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아름다운 문학

<김동환(친일)> 눈이 내리느니 / 북청 물장수 / 산 너머 남촌에는

이름없는풀뿌리 2023. 9. 16. 09:38
눈이 내리느니 - 김동환 - 북국에는 날마다 밤마다 눈이 내리느니 회색 하늘 속으로 흰 눈이 퍼부을 때마다 눈 속에 파묻히는 하아얀 조선이 보이느니 가끔 가다가 당나귀 울리는 눈보라가 막북강(漠北江) 건너로 굵은 모래를 쥐어다가 추위에 얼어 떠는 백의인(白衣人)의 귓불을 때리느니 춥길래 멀리서 오신 손님을 부득이 만류도 못 하느니 봄이라고 개나리꽃 보러 온 손님을 눈 발귀에 실어 곱게 남국에 돌려 보내느니 백웅(白熊)이 울고 북랑성(北狼星)이 눈 깜박일 때마다 제비 가는 곳 그리워하는 우리네는 서로 부둥켜안고 적성(赤星)을 손가락질하며 얼음벌에서 춤추느니 모닥불에 비치는 이방인의 새파란 눈알을 보면서 북국은 추워라, 이 추운 밤에도 강녘에는 밀수입 마차의 지나는 소리 들리느니 얼음짱 트는 소리에 쇠방울 소리 잠겨지면서 오호, 흰 눈이 내리느니 보오얀 흰 눈이 북새(北塞)로 가는 이삿군 짐짝 위에 말없이 함박눈이 잘도 내리느니. 웃은 죄 - 김동환 - 지름길 묻길래 대답했지요. 물 한 모금 달라기에 샘물 떠 주고, 그러고는 인사하기 웃고 받었지요. 평양성에 해 안 뜬대두 난 모르오. 웃은 죄밖에, 북청(北靑) 물장수 - 김동환 / 『동아일보』 ,1924. 10.24 -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물을 쏴 – 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북청 물장수 물에 젖은 꿈이 북청 물장수를 부르면 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 온 자취도 없이 다시 사라져 버린다. 날마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북청 물장수 산(山) 너머 남촌(南村)에는 - 김동환 / 『조선문단』 18호, 1927.1 - 1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南)으로 오네 꽃 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 익는 오월이면 모리 내음새, 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데나 2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저 하늘 저 빛깔이 저리 고을까 금잔디 너른 벌엔 호랑나비떼 버들발 실개천엔 종달새 노래, 어느 것 한 가진들 들려 안 오리 남촌서 남풍 불제 나는 좋데나 3 산 너머 남촌에는 배나무 있고 배니무 꽃 아래엔 누가 섰다기, 그리운 생각에 재에 오르니 구름에 가리어 아니 보이네 끊었다 이어오는 가는 노래는 바람을 타고서 고이 들리네. * 작품해설 이 작품은 「국경의 밤」, 「북청 물장수」의 북방적 정서와 남성적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섬세하고 부드러운 언어 구사와 여성적 어조로 표현되어 있다. 시인의 또 다른 일면을 보여 주고 있다. 김동환 은 「국경의 밤」 · 「눈이 내리느니」와 같은 작품에서는 북방의 춥고 어두운 겨울을 배경으로 암 울한 시대 상황을 상징적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반해, 이 시에서는 겨울이 없는 ‘남촌’을 무대로 하 여 그가 그리워하는 이상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진달래 향기’ · ‘보리 냄새’ · ‘호랑 나비떼’ · ‘종달새 노래’로 대표되는 사랑과 평화의 낙원으로서의 ‘남촌’이 지니고 있는 희망 과 사랑의 이미지로 인해, 시적 자아는, ‘배나무 꽃 아래’ 계실 ‘님’이 비록 구름에 가려 보이지 는 않더라도, 자신에게 전해 주는 사랑의 욕구가 자연의 운율적 질서와 동화됨으로써 민요적 리듬을 창출하는 데 성공을 거두고 있는 점 또한 이 시가 지닌 장점이라 할 것이다. 좌측부터 춘원 이광수, 이선희, 모윤숙, 최정희, 파인 김동환 * 김동환(金東煥, 1901 ~ 1958) 별칭 : 강북인(江北人), 파인(巴人), 백산청수(白山靑樹) 1901년 함경북도 경성 출생 1916년 중동학교 입학 1921년 일본 도요대학 영문과 입학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학업 중지 1924년 시 「적성(赤星)을 손가락질하며」를 『금성』에 발표하여 등단 1925년 카프(KAPF)에 가담 1927년 조선일보 기자 1929년 종합지 『삼천리』 발간 1937년 문예 전문지 『삼천리 문학』 주재 1950년 6.25 때 납북 시집 : 『국경의 밤』 (1925), 『승천하는 청춘』 (1925), 『삼인시가집』 (공저, 1929), 『해당화』 (1932), 『청용은 간다』 (1962) * 김동환(金東煥) 반민족 관련 행위 전력 1929년 종합월간지 《삼천리》와, 문학지 《삼천리문학》을 창간해 운영했는데, 일제강점기 말기에 삼천리사를 배경으로 하여금,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고 전쟁 지원을 위한 시를 발표하는 등 활발한 친 일 활동을 하였다.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과 친일파 708인 명단,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선정되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는데 ​그 중 친일 시인(詩人)은 미당을 비롯한 12인이 있기에 우리는 꼭 기억하여야만 할 것이다. 김동환(金東煥), 김상용(金尙鎔), 김안서(金岸曙), 김종한(金鍾漢), 김해강(金海剛), 노천명(盧天命), 모윤숙(毛允淑), 서정주(徐廷柱), 이찬(李燦), 임학수(林學洙), 주요한(朱耀翰), 최남선(崔南善)이며 ※김동환의 유명한 친일 시를 원문 그대로 소개한다 총, 일억 자루 나아간다 (김동환 / <삼천리> 1942. 1) 1 총, 일억 자루 나아간다 총, 일억 자루 나아간다 거친 물결 억센 바람 헤치고서 일억 자루의 총, 일억 국민의 어깨에 메어져 앞으로 나아간다. 이 총 끝을 막을 자 누구더냐 이 총자루 당할 자 누그더냐 태평양에, 대서양에 아무도 없고 아세아에 북미주에 아무도 없다 아하, 거룩한 싸움터로 일억 자루의 총은 노인의 어깨에도 청년의 어깨에도 메어져 화약 냄새 풍기는 전장으로 전장으로 내닷는다. 2 총, 일억 자루 나아간다 총, 일억 자루 나아간다 높은 산 깊은 바다 헤치고서 일억 자루의 총, 일억 국민의 어깨에 메어져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이 총 끝 닿는 곳, 진주만이요 보르네오요, 적도 밑이며 이 총소리 들리는 곳, 비율빈(比律賓)이요 포왜(布哇), 인도 사람의 귀라 강적 영미의 심장 찌르려한다. 그 총 자루 오억인가 십억인가. 아하, 장할시고, 그 중에도 우리들 청년은 비행기타고 하늘을 날까 잠항정(潛航艇)에 몸 실어 천길 물속 헤엄칠까 어뢰를 안을까, 탱크를 몰까 때는 왔다 때는 왔다 아세아 청년 일어설 날이 왔다. 3 총, 일억 자루 나아간다 총, 일억 자루 나아간다 모진 포위(包圍), 억센 압박 헤치고서 일억 자루의 총, 일억 국민의 어깨에 메어져 자꾸자꾸 나아간다 지금은 남미의 고-히밧에도 마닐라의 사탕농원에도 화약이요 피빗 냄새뿐이나 강적 영미가 물러가는 날 다시 새는 노래하고 색시는 뽕 따고 아이는 소리치리라 머지 안은 평화의 그날 맞기위하여 우리들은 어서 빵 나눠 먹고 담배 나눠 피며 한 몸 한 마음되여 저리 승리의 깃발 날리는 전장으로 전장으로 고함치며 내닷자 4 일본이여, 일본이여 나의 조국 일본이여 어머니여, 어머니여 아세아의 어머니 일본이여 주린 아이 배고파서, 벗은 아이 추워서 젓 달라고, 옷 달라고 십억의 아이 우나이다. 우나이다 그네들은 당신 집구들이 좁은 줄 아나 당신 마음 넓고 큰줄 믿고서 지금 두 손 벌려 안아 달라 외칩니다. 외칩니다 강한 몸에 어쩔 길 없어서 그 몸 더럽힌 적 있으나 아직도 그 영혼 깨끗하고 그 피 순결하나이다 아하, 늙은 아세아(亞細亞)의 산천에 이제 젊은 생명의 소리 들린다. 씩씩하게도 들린다. 오래 적적하던 우리 가슴속에도 새 세기(世紀) 동트는 나팔소리 들린다. 들린다 우렁차게 미영장송곡(米英葬送曲) (김동환 / <매일신보> 1942.1.13) 1 물러가라 쫓아내라 포악미영(暴惡米英)을 천리옥야(千里沃野) 비율빈도 동양것이요 석가나신 인도땅도 동양것이라 주인 두고 너희들은 왜 들어왔노 2 물러가라 쫓아내라 포악미영을 백여년을 아편위에 영화누리는 거만스런 홍콩총독 몰아내듯이 마래(馬來) 포와(布와) 인도총독 모두 내 치자. ('와'가 한문으로 없어요. --; ) 3 물러가라 쫓아내라 포악미영을 아세아의 땅위에 익어오르는 벼한폭 석유한알 다치게 말고 파나마 세즈운하 저쪽에 몰자 권군 취천명 (勸君 就天命) / 김동환 - 특별지원병에게 보내는 한 시인의 편지. (김동환 / <매일신보> 1943.11.6) 1 그대는 20대 우리는 40대 부자 이대 서로 나란히 서서 전장을 내닫세. 다만 오늘은 그대 선진(先進)되고 내일날 우리 뒤따르리 안 나서면 무얼 하나 못 쳐서 오륙 십 살면 무얼 하나 차라리 한두 해도 번듯하게 살아 버리지. 번듯하게 사는 길이란 - 제 목숨 나라에 바쳐, 나라가 그 생사 맡아주심일레 그러면 살 제는 후하게 따뜻하게 뜻같게 하여주시고 죽을 젠 그 자리 거룩하고 높게 꾸며주시네. 지금, 조국은 전쟁하는 때 살고 죽고를 더욱더 군국(軍國)에 바칠 때일세. 이인석 군은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도 병(兵)되어 생사를 나라에 바치지 않았던들 지금쯤 충청도 두메의 이름없는 농군이 되어 베옷에 조밥에 한평생 묻혀 지내었겠지. 웬걸, 지사, 군수가 그 무덤에 절하겠나. 웬걸, 폐백과 훈장이 그 제상에 내렸겠나. 2 그대 안 나가면 어떻게 되나- 변호사를 하겠지, 교사나 중역이 되겠지. 그러나 한편 남대문과 종로에 폭탄이 떨어지고 그대의 처자는 미영병(米英兵)에 모욕을 당하면 어떻게 하리. 이 일은 파리 대학생과 이태리 학도들이 먼저 모범을 보여주지 않았는가. '조국을 나아가 막지 않는 자엔 천벌이 내리느니라!' 또 그대가 안 나가고 이불을 쓰고 드러누울 수는 있겠나. 명춘(明春)엔 동생되는 중학생 수만이 징병으로 나서고 보국대로 좌우 친화(左右親和)가 괭이 들고 자꾸 나서고 소년들까지 징용공으로 공장에 나갈 적에 양심 있고 의리 있는 그대, 나가지 말란들 그리 될까. 어서 하루 급히 나서라, 벗이여, 학우여! 오오, 조선 동포의 대표여 꽃이여! 오오, 제국의 수재여, 빛[光]이여! 오오, 폐하의 고굉(股肱)이여, 나라의 기둥인 그대여! 부명(父命)을 받들고 어서 나서라! 군명(君命)을 받들고 어서 나서라! 때는 급하느니, 천명을 받들고 어서어서 나서시라. * 이 시에 등장하는 '이인석'은 최초의 지원병(실제로는 강제 모병) 전사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 다. 시의 내용을 살펴보면 지원병 '이인석'의 죽음을 찬양하고, 양심과 의리가 있는 청년이라면 당연 히 일왕(日王)의 명령을 아버지의 명령처럼 받들어 전쟁터에 나가야 한다고 선동하고 있다. 적국 항복 받고지고 (김동환 / <매일신보> 1944.1.6) 1 싸우고 또 싸우며 제 3년 들어서다 이날 아침 간절한 소원 두 가지 있아오라, 첫째는 올해에 '정국 항복' 꼭 받고 싶고 둘째는 우리 동포 모두 '지도민족(指導民族)' 되어지이다. 2 '적국 항복' 받기 위해 우리 피 더욱 흘려 흘린 피 되어요 승(升)에서 두(斗)요 석(石)으로 올리고저, 바치온 돈도 천 원이요 만 원에서 백만이요, 억천만 원으로 올리옵고저. 3 '지도민족' 되기 위해 우리 모두 무장하여 폐하의 주신 검(劍)으로 '조국일본 강토' 지키옵고저 또 우리 아이 모두 '의무교육' 받아 지혜롭고 백성들은 '연성(鍊成)' 받아 병농일여(兵農一如)에 달하옵고저. 4 아세아는 부(富)하고 크라, 올해부터 우리 모두 이 땅의 귀인(貴人)되고 지도자 되어지이다. 어서 이 흉적을 물리치고서 어서 우리 자체(自體)를 닦고 씻어서. 1945년 8·15 광복(을유 해방) 및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이광수, 최남선 등과 함께 국내 문 단의 대표적인 친일 인사로 꼽혀, 1948년 12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3개월 남짓 재 판을 받았고, 1949년 9월 21일 수요일, 시문학 작가 분야에서 은퇴한 후, 1950년 한국 전쟁 때 납북 되었다.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 참여했다. 그 후 평안북도 철산군의 노동자수용소에 송치 되었다가 1958년 3월 6일 목요일 이후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친일 작품으로는 지원병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한 이인석을 칭송하며 젊은이들에게 참전할 것을 촉구하 는 시 〈권군취천명(勸君就天命)〉(1943)을 비롯하여 총 23편이 밝혀져 있다. 이는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 수록자 가운데 5위에 해당하는 편수임에도, 창작 작업보다는 단체 활동을 통한 친일 행적이 더 뚜렷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흥아보국단, 조선임전보국단, 황군위문작가단, 조선문인협회, 국민총 력조선연맹, 국민동원총진회, 대화동맹, 대의당 등 많은 친일단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3 남인 김영식이 김동환의 친일 행적을 인정하고 사과한 예는 친일파로 지적되는 인물의 후손이 조상에 대한 친일 혐의를 인정한 드문 예로 종종 인용된다. *‘파인 김동환, 일제에 엎드려 ‘웃은 죄’ 이 풍진 세상에 / 친일문학 이야기 / by 낮달2018 2020. 12. 16. 서사시 ‘국경의 밤’과 ‘산 넘어 남촌에는’의 시인 김동환의 친일 부역 이 글은 2019년 5월에 출판된 단행본『부역자들-친일 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의 초고임. [관련 기사 : 30년 문학교사가 추적한 친일문인의 민낯] ▲ 파인 김동환(1901~?) 파인(巴人) 김동환(金東煥·白山靑樹, 1901~?)이라면 낯선가. 그럼 혹시 「북청 물장수」나 우리나라 최초의 서사시라는 「국경의 밤」을 기억하시는가. 그도 저도 아니면 「웃은 죄」라는 시는 어떤가. 시골 마을 우물가 처녀와 한 나그네 사이에 오간 미묘한 교감을 과감한 서사의 생략으로 그려낸 이 짧은 시는 여운이 꽤 길다. 지름길 묻길래 대답했지요. 물 한 모금 달라기에 샘물 떠 주고, 그러고는 인사하기 웃고 받었지요. 평양성에 해 안 뜬대두 난 모르오. 웃은 죄밖에, 그래도 기억이 아련하다면 「산 너머 남촌에는」이라는 대중가요를 기억하시는가. 1965년에 김동현이 작곡하고 ‘꾀꼬리’로 불린 가수 박재란이 부른 이 노래는 당시 크게 히트했다. 같은 시행의 반복과 토속적인 시어에다 7·5조 3음보의 율격이 매끈하게 목에 감겨오는 노래다. 그러나 이처럼 만만찮은 서정을 보여준 김동환은 조선인 최초의 지원병으로 1939년 6월 하순에 전사 한 이인석(李仁錫)을 찬양한 시를 통해 일본군 지원을 선동한 시인이기도 하다. 평범한 농민은 전사 를 통해서만 미천한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이인석을 본받아 이 땅의 젊은이들은 하루바삐 ‘영 광스러운 죽음의 길’로 뛰어들라고 독려한 것이다. 이인석 군은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도 병(兵) 되어 생사를 나라에 바치지 않았던들 지금쯤 충청도 두메의 이름 없는 농군이 되어 베옷에 조밥에 한평생 묻혀 지내었겠지 웬걸 지사, 군수가 그 무덤에 절하겠나 웬걸 폐백과 훈장이 그 제상에 내렸겠나. -「권군(勸君) ‘취천명(就天命)’」, <조선일보>(1943.11.7.) 김동환은 함경북도 경성 출신이다. 본명 김삼룡(金三龍)을 김동환으로 개명한 것은 1926년. 호는 파 인(巴人)·취공(鷲公), 필명은 김파인(金巴人)·초병정(草兵丁)·목병정(木兵丁)·석병정(石兵丁)· 화병정(火兵丁)·강북인(江北人)·강서산인(江西山人) 등을 썼다. 김동환은 1924년 5월 문예지 『금성』에 시 「적성(赤星)을 손가락질하며」로 등단했다. 이후 동아일 보, 시대일보, 조선일보 등에서 기자로 일했고, 1925년 3월 첫 시집이자 우리나라 현대시 사상 최초 의 장편 서사시 『국경의 밤』을 발간했다. 일본 유학 시절, 유학생들이 창립한 재일조선노동총동맹에서 중앙집행위원을 맡았던 그는 1925년 8월 부터 1928년 7월까지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서 활동했다. 1927년 1월 프롤레타리 아 연극단체인 불개미극단을 창단하기도 했다. ▲ 대중잡지 <삼천리>는 1930년대 중후반 이후 시국성을 드러내는 화보로 표지를 장식했다. 김동환은 1929년 6월 삼천리사를 만들어 종합월간지 『삼천리』를 창간했다. 1930년에는 신간회 중앙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2월에는 서대문경찰서에 검속되었다가 풀려났다. 김동환이 창간한 『삼천리』는 1930년대 중후반부터 체제에 순응하여 내선일체와 황민화 운동을 적극 선전하였는데 그의 친일도 이러한 출판 활동과 궤를 같이했다. 백산청수(白山靑樹:시라야마 아오키)로 창씨개명한 그는 ‘태백산의 푸른 나무[백산청수(白山靑樹)]’ 대신 ‘백산고사목(枯死木)’의 길로 나아갔다.(임종국) 김동인과 박영희 등이 선정되어 떠난 ‘북지 황 군 위문 문단사절’ 행사(1939)에 후보로 선출되었다가 탈락한 그는 이후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벌인다. 조선총독부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 결성에 발기인으로 참여해 출범 때 간사를 맡았고 뒤에 조선문 인협회 이사로 ‘전선 병사 위문대 보내기’ 행사를 주도했다. 1941년 10월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 報國團) 상무이사를 맡은 뒤 쓴 글은 자못 비장한 어조로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선동한다. 황군 장병 11만 명이 죽었는데 조선사람은 겨우 세 사람이 죽었고 국채 소화의 힘도 내지의 어느 1현 만도 같지 못하고 그 밖에 무엇무엇 모두 다 빈약하였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심히 부끄러 운 일이외다. 대체로 우리가 이번 성전에 참가하는 데 세 가지 단계를 밟아야 할 줄 압니다. 제1기는 사상전 즉 우 리 2400만 조선인이 다 황도 정신을 파악한 일본국민이 되는 일로, 이러하기 위하여는 우리들 일부에 종래 가지고 있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깨끗이 청산하고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서 내선일체의 길에 들어섭시다. 그런 뒤 제2기로서 우리는 우리가 가진 돈과 땀을 나라에 바칩시다. 돈으로 애국공채를 사고 전쟁에 필요한 놋그릇, 금, 동, 쌀을 바칩시다. 또 땀, 즉 노력을 바칩시다. 국가에서는 지금 지하자원의 개 발, 양미 증식을 위하여, 국민의 노력을 간절히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노력을 통하여 국책 에 협력합시다. 이렇게 국민정신을 통일하고 그런 뒤 노력과 물자와 돈을 바치고 그러고 난 뒤 할 일이 있습니다. 그 것은 피를 바치는 일이외다. 우리의 생명을 전장에 바쳐야 하겠습니다. 황군 장사 모양으로 총과 칼 을 메고 우리도 전장에 나아가 우리나라 일본제국을 방위하여야 할 것입니다. - 「임전보국단 결성에 제(際)하여」(일문), 『삼천리』(1941년 11월호) 1943년 8월부터 조선인 징병제가 시행되자 8월 7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시를 통해 일왕의 은혜에 감읍하면서 온 민족이 그 ‘님’의 앞으로 가자고 노래했다. 「출정하는 자제에게 주는 말」에서는 ‘이기지 못하거든 죽어서 돌아오라’고 강변하기도 했다. ▲ 김동환이 쓴 싱가포르 함락에 감격한 소감. <매일신보>(1942.2.20.) 5월 담장에 월계꽃 피듯 인제, 우리 자녀 송이송이 피오리다. 누가 감히 낮추어 보랴 님이 쓰실 이 소중한 몸을, 누가 감히 범하려 들랴 님이 부르실 이 거룩한 자녀를. 앞으로! 어서 앞으로! 우리 2천7백만, 님의 앞으로! -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매일신보>(1943.8.7.)에서 아들아 오늘 나아가거든 마지막까지 참고 버티어서 끝끝내 이기고 돌아오라. 이기지 못하겠거든 신던 신 한 짝이라도 이 아버지는 돌아오기를 원치 않는 줄 알아라. - 「출정하는 자제에게 주는 말」, 『신시대』(1944년 3월호) 사랑하는 병사여!맥추(麥秋) 익어가는 4백여 주(州) 넓은 벌엔 그대의 선배들이 우리의 명예와 신뢰를 짊어지고 지금 싸우고 있잖는가, 그 중에 두 분은 벌써 ‘호국의 충혼’이 되어서 정국(靖國:야스쿠니) 신사 신전 속에 고요히 누워 계시잖는가, 아직도 4년에 미치는 동아의 전화(戰火)는 끈칠 줄을 몰라서 백만의 요우(僚友)가 포첩(砲疊) 속에 분전하고 있거늘 어서 그대도 조련(操鍊)을 마쳐 나아가 군고(軍鼓)를 치라, 나아가 나팔을 불라. - 「1천 병사의 수풀(一千兵士の森)」, 『삼천리』(1940년 12월호) 동포를 침략전쟁에 동원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전쟁 상대국인 미국과 영국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여러 편의 글에서 미국과 영국의 침략성을 상기시켰고 이에 대립하는 일본 의 전쟁은 ‘침략’이 아닌 ‘해방’전쟁으로 묘사했다. 이 총 끝 닿는 곳, 진주만이요, 보르네오요, 적도 밑이며 이 총소리 들리는 곳, 비율빈(比律賓:필리핀)이요, 포왜(布哇:하와이), 인도 사람의 귀라 강적 영미의 심장 찌르려 한다 그 총자루 5억인가 10억인가, […중략…] 일본이여, 일본이여 나의 조국 일본이여 어머니여, 어머니여 아세아의 어머니 일본이여 주린 아이 배고파서, 벗은 아이 추워서 젖 달라고, 옷 달라고 10억의 아이 우나이다, 우나이다 - 「총, 1억 자루 나아간다」, 『삼천리』(1942년 1월호) 물러가라 쫓아내라 포악 미영을 천리 옥야(沃野) 비율빈도 동양 것이요 석가 신(神) 인도 땅도 동양 것이라 주인 두고 너희들은 왜 들어왔노 물러가라 쫓아내라 포악 미영을 백여 년을 아편 위에 영화 누리던 거만스런 홍콩 총독 몰아내듯이 마래(馬來 : 말레이시아) 포왜 인도 총독 모두 내치자 물러가라 쫓아내라 포악 미영을 아세아의 땅 위에 익어 오르는 벼 한 포기 석유 한 알 다치게 말고 파나마 수에즈 운하 저쪽에 몰자 - 「미영장송곡(米英葬送曲)」, <매일신보>(1942.1.13.) ▲ 김동환이 <삼천리>(1942.2.)에 발표한 전쟁시 '총1억자루’ 1942년 5월, 김동환이 창간한 잡지 『삼천리』는 제호를 『대동아』라 바꾸고 본격적으로 일제의 침 략전쟁을 지원·찬양하기 시작했다. 그는 개체호에 실은 「내외동포에 호소한다-본지 대동아로 개제, 재출발에 즈음하여」(內外同胞にふ訴-本誌大東亞と改題, 再出發に際して)에서 영미를 동아에서 완전 추방할 때까지 전진하기 위해 일체의 사심을 버리고 ‘야마토(大和) 정신’ 속으로 뛰어들어 최대의 양식과 희생을 바치자고 호소했다. 침략전쟁을 지원할 ‘총후(銃後:후방)’의 자세에 대해서 『대동아』에 발표한 「군복 깁는 각시네」 는 그가 쓴 친일 시의 백미(?)다. 이 시는 이른 봄 조선임전보국단 본부에 장안 각시들이 모여 조선 군사령부에서 가져온 해진 군복을 정성스레 깁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임금님 부르심이 내리자, 이내 일어나 만 리 전장에 내달아 이렇게 옷이 다 해질 철까지 싸운 것을, 싸우신 것을. 군복 입은 남편이 어떻게 빛나 보일까 사내 된 이 살아서 군복을 입고, 죽어 국기에 말려 묻힐 것을 조선의 여인도 인제는 전장에 달리는 젊은이에 꽃다발 드리노라, 치마폭에 한 아름 안아 드리려노라. - 「군복 깁는 각시네」, 『대동아』(1942년 5월호) 우리들은 겨우 일곱 수는 적으나 바위라도 치리라 하고 수저운 듯 손 들며 일어서는 7인의 청년 어찌 일곱이 적다 하리, 7백에서 줄고 줄어 오늘의 일곱됨이 아니고 그대들 이제 7천으로 7만으로 썩썩 늘어갈 그 일곱이 아니던가. (……) 임금님을 위해 싸움마당에 나아가 목숨 버릴 것을 이미 각오하고 나서는 그 양 미간 나는 거기서 불을 보았다, 큰 해를 보았다. - 「우리들은 7인」, 『대동아』(1942년 5월호) 김동환은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의 심사부장을 맡은 데 이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후신인 국민 총력조선연맹의 참사로 활동했다. 일제의 신체제 운동을 수행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은 1944년 2월에 보 도특별정신대를 결성하여 조선 각지의 대회에 보냈는데 김동환은 경상북도로 배정받아 활동했다. 그는 1944년 7월에는 일본어 논문 모음집 『조선 동포에게 고함(朝鮮同胞に告ぐ)』을 편찬하여 발간 했다. 이 책은 징병제·대동아전쟁·내선일체·전시 식량증산·징병제 하의 조선부인의 역할 문제 등 을 다루었는데 필자는 언론사 사장, 일본문학보국회원, 귀족원 의원 등으로 활동하는 일본인들이었 다. 마침내 김동환은 충실한 일제의 하수인 구실을 다하고 있었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자수, 셋째아들이 부친의 죄과를 사죄 해방 후, 1946년 2월 김동환은 조만식이 이끌던 조선민주당의 간부로 활동했다. 1948년에는 삼천리사 를 다시 열고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삼천리』를 복간, 1950년 6월까지 펴냈다. 김동환은 1949년 2월, 반민특위에 자수하여 수감되었다가 공민권 정지 5년을 선고받았다. 김동환은 구차한 궤변으로 자신의 친일행위를 변명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한국전쟁 중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 자수한 뒤 그는 행방불명되었다. 납북된 것으로 여겨지지만 이 후 행적은 밝혀진 것이 없다. 재혼한 소설가 최정희(1912~1990) 역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 렸으니 친일도 부창부수였던 걸까. 최정희와 낳은, 뒷날 소설가가 된 지원(1943~2013)과 채원(1946~ ), 두 딸이 있다 부친의 일대기를 펴낸 바 있는 파인의 셋째아들이 2002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연 학술심포지엄에서 ‘부친의 친일 죄과’를 민족 앞에 사죄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친일인사가 스스로 자신의 행위를 참회하는 예도 드물지만, 후손이 선대의 친일 행위를 사죄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파인의 삼남 김영식은 부친이 친일문인으로 지목된 것에 ‘아무런 이의가 없 다’며 역사적 평가에서 공과가 교차된 선친의 행적은 분명히 그 분야에서 일하는 후배들에게 교훈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경찰 총경으로 은퇴한 김영식은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의 후손들을 직접 만나 사죄하기도 했으며,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이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일제 말엽에 한때 저지른 치욕적인 친일행위를 뉘우치고 변절 고충을 고백하면서 ‘반역 의 죄인’임을 자처했던 바 있음을 되새겨보면서, 저는 가족을 대신하여 국가와 민족 앞에 깊이 머리 숙여 사죄합니다.” - 『아버지 파인 김동환-그의 생애와 문학』(국학자료원, 1994), ‘펴내는 말’에서 파인 김동환의 시 「웃은 죄」를 눈으로 거듭 읽어본다. 우물가 처녀에겐 나그네와 나눈 교감에 대해 서 ‘웃은 죄’밖에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시인이 자신의 나라와 민족을 부정하고 식민 지배에 투항 한 것은 어떤 변명으로도 용서받기 어렵다. 그는 그것을 알았기에 두 번에 걸쳐 자수를 감행한 것이 었을까. 꾀꼬리 가수 박재란의 목소리로 「산 너머 남촌에는」을 들으며, 파인이 노래했던 남촌은 어 디였을까를 무심히 생각해 본다. 2019. 05. 낮달 *‘"부친의 '친일 죄과' 민족 앞에 사죄" 김동환 3남 김영식씨 민족반역자처단협회 /【부일 후손 들은 지금】/ 2006.07.01 12:59 [민족반역사죄] "부친의 '친일 죄과' 민족 앞에 사죄" '친일문인' 파인 김동환 3남 김영식씨 "부친의 '친일 죄과' 민족 앞에 사죄" [인터뷰] '친일문인' 파인 김동환 3남 김영식씨 정운현 기자 jwh59@ohmynews.com ▲사진1- "부친의 '친일죄과'를 대신 사죄합니다" 파인 김동환의 3남인 김씨는 지난 94년 부친의 일 대기를 펴내면서 서문 말미에 부친의 친일행적에 대해 민족과 역사앞에 대신 사죄한다고 밝힌 바 있 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지난 14일 오전 여의도 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는 일제하 친일작가들의 명단과 작품목록 공개, 그리고 후배 문인들이 선배문인들의 어두운 과거사를 대신 반성하는 자리가 있었다. 친일인사 명단 공개는 지난 2월 28일 일단의 국회의원들이 708명의 명단을 공개한 데 이어 두번째다. 이어 이날 오후에는 역시 같은 장소에서 친일문제 전문 연구기관인 민족문제연구소(이사장 조문기) 추최로 학술심포지엄이 열렸다. 제목은 '강요된 부역인가, 내재된 신념인가'로, 내용은 문화예술계 친일인사들의 친일논리와 성격을 다룬 것이었다. 본 행사 직전 사회를 맡은 윤경로 한성대 교수는 이날 행사에 참석한 몇몇 저명인사들을 소개하고는 이어 한 초로의 인사를 소개했다. 그는 일반석도 아닌, 장내의 뒷편 마련된 임시의자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순간 참석자들의 시선이 모아졌다. 어찌보면 그는 이런 자리에 참석하는 것이 '부자연스런'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는 바로 오전에 그 자리에서 발표한 친일작가 42인 가운데 한 사람인 파 인 김동환의 아들 김영식(69)씨였다. 대체 친일파로 지목된 인사의 아들이 친일파를 지탄하는 자리를 제 발로 찾은 까닭은 무엇이며, 또 주최측이 그를 떳떳이 소개한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같은 의문에 대한 해답은 간단하다. 그는 선대 의, 즉 부친의 친일행위를 부친을 대신해 민족과 역사앞에 용서를 빈 사람이다. 그러니 그런 그가 그 자리에 동석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그는 지난 94년 부친의 일대기 <아버지 파인 김동환-그의 생애와 문학>을 펴내면서 '펴내는 말' 말미 에 이렇게 썼다. 아버지가 일제 말엽에 한 때 저지른 치욕적인 친일행위를 뉘우치고 변절고충을 고백하면서 '반역 의 죄인'임을 자처했던 바 있음을 되새겨 보면서, 저는 가족을 대신하여 국가와 민족 앞에 깊이 머 리 숙여 사죄합니다. 친일인사 가운데 해방후 자신의 친일죄과를 사죄한 사람이 없지 않다. 민족대표 33인중 1인으로 친일 로 변절했던 최린은 반민특위에 끌려와 눈물로 자신의 죄과를 사죄했으며, 일제때 전남도 광공부장 출신으로 제2공화국 때 국방장관을 지낸 현석호는 '한 삶의 고백'이라는 자선전을 통해 자신의 친일 행적을 뉘우친 바 있다. 또 일제말기 군수를 3년여 지낸 걸 두고 부끄럽다며 남들이 오해할 정도로 참회를 해오고 있는 전 홍익대 총장 이항녕씨도 당연히 이 대열에 설만한 사람이다. 이런 사례가 많 을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겨우 이 정도가 전부일 정도다. 대부분의 친일인사들은 말로, 더러는 자서 전이나 후학들이 쓴 일대기에서 글로 자신들의 친일행적을 변명하거나 심지어 미화, 왜곡, 은폐해 왔다. 자신의 죄과도 아닌, 선대의 죄과를 대신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기는 말만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쉽다면 아마 김씨와 같은 사례가 속출했을 것이나 김씨 전후로 아직 그런 사례는 확인되지 않고 있 다. 16일 그를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만나 최근의 심경, 근황 등을 들었다. - 지난 14일 민족문학작가회의 등에서 친일문인 42인의 명단과 작품목록을 공개했다. 그 속에 선친의 명단도 포함돼 있는데 심경이 어떤가? "새로운 사실도 아니고, 이미 내 자신이 수용한 내용이어서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날 제시된 아버 지의 친일작품은 40여건으로, 내가 찾아낸 52건에도 미치지 않는 수치다. 아버지는 반민특위 재판부 에서 실정법(반민법)으로 처벌을 받은 인물로, 죄상을 두고는 왈가왈부할 것이 전연 없다. 내 자신이 공개석상에서 부친의 친일행위를 사죄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아버지의 경우는 신문기자, 가곡작 사자로서는 공(功)이 크나 문인, 잡지인, 출판인으로서의 행적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그저께 학술세미나장에 갔더니 사회자가 뜻밖에 나를 인사를 시켜 미안한 마음으로 두 번이나 인사를 했다. 그분들이 왜 나를 소개했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참석자들이 나를 향해 항의를 하지 않았 는데 아마 내가 아버지의 친일죄과에 대해 사죄를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 부친을 친일문인으로 지목한 이번 결과에 대해 승복하는가? "아버지가 명단에 포함된 것에 대해 아무런 이의가 없다. 아버지는 반민법에 의해 처벌을 받은 사람 이다. 다만 친일문인을 가늠하는 잣대로 식민주의와 파시즘 옹호를 들이댄 것은 조금 이견이 있다. 그들의 친일행태를 '이즘', 즉 '주의'로만 판단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고 본다. 친일문제는 현시 점에서 역사적인 교훈의 사례로 이야기돼야 한다고 본다. 내 자신이 친일문제를 연구하는 민족문제연 구소의 회원이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며, 그래서 그날도 학술회의장을 찾은 것이다." ▲ 사진2-파인 김동환이 조선일보 총독부 출입기자 시절 총독부로 받은 촌지를 모아 창간한 잡지 <삼천리>. 이 잡지는 초창기 민족적 색채가 짙었으나 중일전쟁 이후 친일잡지로 돌아섰다. - 부친의 친일행적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첫째, 문인으로서 시와 평론을 통해서 50편 정도의 친일성 글을 썼다. 또 일제하 전시협력단체인 임 전보국단 출범의 산파역을 맡았으며, 조선문인협회 간사 등 친일단체에서 간부로 활동하기도 했다. 둘째, 잡지인으로서 1938년도 이후 친일 성향의 잡지인 <삼천리>, <대동아>를 발행했으며, 셋째, 출 판분야로 단행본 출간에서도 역시 같은 문제가 있었다. 전체적으로 3가지 분야에서 친일행적을 남겼 다고 본다.“ - 친일경력자 후손 가운데 유독 혼자 선대의 친일죄과를 사죄했는데 특별한 동기가 있었나? "93년 3월 모친이 돌아가신 후 누이동생(김영주·시인·캐나다 거주)과 함께 아버지의 행적을 기록으 로 정리해 보자고 의견일치를 보고서 아버지 관련자료를 수집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할 수 있다. 아 버지의 일대기는 그로부터 1년 뒤인 94년 11월 출간하게 됐는데, 자료수집 과정에서 아버지의 친일행 적이 담긴 자료도 같이 입수하게 됐다. 아버지의 친일행각을 대신 사죄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아버 지가 해방후 간행한 <꽃피는 한반도>라는 책에서 '반역의 죄인'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친일에 대해 사죄한 글을 보고 나서다. 아버지가 사죄한 이상 나도 역사와 민족 앞에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해 아버지 일대기를 펴낼 때 서문에 그 내용을 실었다" - 다른 친일경력자 후손들이 사죄하지 않는 이유는 뭐라고 보나? "남의 일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나는 내가 관련된 일만 상관한다. 잘 모르겠다." - 부친을 대신해 사죄를 했을 때 주위의 반응은 어땠나? 혹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나? "나를 잘 알고 아껴주시는 어떤 대학교수 한 분이 그런 일을 왜 했느냐고 따지듯이 말한 적이 있다. 그 분은 나의 사죄가 좋지 않은 선례가 될 수 있다, 꼭 그렇게 해야 되는 거냐고 지적하기도 했다. 친일파에 대한 잣대 자체가 분명하게 서 있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사람에게 오해받을 수 있다는 것이 었다. 그러나 나는 부친이 실정법으로 처벌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거기에 관해서 아무런 의의가 없 다고 봤다." ▲ 사진3-<삼천리>를 발행하던 당시의 파인 김동환과 문인들. 왼쪽부터 춘원 이광수, 이선희, 모윤 숙, 최정희, 그리고 파인. 최정희와 파인은 한 때 동거했었다. - 이번에 발개된 친일문인 명단 작성은 적절하다고 보는가? "문학인 분야는 상세하게 자료가 분석이 되어서 불만이 없다. 해방전에 우리 나라에서 알려진 문인이 50여명이었는데 이번에 친일문인으로 지목돼 발표된 사람의 숫자가 42명이다. 친일성이 극히 경미하 거나 작품이 하나밖에 안돼 이번 명단에서 제외된 정지용, 김정한, 김사량 등 몇몇을 포함하면 대부 분의 문인들이 친일을 한 셈이다. 항일시인이랄 수 있는 윤동주, 이육사, 이상화 등 겨우 몇 사람이 빠지는 셈이다. 이것은 언젠가 누구의 손에서라도 밝혀지게 되는 사안이다. 문학분야에 비해 다른 분 야는 상대적으로 연구가 미진하다고 본다." - 14일 장철 광복회장이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친일파는 다 죽고 후손만 남았으니 이제 (친일 파를)용서하자고 했는데, 이같은 견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도 그 내용을 봤다. 그 내용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강하게 반발한 것으로 안다. 친일파 청산 문제에 대해 의견이 다를 수는 있다고 본다. 그러나 광복회 회장이 '친일파청산 중단론'을 주장하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은가. 광복회 내부에서 그런 얘기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 이 그런 이야기를 할 경우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공(功)이 있을 경우 과(過)가 상쇄될 수 있다고 보는가? "이율배반적인 얘기가 되겠는데, 잘 된건 잘된 것이고 잘못된 건 잘못된 것이다. 따로 생각해야한다. 공이 있다고 과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 흔히 공과론을 거론할 때 자주 거명되는 김성수와 김활란에 대한 그동안의 평가는 제대로 돼 왔다 고 보는가? "나는 아버지 것만 관심이 있다. 다른 사람 것은 잘 모르고, 또 설령 안다고 해도 말하기 곤란하다." - 우리사회에 민족정기는 반듯하게 세워져 있다고 보는가? "민족이 존재하는 한은 민족정기가 바르게 서고 전승이 되어야 한다. 다만 시대상황에 따라 그것이 조금 가려질 때도 있다고 본다. 친일문제 연구가 본격 시작된 지 10여년이 지났지만 그런 노력에 비 해서 역작용이 오히려 강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언젠가 서강대에서 친일파 모의재판이 열려 보러 간 적이 있다. 행사 전에는 행사알림 기사가 나왔는데 정작 대상자 10명이 모두 사형판결을 받은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곳에서도 보도하지 않았다. 다루기 어려운 사안이었는지 빈 메아리일 뿐이었다. 신문이 이같은 사안을 다뤄야 한다고 본다." - 그간 언론의 친일문제 보도가 미약했다는 얘긴가? "종합적으로 판단해 얘기하기는 어렵지만 신문보도가 좀 의아한 경우가 더러 있었다. 사전에 행사소 개는 보도해놓고 그 결과를 보도하지 않는다면 그 보도태도는 납득하기 어렵다. 친일문제와 같은 주 제가 언론에서 소외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부친과 관련된 자료를 오랫동안 수집해 왔는데, 그 과정에서 특별히 기억할만한 일이 있다면. "지난 93년 어머니(신원혜)가 작고하신 후 아버지 관련기록을 모으기 시작한 지 근 10년이 돼 간다. 아버지의 친일자료를 접하면서 언젠가 가진 의문은 대체 부친이 어떤 이유로 친일의 길로 들어섰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차에 모 대학교수를 통해 그가 국회도서관에서 아버지가 반민특위에 잡혀와서 쓴 '자술서'를 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 교수에게 여러 차례 자료를 좀 보여달라고 부탁했으 나 자기 논문에 먼저 사용한 뒤 보여주겠다니 몇 년이 지났으나 아직도 보여주지 않고 있다. ▲ 사진4-김씨의 부친 파인 김동환이 자신이 친일한 이유를 "잡지를 위해"라고 보도한 <평화일보> 기 사(1949.5.8) 늘 아버지의 친일변절 이유가 궁금했는데 최근에 그 해답을 찾았다. 금년 5월쯤에 한 자료수집가가 1949년도에 발행된 신문들을 내게 보여준 적이 있는데 거기서 1949년 당시 반민특위서 재판을 받고 있던 아버지 관련 기사를 발견했다. 그 기사에서 아버지는 자신은 잡지를 지키기 위해 친일을 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나와 있었다. 아버지는 시인이자 기자출신이지만 <삼천리> 창간 이후 잡지에 미쳐 있 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지난해 부친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를 한 것으로 안다. 지금 돌아보면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나, 또 자식으로서 어떤 정을 느끼는가? "지난해 파인탄생 100주년행사는 총 7회의 행사를 가졌는데 많은 분들의 은혜를 입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감사드린다. 아버지는 공인이었기 때문에 탄생100주년 행사도 공인으로서의 모습을 부각시 켜 행사를 진행했다. 따라서 아버지의 어두운 면도 당연히 드러냈다. 올 9월 100주년행사 기념 자료 집을 내는데 여기에는 아버지의 모든 것이 수록된다. 30여 편의 논문, 평론, 언론의 보도기사 등 파 인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돌이켜보면 사적으로 아버지는 대단히 노력가였던 것 같다. 아버지는 초기에는 분명 민족지사의 풍모 와 올바른 역사관을 가진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 시국순응이다 시 류편승이다 해서 결국은 친일변절의 길로 들어선 셈이다. 이런 형태로 친일대열에 끼여 잡지를 만들 다가 43년 3월에 잡지가 막을 내리면서 뜻한 바를 이루지도 못하고 결국 하루아침에 몰락한 그런 분 이다. 역사적 평가에서 공과가 교차된 아버지의 행적은 분명히 그 분야에서 일하는 후배들에게 교훈 이 될 것이다. 잘 한 것은 잘 한대로, 못한 것은 못한대로." 김영식씨는 어떤 인물? 파인 김동환의 3남 김영식 씨는 1933년 서울출생으로, 경복고,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30여년간 내무부, 청와대 비서실, 주불대사관 등에서 경찰공무원(최종계급은 총경)으로 근무하다 92년 정년퇴 직했다. 93년 모친의 타계를 계기로 부친의 행적에 관한 자료을 수집, 이듬해 ”아버지 파인 김동환-그의 생 애와 문학“을 펴냈는데 고서적상, 고서수집가 사회에서는 '꾼'이자 '효자'로 소문나 있다. 그는 부 친 관련 자료라면 전국을 찾아 다니면서 자료를 수집해 왔으며, 이 과정에서 웬만한 연구자 뺨칠 정 도로 역사·문학 분야에 폭넓은 식견을 갖추었다. 10년 가까이 모은 자료를 토대로 그는 지난 95년 <파인 김동환 전집>(전5권), <삼천리 영인본>(전 32 권)을 펴낸 데 이어, 98년에는 <파인 김동환 문학연구>(전 30권)를, 2000년에는 ”언론인 파인 김동 환 연구-신문기자. 잡지인“(전 15권)을, 그리고 지난해에는 부친과 부친의 동거인 소설가 최정희씨 가 보관해온 서한을 묶어 <작고문인 48인의 육필서한집>(영인본, 도록)을 펴냈다. 김씨가 펴낸 파인 관련 자료집들은 파인과 문학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지난해 파인 탄생100주년을 맞아 그는 시화전, 가곡의밤, 자료전 등 총 7개 분야에서 다채로운 행사 를 펼쳤는데 주변에서는 "일개인이 할 수 없는, 초인적인 행사를 치렀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는 6.25때 납북된 부친의 '최후'를 확인하기 위해 어서 빨리 통일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 정운현 기자 2002/08/17 오후 4:07 산너머 남촌에는 / 박재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