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아름다운 문학

<주요한(친일)> 불놀이 / 샘물이 혼자서 / 빗소리

이름없는풀뿌리 2023. 9. 15. 07:46
불놀이 - 주요한 / <창조>(1919) - 아아, 날이 저믄다. 서편(西便) 하늘에, 외로운 강물 우에, 스러져 가는 분홍빗놀 . 아아 해가 저믈면 해가 저믈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사 월이라 파일날 큰길을 물밀어가는 사람 소리만 듯기만 하여도 흥셩시러운 거슬 웨 나만 혼 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업는고 ? 아 춤을 춘다, 춤을 춘다, 싯별건 불덩이가, 춤을 춘다. 잠잠한 성문(城門) 우에서 나려다 보니, 물 냄새 모랫 냄새, 밤을 깨물고 하늘을 깨무는 횃불이 그래도 무어시 부족하야 제 몸까지 물고 뜯을 때, 혼자서 어두운 가슴 품은 절믄 사람은 과거(過去)의 퍼런 꿈을 찬 강 물 우에 내여던지나, 무정한 물결이 그 기름자를 멈출리가 이스랴? ---- 아아 꺽어서 시들 지 않는 꽃도 업건마는, 가신 님 생각에 사라도 죽은 이마음이야, 에라 모르겟다. 저 불길 로 이 가슴 태와 버릴가, 이 서름 살라 버릴가, 이제도 아픈발 끌면서 무덤에 가 보앗더니 겨울에는 말랏던 꽃이 어느덧 피엇더라마는, 사랑의 봄은 또다시 안 도라 오는가, 찰하리 속 시언이 오늘 밤 이 물 속에 . 그러면 행여나 불상히 녀겨 줄 이나 이슬가...... 할 적에 퉁, 탕, 불티를 날니면서 튀여나는 매화포, 펄덕 정신(精神)을 차리니 우구구 떠드는 구경 꾼의 소리가 저를 비웃는 듯, 꾸짖는 듯. 아아 좀 더 강렬(强烈)한 열정에 살고 십다. 저긔 저 횃불처럼 엉긔는 연기, 숨맥히는 불꽃의 고통 속에서라도 더욱 뜨거운 삶을 살고 십다 고 뜯밖게 가슴 두근거리는 거슨 나의 마음 . 4월달 다스한 바람이 강을 넘으면, 청류벽, 모란봉 노픈 언덕 우헤 허어혀켜 흐늑이는 사람 떼, 바람이 와서 불적마다 불비체 물든 물결이 미친 우슴을 우스니, 겁 만흔 물고기는 모래 미테 드러벡이고, 물결치는 뱃슭에는 조름오는 니즘의 形象이 오락가락----- 얼린거리는 기 름자, 닐어나는 우슴소리, 달아 논 등불 미테서 목청껏 길게 빼는 어린 기생의 노래, 뜯밖 에 정욕(情欲)을 잇그는 불구경도 인제는 겹고, 한 잔 한 잔 또 한 잔 끝업슨 술도 인제는 실혀, 즈저분한 뱃 미창에 맥업시 누으면 까닭 모르는 눈물은 눈을 데우며, 간단(間斷)업슨 쟝고 소리에 겨운 남자들은 때때로 불니는 욕심에 못 견듸어 번득이는 눈으로 뱃가에 뛰여 나가면, 뒤에 남은 죽어 가는촛불은 우그러진 치마깃 우에 조을 때, 뜯잇는드시 삐걱거리는 배잣개 소리는 더욱 가슴을 누른다 . 아아 강물이 웃는다. 웃는다. 괴샹한 우슴이다. 차듸찬 강물이 껌껌한 하늘을 보고 웃는 우 슴이다. 아아 배가 올라온다. 배가 오른다. 바람이 불 적마다 슬프게 슬프게 삐걱거리는 배 가 오른다 . 저어라, 배를 멀리서 잠자는 능라도까지, 물살 빠른 대동강을 저어 오르라. 거긔 너의 애 인이 맨발로 서서 기다리는 언덕으로 곳추 너의 뱃머리를 돌니라. 물결 끝에서 니러나는 추 운 바람도 무어시리오. 괴이(怪異)한 우슴 소리도 무어시리오, 사랑 일흔 청년의 어두운 가 슴 속도 너의게야 무어시리오. 기름자(그림자) 업시는 발금(밝음)도 이슬 수 업는 거슬 오 오 다만 네 확실한 오늘을 노치지 말라. 오오 사로라, 사로라! 오늘밤! 너의 발간 횃불을, 발간 입셜을, 눈동자를, 또한 너의 발간 눈물을 . * 작품해설 : 이 작품은 전대의 교훈성이나 계몽성을 탈피하고 개인적 서정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 일체의 운율적 제약을 벗어나 감정의 자유로운 유출(流出)에 합당한 자유시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대담한 상징적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자유시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한문투를 최대한 배제한 순우리말 표현 -‘외로운 강물’, ‘스러져 가는 저녁’ 등은 당시로 보아 대단히 값진 성과라할 수 있다. ‘가신 임 생각에 살아도 죽은 이 마음이야’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시적 자아는 죽음과 삶, 즉 임을 잃고 갖게 된 죽음에 대한 유혹과 사월 초파일의 흥겨운 불곷놀이로 나타난 현실 사이에서 고통 받고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죽음과 대립은 어둠과 밝음, 물가 불의 대립으로 이어져 전편을 격 정적이고 불안한 분위기로 이끌고 있다. 다시 말해, ‘차라리 속 시원히 오늘 밤 이 물 속에......’ 라는 구절로 나타나는 죽음과 ‘아아, 좀더 강렬한 정열에 살고 싶다’에 표출되는 삶의 욕구 사이에 서 번민하는 시적 자아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이 ‘물’과 ‘불’이라는 두 원형적(原型的) 상징은 죽음과 삶, 어둠과 밝음, 슬픔과 기쁨, 삶의 고 뇌와 비상(飛翔) 등으로 표상되는 대립적 요소이다. 그러나 외견상 화합할 수 없어 보이는 이러한 대 립은 ‘그림자 없이는 밝음도 있을 수 없는 것을’ 이라는 구절에서 역설적 논리로써 통합된다. 그럼 으로써 극한적 자학 상태에 빠진 시적 자아는 극적으로 소생하여 ‘애인이 맨발고 서서 기다리는’ 부활의 언덕을 향해 배를 저을 수 있는 생명의 원동력을 부여받는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그가 겪어 오던 죽음과 삶, 어둠과 밝음, 물과 불이 결국 동일한 것이라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된 시적 자아 는 ‘오오, 다만 네 확실한 오늘을 놓치지 말라’며 더욱 강렬한 삶의 욕구를 얻게 된다. 물론 ‘오 오 사르라. 사르라! 오늘 밤! 너의 빨간 횃불을, 빨간 입술을, 눈동자를, 또한 너의 빨간 눈물을.....’ 에서 보이는 파괴적 충동과 격렬한 도취의 행위를 아직도 절망적 태도와 비애의 감정을 완전히 극복 하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삶과 죽음이라는 대립된 욕구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이 감정으로 표출됨으로써, 때로는 시상(詩想) 의 혼란을 일으키기도 하여 산만하고 지루한 느낌을 주기도 하고, 감정의 지나친 유출로 인한 감정의 허세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이러한 애상적 정조는 일제 치하를 살았던 청년 시인 주요한의 고뇌 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감상적(感傷的), 영탄적 정조의 세기말적 징후는 서구 상징 주의 문학의 유입과 함께 당시 젊은 지식인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박종화, 홍사용, 이상 화로 대표되는 『백조』 동인의 경우 3.1운동의 좌절로 인한 암담한 절망감과 결부되어 퇴폐적이고 애상적인 분위기는 더욱 증폭되었다. 샘물이 혼자서 - 주요한 / <학우>(1919) - 샘물이 혼자서 춤추며 간다 산골짜기 돌 틈으로. 샘물이 혼자서 웃으며 간다. 험한 산길 꽃 사이로. 하늘은 맑은데 즐거운 그 소리 산과 들에 울리운다. 빗소리 - 주요한 -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 뜰 위에 속삭입니다.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 같이 이지러진 달이 실날 같고 볕에서도 봄이 흐를 듯이 따뜻한 바람이 불더니 오늘은 이 어두운 밤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다정한 손님같이 비가 옵니다. 창을 열고 맞으려 하여도 보이지 않게 속삭이며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뜰 위에 창밖에 지붕에 남 모를 기쁜 소식을 나의 가슴에 전하는 비가 옵니다. * 주요한(朱耀翰, 1900 ~ 1980) 별칭 : 송아(頌兒), 송아지, 송생(頌生), 낭림산(狼林山) 1900년 평안남도 평양 출생 1912년 평양 숭덕소학교 졸업 1918년 일본 메이지학원 중등부 졸업 1919년 시 「에튜우드」를 『학우(學友)』에 발표, 문학 동인지 『창조』 동인 1925년 중국 상해 호강대학 졸업 1929년 동아일보사 편집국장, 논설위원 1933년 조선일보사 편집국장. 전무 1945년 해방 후 문단 활동 중단 1980년 사망 주요한은 1930년대에 들어 시조나 시도 간혹 썼지만, 그보다는 주로 언론인, 정치사, 사업가로 활동 한다. 1935년(36세)에 화신 상회(和信商會) 임원을 지내고, 해방 후에는 흥사단(興士團)에 관계하는 한편 언론계에 진출하여 정치 · 경제 부문의 논평을 많이 썼다. 해방 후에는 문필 활동을 거의 하지 않은 채 1958년(59세) 민주당 국회의원을 거쳐 1960년(61세) 4.19 혁명 후 장면 내각 때에는 부흥부 장관, 상공부 장관을 역임했고, 5.16 군사 정변 후에는 경제 과학 심의회 위원과 대한 해운 공사 사 장을 지냈다. * 주요한(朱耀翰)의 친일 행위 2002년 민족문제연구소등 5개 단체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문학인 42인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명단 5,207명중 친일 시인(詩人)이 있는데 그들은 곧 미당을 비롯한 12인이 있기에 우리는 꼭 기억하여야만 할 것이다. 김동환(金東煥), 김상용(金尙鎔), 김안서(金岸曙), 김종한(金鍾漢), 김해강(金海剛), 노천명(盧天命), 모윤숙(毛允淑), 서정주(徐廷柱), 이찬(李燦), 임학수(林學洙), 주요한(朱耀翰), 최남선(崔南善)이며 주요한은 시 “성전찬가”에서 일제의 태평양 전쟁을 찬양하며 격정적으로 일본을 찬양하는 시들을 창작하였다. 또한 “적, 미국의 사상모략”이라는 평론에서 미국을 백인 제국주의의 앞잡이라고 지적하면서, 대동아 단결을 이룩하여 조선의 청년들은 분연히 일어나 영국과 미국의 모략을 분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첫피 / 주요한 /1941.3 신시대 나는 간다, 만세를 부르고 천황폐하 만세를 목껏 부르고 대륙의 풀밭에 피를 부리고 너보다 앞서서 나는 간다. 피는 뿜어서 누런 흙 우에 검게 엉기인다. 형아! 아우야! 이 피는 너들의 피다. 너들의 뜨거운 피가, 2천 3백만 너들의 피가 내 몸을 통해서 흐르는 것이다. 역사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뿌려지는 피다. 반도의 무리가 님께 바친 처음의 피다. ........... 나는 내 피에 고개를 숙이어 절한다. 그것은 너들의 피기 까닭에, 장차 내 뒤를 따라올 백과 천과 만의 너들의 뜨거운 피기 때문에. 아아 간다, 나는 너보다 앞서서 한자욱 앞서서, 만세, 만세. 댕기 / 주요한 아무르의 얼음도 여름에는 녹겠지요 녹았어도 소식이 없는 여름일랑 까아만 댕기에 하이얀 간호복 입고 저도 나라를 위해 있는 힘 다 바치겠어요 명기하라 12월 8일 / 주요한 / 1942.1 신시대 역사가야 붓을 버려라 네 붓이 너무 무질렀다. 역사가야 책을 던저라 네 책이 너무 낡았다. 새 붓을 예비하여라 새 책을 펼쳐 놓아라 새 먹을 갈아서 새로운 시대의 첫 페이지를 적어라 이천하고 육백 또 일 년 섣달은 초여드레 이날 미명에 태평양의 물결이 끓었느니라 역사가야 이렇게 쓰려느냐 아니다 아니다 이날 하루에 폭려미국(暴戾米國)의 태평양 함대가 순식간에 반신불수가 되니라 이날에 루즈벨트는 간을 얼리고 처칠이 담을 떨어뜨리니라 이날에 말레이반도와 루송에 불비가 나리니라. 이렇게 그대는 첫 페이지를 쓰려느냐 아니다 아니다 이날에 영미의 세대가 끝나고 아세아의 세대가 시작되니라 오직 이렇게 그대는 써라 역사가야 이날에 침략의 악몽이 막을 내리고 공영의 여명이 터오니라 오직 이렇게 그대는 써라 역사가야 새로운 역사의 첫 페이지에 명기하라 12월 8일 아세아의 붉은 태양이 세계를 비추려 떠오른 날을 폭탄의 세례와 프로펠러의 선물 속에 새로운 시대의 탄생곡을 분명히 파악하여라 그대 역사가야 * 12월 8일(1941년)은 일제가 하와이의 진주만과 영국령 말레이반도를 기습 공격하면서 미국,영국에 선전포고한 날로, 이로부터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시는 그 12월 8일을 새로운 시대, 아세아의 세대가 열린 역사적인 날로서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발췌 : 교과서와 친일 문학 (동녁사. 1988년) * 주요한, ‘야스쿠니의 신’이 되도록 천황을 위해 죽으라 이 풍진 세상에 / 친일문학 이야기 / by 낮달2018 2019. 2. 24. ‘천황을 위해 죽으라’고 권유한 ‘불놀이’의 시인 주요한 ▲ 주요한(1890~1979) 조선총독부가 ‘조선민사령’을 개정한 것은 1939년이고, 이에 따라 조선에서도 일본식 씨명제(氏名 制)를 따르도록 명령한 것은 1940년이었다. 이른바 ‘창씨개명’은 거칠게 정리하면 조선 사람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일본인이 되라는 요구였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 조선인이 이 정책에 반대 하였지만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한 친일파도 적지 않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자유시 「불놀이」의 시인 주요한(朱耀翰·松村紘一, 1900~1979)도 여기 당당히 이 름을 올린다. 총독부의 내선일체 체제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일본어 시집 『손에 손을(手に手を)』 (1943)까지 낼 정도의 극렬 친일파 주요한은 기꺼이 황국신민의 은혜에 감읍해 마지않는다. ‘마쓰무라 고이치(松村紘一)’와 ‘팔굉일우(八紘一宇)’ 친일파들은 갖가지 지혜를 짜내어 일제의 요구를 만족시킬 만한 창씨를 ‘실천’하였다. 일제의 황민 화(皇民化) 요구에 부응한 창씨명은 소설가 이광수와 시인 주요한, 그리고 평론가 김문집의 그것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진무천황이 즉위한 곳의 산 이름인 가구야마(香久山)를 씨로 삼아 ‘가야마(香山)’라 하고 ‘광수’의 ‘광(光)’ 자에다 ‘수(洙)’ 자는 일본식의 ‘랑(朗)’으로 고쳐 ‘가야마 미쓰로(香山 光郞)’가 된 이광수가, 단연 그 선두다. 평론가 김문집은 ‘대구(大邱)에서 태어나 도쿄, 즉 에도(江戶)에서 성장하고 용산(龍山)역에서 전사 해 돌아오는 황군 장병을 맞아 운 적’이 있다며 그 각각의 지명에서 한 자씩 따서 ‘오에 류노스케 (大江龍之助)’라 하였으니, 그 둘째다. 마지막이 ‘마쓰무라 고이치(松村紘一)’로 이름을 바꾼 주요한이다. 바꾼 이름 고이치는 일제의 황 도(皇道)정신인 ‘팔굉일우(八紘一宇)’*를 딴 것이니 그는 확실히 ‘덴노헤이카(天皇陛下)의 적자 (嫡子)’가 되고도 남음이 있다. * 일본 천황제 파시즘의 핵심 사상으로, 태평양전쟁 시기에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세운 구호. ‘전 세계가 하나의 집’이라는 뜻. 주요한은 평양 출신으로, 연극인 주영섭과 단편 소설 「사랑 손님과 어머니」의 작가 주요섭의 형이 다.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19년에 문예 동인지 『창조』 동인으로 참가하여 그 창간호에 산문시 「불놀이」를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불놀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 자유시로 알려져 있다. ▲ 1993년 세종문화회관 옆 세종로공원에 세워진 주요한 시비. 시 「빗소리」가 새겨짐. 뒤 건물은 외교부 청사. 주요한이 본격적인 친일의 길로 들어선 것은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다. 1919년에 그는 상하이 로 가서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의 편집을 맡았고, 1924년부터 1936년까지 문예지 『조선문단』 의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에는 첫 시집 『아름다운 새벽』을 펴냈다. 1926년 흥사단의 국내 조직 수양동우회의 실질적 기관지인 『동광(東光)』의 편집인 겸 발행인을 맡 았다. 1930년대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근무하였으며, 1937년경에는 친일 실업인 박흥식이 설립한 주식회사 화신(和信)에서 중역으로 일하였다. 수양동우회는 안창호, 이광수, 주요한 등에 의해 결성된 교육, 계몽, 사회운동 단체다. 그러나 식민 통치가 길어지면서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시점에 일본 제국이 일으킨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와해 되었다. 이는 본격적인 전쟁 체제를 조성하기 위해 양심적 지식인과 부르주아 집단을 포섭할 필요가 있던 일제가 수양동우회를 표적 수사한 사건이었다. 서울, 평안도, 황해도 등의 지역에서 모두 181명의 수양동우회 회원 이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 되었다. 이 가운데 41명이 기소되었다가 1941년에야 무죄 석방되었는데, 검거된 회원들은 강제로 전 향한 뒤 일제에 협력하게 되었다. 작곡가 홍난파가 그 대표적 인물이며, 중심인물이던 이광수와 주요 한도 이후 적극적으로 친일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7년 종로경찰서에 검거된 주요한은 이듬해 11월 수양동우회 사건의 예심 보석 출소 기간 중에 전 향을 선언하고 조선신궁을 참배하였다. 같은 해 12월 경성부민관 강당에서 열린 전향자 중심의 좌담회인 ‘시국유지원탁회의’에 참석하여 “이 비상시에 있어서 우리는 일본이 승리를 얻어야 하겠다는 입장에서 황군의 필승을 위한 총후의 적성 (赤誠)에 전력을 바쳐야 할 것”(『삼천리』 1939년 1월호)이라고 말하였다. 같은 달 주요한은 수양동우회를 대표해서 종로경찰서에 국방헌금 4천 원을 헌납하였다. 이후 주요한은 그야말로 ‘눈부시게’ 친일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 문인협회, 황도학회, 임전대책 협의회* 등 전시 체제기 전쟁 협력 단체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면서 이른바 ‘총후봉공’에 매진하였 다. 내선일체 운동 단체인 국민훈련후원회가 벌인 일본어 보급운동에 참여하고, ‘채권가두유격대’ 에서 애국채권을 팔고,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의 의용봉공(義勇奉公) 끝에, 그는 1941년 11월 수양동 우회 사건 최종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 1941년 중일전쟁 시국에 대한 협조를 위해 『삼천리』 사장인 김동환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황국 신민화 운동을 실천하는 상설 단체. 결성 두 달 만에 비슷한 성격의 단체인 흥아보국단과 합병하여 조선임전보국단을 결성하면서 해체되었다. 전쟁 찬양과 죽음 선동, 화려한 총후봉공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것은 주요한이 무죄를 선고받은 지 한 달 뒤였다. 황은에 감읍하였던가. 주요한 은 1941년 12월 14일 조선임전보국단이 주최한 전선(全鮮)국민대회의 미영 타도 대연설회에서 ‘루스 벨트여 답하라’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루스벨트와 처칠을 방화범, 해적, 어릿광대 등에 빗대면 서 “그대들의 악운은 이미 다 되었”고, “반도의 2400만은 혼연일체가 되어 대동아 해방 성전의 용 사 되기를 맹서하고 있다”(『신시대』 1942년 1월호)며 불을 뿜었다. 1942년 5월에 일본이 1944년부터 ‘조선인 징병제도’를 시행하기로 하자, 그는 조선임전보국단의 징 병제도 대연설회에서 ‘새로운 각오’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무적 황군의 일(一) 분자’가 됨 을 욕되게 아니하려면 “① 국체(國體)에 철저하여라. ②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대 이상을 깨달아라. ③ 충절을 다하라. ④ 사생(死生)을 초월하라. ⑤ 곤 고(困苦)를 견디어라”(『대동아』 1942년 7월 호)라고 주장하였다. 이후 대동아전 1주년 기념 국민시 낭독대회에서 시를 낭독하고, 《매일신보》의 ‘반도개병가(半島皆 兵歌)’ 현상 모집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미귀(米鬼)의 잔학성을 폭로한다’라는 주제 의 라디오 좌담회에 참석하고, 해군지원병제 실시 기념으로 열린 미영 격멸 대 강연회에서 강연하는 등 주요한은 다방면으로 일제에 협력하느라 바빴다. 1944년께 주식회사 화신이 안양에 비행기공장을 짓는 데 관여하여 해방될 때까지 이 공장의 운영을 책임졌다. 같은 해 2월 종로경찰서가 주도한 황민화운동 단체에 참여해 ‘총후보국’에 앞장섰다. 3 월 기 존의 조선문인보국회 기관지에서 보국회 시부회(詩部會) 기관지로 바 뀐 『국민시가』의 편집 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이런 친일 활동과 함께 일제에 협력하는 글쓰기도 나날이 무르익었다. 1940년 『조광』 9월호에 시조 「여객기」를 발표하면서 시작한 친일 글쓰기는, 일제의 침략전쟁이 확대되면서 ‘대동아공영권’을 위한 태 평양전쟁 찬양으로 이어졌다. 12월 여드렛날 네 위에 피와 불이 비 오듯 나릴 때 동아 해방의 깃발은 날리고 정의의 칼은 번듯거림을 네 보았으리라 이날 적국의 군함, 침몰 된 자 기함(旗艦) ‘아리조나’를 위시해서 ‘오클라호마’와 ‘웨스트버지니아’와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깨어져서 다시 못 쓰게 된 자도 네 척, 이름 좋은 진주만은 비참한 시체가 되고 횡포한 아메리카 나라의 아세아 함대는 앉은자리에서 반신불수의 병신이 됨을 네 보았으리라 - 「하와이의 섬들아」, 『삼천리』(1942년 1월호) 그는 시를 통해서 일제의 싱가포르 점령을 찬양하고, 일제 침략전쟁의 주요 상대국인 영국과 미국을 비난하였다. 또 전력(戰力) 생산을 위하여 ‘총후’의 국민으로서 가져야 할 자세를 강조하는 글도 적잖게 썼다. ‘총후봉공’을 위해 바삐 뛰는 조선인들의 모습을 묘사하였다는 시 「정밀(靜謐)」은 부역 시인의 시적 감성이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보여 준다. 식민지 백성들이 일제 전시 체제의 일부가 되어 버린 순응적 질 서의 순간을 감각적으로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보고, 듣고 또 전신으로 느꼈다. 소집되어 가는 각모(角帽) 몸뻬의 행진 젊은 여성의 땅을 울리는 보조를 흰 수병복(水兵服)의 소년단 애국반상회의 창기대(槍騎隊) 눈 내린 새벽의 요배식(遙拜式)을 - 「정밀(靜謐)」, 『신시대』(1944년 7월호) 「싱가폴 함락가」, 《매일신보》(1942년 2월 18일자) ▲ 「싱가폴 함락가」, 《매일신보》(1942년 2월 18일자) 문인들의 총후봉공 중 중요한 것은 학병, 지원병, 징병, 징용 등을 선전·선동하는 일이었다. 주요한 은 이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지원병 응모 선동에 그치지 않고 조선 청년들에게 지원병이 되어 목숨을 바칠 것을 선동하였는데, 시 「첫 피(最初の血)」가 그 백미다. 지원병 이인석의 입을 빌려서 그는 천황을 위해 죽자고 선동하였다. ▲ 군복 차림의 이인석 상등병 나는 간다, 만세를 부르고 천황폐하 만세를 목껏 부르고 대륙의 풀밭에 피를 뿌리고 너보다 앞서서 나는 간다. (……) 역사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뿌려지는 피다. 반도의 무리가 님께 바친 처음의 피다. 205 (……) 형아 아우야, 나는 간다. 너보다 앞서 피를 뿌린다. 앞으로 너들의 피가 백으로 천으로 만으로 십만으로 뿌려질 줄을 나는 안다. 군복 차림의 이인석 상등병 「첫 피-지원병 이인석에게 줌」, 『신시대』(1941년 3월호) 206 대륙에서 대양에서 넘쳐흐르게 될 줄을 나는 안다. - 「첫 피-지원병 이인석(李仁錫)에게 줌」, 『신시대』(1941년 3월호) ▲ 「첫 피-지원병 이인석에게 줌」, 『신시대』(1941년 3월호) 젊은 여성은 간호부로, 청년은 가미카제로 선동은 여성들에게도 이어졌다. 그는 시 「댕기(タンギ)」(『국민문학』 1941년 11월호)에서 “까만 댕기에 하이얀 간호복 입고 / 저도 나라를 위해 있는 힘 다 바치겠어요”라며, 젊은 여성들에게도 간 호부로서 전쟁에 참여하라고 독려하였다. 주요한은 ‘가미카제(神風)’로 출전하는 조선 청년을 숭고하게 묘사 함으로써 조선 청년들에게 천황 을 위해 목숨을 바치길 요구하였다. 1944년 5월호 『방송지우』에 발표한 산문 「구단(九段)의 꽃」 에서 조선 의 지원병, 학병, 여자정신대 등을 ‘구단’에 만발한 ‘젊은 사쿠라꽃’에 비유한 것이 다. ‘구단’이란 도쿄의 ‘야스쿠니(靖國)신사’가 있는 곳이니, ‘천황폐하’를 위해 죽어서 신사 에 모셔지는 ‘신(神)’이 되라는 것이 었다. ▲ 「전 국민이 육탄으로」, 《매일신보》(1945년 5월 25일자)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주요한은 마침내 폭뢰로 자살공격을 감행한 조선인 병사를 기리며 이를 따 르자고 선동하기에 이른다. 1945 년 1월 30일 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시 「파갑폭뢰(破甲爆雷)–박 촌(朴村) 상등병에게 드림」에서다. 전쟁 말기에 이들 친일 부역 문인들의 정신 상태가 온전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은데, 글쎄 다. 워낙 자기 정당화나 합리화에 능숙한 이들이 문인이고, 그걸 통해 자기 최면에 가까운 확신에 이 르기도 하니, 이 또 한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지 모른다. 최후의 항전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패전하였고 조선은 해방되었다. 그 화려한 배덕(背德)의 시대를 건 넌 이들로서 마땅히 그에 상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마땅했다. 천황과 전쟁을 찬양하다가 그것이 좌 절되었으니 흠모해 마지않는 일본식으로 할복하든가, 아니면 민족을 향해 석고대죄라도 해야 옳건만,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정부가 수립되었고, 친일파들은 다시 지도자로 소환 되어 정국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해방,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주요한은 1949년 4월 28일 반민법 제4조 제10항, 제11항 위반 혐의로 반민특위 산하 특수경찰대에 체 포되었다가 풀려나는 것으로 친일의 단죄에서 벗어났다. 그는 주로 기업에서 활동하다가 1948년 《국 민 신문》 편집국장을 지냈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에 참여하였다. 흥사단 기관지 『새벽』을 창간하기도 하였다. 이후 주요한은 많은 친일 문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나라의 주류로 살아갔다. 1958년 민의원으로 당 선하였고, 1960년 민주당 장면 내각에서 부흥부·상공부 장관을 지냈다. 1970년에는 공기업 대한해운 공사 사장을 지내면서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1970년대 들어서는 세종대왕, 도산 안창호, 안중근 등의 각종 기념 사업회 일에 관여하였다. 도산과 안중근 의사 같은 분들의 기념사업이 이러한 극렬 친일 인사들에 의해서 추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해방 후 식민지 역사에 대한 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는 만년에도 전경련 부회장 등 주요 경제단체의 간부를 역임하였다. 주요한은 1979년 11월 17일에 사망하여, 전국 실업인장으로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장례가 치러졌다. 정부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 서하였다. 이 훈장의 훈격은 1등급이다. 일제의 감옥에서 순국한 시인 이육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 것 은 해방 45년 만인 1990년이었다. 육사에게 추서된 애국장의 훈격은 4등급이었다. 건국훈장과 국민훈 장을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엄청난 전도, 이율배반이 환 기하는 것은 한국 현대사다. 청산하지 못한 식민지 역사가 빚어낸 슬픈 자화상이다. 2019.5. 낮달 불놀이 / 주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