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아름다운 문학 206

<김선우> 헤모글로빈, 알코올, 머리칼 / 낙화, 첫사랑

​ 헤모글로빈, 알코올, 머리칼 - 김선우 - 『머리가 깨진 날 기뻤어요 내상보다 외상이 덜 위험하거던요』 ​ 보도블록을 깨다 손목 베이자 불타는 머리칼. 그 격렬한 외상의 날들 자고 일어나면 새살이 돋아 있곤 했지요 추억의 쓴 물에 어금니를 담그거나 이적성 표현은 아닙니다 ​ 구십년대는 우울한 내상의 날들이어서 걸핏하면 넘어지고 발목을 삐는데 피 한방울 흐르지 않고 멍만 듭니다 세계 인구의 열배도 넘는 세포가 모여 이룬, 육체의 나날은 출혈 없이 평화롭습니다 ​ 그런데 어제 머리를 깼지요 만취해 돌아오다 길에 누워버렸습니다 두개골은 멀쩡하고 상처도 크지 않은데 폭포처럼, 피 흘리는 머리칼 친구의 웃옷을 벌겋게, 치마를 물들이고 길바닥에 누워 헤실헤실 웃더랍니다 "아아 상쾌해" 하면서 말예요 ​ 빨간 다..

<한용운> 님의침묵 / 알수없어요 / 나룻배와행인 / 꿈과근심 / 복종

​ 님의 침묵 - 만해 한용운 / (1926) -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금강경>일절유위법(一切有爲法)

​ (일절유위법)一切有爲法 - 金剛經 제32應化非眞分 四句偈 / 라강하 譯 - 일절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 이 승에 모든 지어진 것들은 하나의 꿈이요, 환영이요, 곧 스러질 거품이요, 있는 둥 마는 둥한 그림자 같아라. 그리고 햇살에 곧 스러질 이슬방울이요, 잠깐 보일 뿐인 한 줄기 번갯불 같아라. 이 같이 볼것을... 사람들아!

<이해인> 꿈을 위한 변명 / 당신이 보고 싶은 날

​ 꿈을 위한 변명 - 이해인 - 아직 살아있기에 꿈을 꿀 수 있습니다 꿈꾸지 말라고 강요하지 마세요 꿈이 많은 사람은 정신이 산만하고 삶이 맑지 못한 때문이라고 단정 짓지 마세요 나는 매일 꿈을 꿉니다 슬퍼도 기뻐도 아름다운 꿈 꿈은 그대로 삶이 됩니다 오늘의 이야기도 꿈길에 그려질 때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꿈이 없는 삶 쌂이 없는 꿈은 얼마나 지루할까요 죽으면 꿈이 멎겠지만 살아 있는 동안은 꿈을 꾸고 싶습니다 꿈이 있어 외롭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 당신이 보고 싶은 날 - 이해인 - 요즘엔 당신이 더욱 보고 싶습니다 지척인 당신을 두고서도 보지 못 한다는 것이 마음 한 구석을 멍들게 하고 있습니다 ​ 그리운 마음에 견딜수 없을때면 이런 상상을 합니다 "당신이 꿈이였으면....." ​ 당신..

<장석주> 날아라, 時間의 捕蟲網에 붙잡힌 우울한 夢想이여

​ 날아라, 時間의 捕蟲網에 붙잡힌 우울한 夢想이여 - 장석주(張錫周) - Ⅰ​ 新生의 아이들이 이마를 빛내며 東편西편 흩어지는 바람 속을 질주한다 짧은 겨울 해 덧없이 지고 너무 오래된 이 세상 다시 저문다 인가 近處로 내려오는 죽음 몇 뿌리 소리 없이 밤눈만 내려 쌓이고 있다​ ​ Ⅱ​ 회양목 아래에서 칸나꽃 같은 女子들이 울고 있다 증발하는 구름 같은 꿈의 毛髮, 어떤 손이 잡을 수 있나 ​ Ⅲ​ 밤이 오자 寂寞한 온천 마을 靑과일같은, 달이 떴다 바람은 낮의 처마의 불빛을 흔들고 우리가 적막한 헤매임 끝에 문득 빈 수숫대처럼 어둠 속에 설 때 가을 山마다 골마다 滿月의 달빛을 받고 하얗게 일어서는 야윈 물소리.​ ​ Ⅳ​ 어둠 속을 쥐떼가 달리고 공포에 떨며 집들이 긴장한다 ​ 하나의 성냥개비를 ..

<朱文暾> 둘 혹은 하나 / 고요 / 그의 바다 / 어둠

​ 둘 혹은 하나 - 朱文暾(둘 혹은 하나, 1970) - 기울어진 角度의 몇 모금의 멜러디가 그의 유리컵을 채우고 경사를 바로하는 그의 전신을 향해 고추서는 내 유리컵의 異變. 그를 채우기 위해 기울어졌다가 결국 쏟아놓은 것은 무형의 멜러디 뿐임을 알게되는 뜻밖의 自覺. 기울어졌다가 쏟아받은 진한 체온의 感銘. 눈바람의 海溢 속에 독립하는 두 개의 실루엣으로부터 기울어졌던 만큼의 멜로디가 천천히 안으로 안으로 沈降하는 둘 혹은 하나. ​ ​ 고 요 - 朱文暾(둘 혹은 하나, 1970) - 고요를 길어 올리는 두레박입니다 고요가 고요를 꾸역꾸역 새김질합니다 고요의 가지를 자르던 당신의 가위는 수 없이 녹슬었습니다 고요의 보이지 않는 이마에서 회색의 피가 흐릅니다 가느다랗게 가느다랗게 끝없이 흐릅니다 당신..

<박남수> 어딘지 모르는 숲의 記憶 / 새 / 아침 이미지 / 종소리

​ 어딘지 모르는 숲의 記憶 - 朴南秀 / 새의 暗葬 (1970) - 1 어느 날, 나는 어딘지 모르는 숲의 記憶을 더듬고 있었다. 당신의 눈에 낀 안개 같은 것, 새가 죽어, 눈에 끼던 산 안개의 흰 빛이 나의 어두운 거울에 히뜩 지나가는 그 순간에, 나는 어딘지 분명챦은 숲 속을 날고 있었다. ​ 겨울 마른 나뭇가지가 어른거린다. 땅 위에는 흰 눈이 깔리고 다섯 가락의 굳은 발자국이 꽃잎처럼 패인, 긴긴 一直線을 굽어보면서, 나는 끼룩끼룩 가슴의 소리를 뽑아 보았지만, 그것은 발톱이 판 傷痕이 되어 나의 內壁으로 되돌아오는 메아리에 지나지 않았다. ​ 2 어딘지 분명챦은 숲의 記憶이, 지금 나의 겨드랑께서 날개를 돋게 하지만, 나에게는 하늘이 없다. 이 큰 날개를 날릴 하늘이 없다. 그래서 나는 지금..

<사이먼과 가펑글> 적막의 소리(Sounds Of Silence)

​ 적막의 소리(Sounds Of Silence) - 사이먼과 가펑글(Paul Simon and Arthur Garfunkel), 라강하 譯 - Hello darkness, my old friend, 여보게, 나의 오랜 친구인 어둠이여! I've come to talk with you again, 그대와 이야기 나누어 보려고 또 찾아왔네. Because a vision softly creeping, 내가 잠든 사이에 살며시 기어 들어와 Left its seeds while I was sleeping, 그대가 내 머리 속에 아무도 아무도 모르게 And the vision that was planted in my brain 환영(幻影)의 씨앗을 심어 주었기에 Still remains 적막의 술렁임 속에서도 ..

<세익스피어> 내일, 또 내일, 또 내일 / 맥베드

​ 내일, 또 내일, 또 내일 - 맥베드 / 세익스 피어, 라강하 譯 - 내일, 또 내일, 또 내일이 Tomorrow, and tomorrow, and tomorrow,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쉬지 않고 하루하루 Creeps in this petty pace from day to day 종종 걸음으로 소리없이 다가가고, To the last syllable of recorded time, ​ 지나간 날들은 어리석은 자들에게 And all our yesterdays have lighted fools 티끌의 죽음으로 돌아가는 길을 비추어 왔구나. The way to dusty death. ​ 꺼져라, 꺼져, 덧없는 촛불아! Out, out, brief candle! ​ 인생이란 기껏해야 걸어다니는 그림자, L..

<작자미상> 유산가(遊山歌)

유산가(遊山歌) -작자 미상- 화란춘성(花爛春城)하고 만화방창(萬和方暢)하니 때 좋다 벗님네야 산천경개(山川景槪)를 구경가세 죽장망해(竹杖芒鞋) 단표자(簞瓢子)로 천리강산(千里江山) 들어가니 만산홍록(滿山紅綠)들은 일년일도(一年一度) 다시피어 춘색(春色)을 자랑노라. 색색(色色)이 붉었는데 창송취죽(蒼松翠竹)은 창창울울(蒼蒼鬱鬱)하고 기화요초(琦花瑤草) 난만중(爛漫中)에 꽃속에 잠든 나비 자취없이 나라난다. ​ ​ 유상앵비(柳上鶯飛)는 편편금(片片金)이요 화간접무(花間蝶舞)는 분분설(紛紛雪)이라 삼춘가절(三春佳節)이 좋을씨고, 도화만발(桃花滿發) 점점홍(點點紅)이로구나 어주축수애산춘(漁舟逐水愛山春)이라던 무릉도원(武陵桃源)이 예 아니냐 양류세지(楊柳細枝) 사사록(絲絲綠)하니, 황산곡리당춘절(黃山谷裡當春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