 이 意中行을 통해 봐도 알 수 있듯이, 오늘의 현실 태와 그의 시정신은 양립성이 아니라 조응성이다. 그러나 그는 「경매장에서」제3수 중.종장의 경우 같은 것들을 다시 생각해야 할 것 같다. 근심의 바다에 맞서 무기를 들고 그들과 대결함으로써 끝장내는 것. 《햄릿》에 나오는, 이 햄릿의 독백 일부를 되씹는다 할 때 그의 모자람은 보충될 것이리라. 그리고 제1회 南冥文學賞 新人賞 수상자인 그였으므로, 南冥 曺植의 「丹城疏」가 뜻하는 길을 다시 요령껏 비추어 보면서 좀더 확연한 비판의식 위에 서 달라고 당부하고 싶다. 사랑 참 / 백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