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아름다운 문학

<신석정> 아직촛불을/임께서부르시면/봄을부르는/지도/망향의노래

이름없는풀뿌리 2023. 10. 19. 05:45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 신석정 / <조선일보> (1933) -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 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 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 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 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 합니다. 언덕에서는 우리의 어린 양들이 낡은 녹색 침대에 누워서 남은 햇볕을 즐기느라고 돌아오지 않고 조용한 호수 위에는 인제야 저녁 안개가 자욱히 나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늙은 산의 고요히 명상하는 얼굴이 멀어가지 않고 머언 숲에서는 밤이 끌고 오는 그 검은 치맛자락이 발길에 스치는 발자국 소리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멀리 있는 기인 둑을 거쳐서 들려오는 물결소리도 차츰차츰 멀어 갑니다. 그것은 늦은 가을부터 우리 전원을 방문하는 까마귀들이 바람을 데리고 멀리 가 버린 까닭이겠습니다. 시방 어머니의 등에서는 어머니의 콧노래 섞인 자장가를 듣고 싶어하는 애기의 잠덧이 있습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인제야 저 숲 너머 하늘에 작은 별이 하나 나오지 않았습니까? * 작품해설 : 신석정의 시 세계는 목가적 전원의 서정이 안식과 생명의 모체인 어머니와 결합되어 이 상향을 동경하는 것으로 표출된다. 이 작품도 「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와 같이 자연의 순수한 아름 다움을 통하여 이상향을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작품의 전체적 구조는 단순하지만, ‘불의’, ‘악’,‘고난’의 현실을 상징하는 ‘밤’과 ‘진실,‘신’,‘자유’,‘평화’를 상징하는 ‘촛불’, ‘새 새끼’,‘어린 양’을 대립시켜 이상향에 대한 갈망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또한 저물녘의 황혼에 인위적인 것[촛불]이 가미됨으로써 아름다움이 훼손될 것을 두려워하는 시인의 여리고 순결한 감정이 ‘어머니,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의 반복을 통해 간절히 나타나고 있다. 따라 서 ‘어머니’는 특별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기보다는 호소의 시형이 자연스레 갖게 되는 정신적 위 안자로서의 어머니이고, ‘촛불’은 어둠을 위한 광명이나 희생과 같은 긍정적, 적극적 개념이 아니 라 인위적, 작위적인 유한한 광명이다. 각 연의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연은 황혼녘의 아름다움, 둘째 연은 황혼녘의 물상(物像)에 대해 시 적 자아가 갖는 새로운 인식, 셋째 연은 어머니의 품속같이 포근한 이상향에의 동경을 표현하고 있 다. 생명의 요람이요, 구원(久遠)한 그리움의 대상인 어머니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자기의 꿈을 들려 드리는 아들의 이야기 형식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을 통하여, 우리는 시인의 자연에 대한 무한한 경애 심을 느낄 수 있다. 임께서 부르시면 - 신석정 / <동광24호> (1931.8) -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 호수(湖水)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말없이 재 넘는 초승달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 포근히 풀린 봄 하늘 아래 굽이굽이 하늘 가에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 파란 하늘에 백로(白鷺)가 노래하고 이른 봄 잔디밭에 스며드는 햇볓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 * 작품해설 : 외형상 지극히 단순해 보이는 작품이다. 모두 4연으로 되어 잇는 이 작품은 각 연마다 '그렇게 가오리다 / 임께서 부르시면…'이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임을 향해 가는 나의 모습이 각각 '은행잎, 초승달, 물, 햇볓'과 직유로 연결되어 있다. 특별히 어려운 시적 기교를 사용하거나 심오한 사상을 드러내 보이는 것 같지도 않다. 시적자아를 나타내는 보조관념으로 사용된 시어들은 모두 자 연적 소재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더구나 그 자연적 소재들이 보여주는 움직임이 자연스럽기 이를 데 없다. 예컨대 '호수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 말없이 재 넘는 초승달처럼'이라는 표현이 학생들로 하여금 호수에 안개가 끼어서 자욱한 것과 초승달이 재를 넘어가는 두 가지 현상을 필연적으로 연결 되어 있는 것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이 둘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음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이 시는 동일한 통사적 구조의 반복을 통해 안정감을 획득함으로써, 시인의 감정이 흐트러지는 것을 효과적으로 방지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신석정 문학의 중요한 특징 중 의 하나인 경어체의 사용인데, 시적 자아의 정서를 경어체 속에 실어 표출함으로써, 시인의 임을 향 한 태도가 지닌 진지함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고, 이러한 진지함은 이 작품을 자칫 감상에 빠질 위험으로부터 구해 준다고 할 수 있다. 봄을 부르는 자는 누구냐 - 신석정 / 『신석정 전집』1, 119‒120쪽(1939. 12) - 봄은 푸른 수레를 타고 바다 건너 머언 산맥을 넘어서 어느 삼림에 투숙을 했다가는 기어코 언덕길을 돌아오리라고 한다 ​ 아침에도 나리꽃같이 흰 안개가 걷기 전부터 사람들은 언덕길에서 만날 때마다 푸른 봄이 오리라는 즐거운 이야기를 했건만, 헤어질 때마다 전설같이 믿을 수 없는 제 자신들의 슬픈 이야기에 목메어 울었다 그 중 어떤 젊은 친구는 말하기를 봄은 지구에서 아주 자취를 감추었으리라고 단념을 하기 도 하였다 또 어떤 친구는 말하기를 봄은 어느 아득한 성좌로 멀리 떠나버렸다고도 하였다 ​ 그러면서도 그들은 봄은 어느 성좌에서 다시 오지 않나 하고 모조리 전설 같은 이야기를 부 질없이 소곤대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옥같이 흰 白梅가 핀다기로서니 이미 계절이 떠나 간 이 빈 지구에 봄이 온다는 이야기를 믿을 수야 있겠느냐고 제각기 만나는 대로 심장을 앓았다 ​ 푸른 계절을 잃어버린 이 몹쓸 지구에 서서 도시 봄을 부르는 자는 누구냐 지도(地圖) - 신석정 / 『신석정 전집』1, 103쪽(『시건설』7, 1939. 10) - 지도에서는 푸른 것을 바다라 하였고 얼룩덜룩한 것을 육지라 부르는 습관을 길러 왔단다. ​ 이제까지 국경이 있어 본 일이 없다는 저 하늘을 닮아서 바다는 한결로 푸르고​ ​ 육지가 석류껍질처럼 울긋불긋한 것은 오로지 색채를 즐긴다는 단조한 이유가 아니란다.​ 오늘 펴보는 이 지도에는 조선과 인도가 왜 이리 많으냐? 시방 나는 똥그란 지구가 유성처럼 화려히 떨어져 갈 날을 생각하는 '외로움'이 있다. 도시 지구는 한 덩이 푸른 석류였으니..... 망향의 노래 - 신석정 - 한 이파리 또 한 이파리 시나브로 지는 지치도록 흰 복사꽃을 꽃잎마다 지는 꽃잎마다 곱다랗게 자꾸만 감기는 서러운 서러운 연륜을 ​ 늙으신 아버지의 기침소리랑 곤때 가신 지 오랜 아내랑 어리디어린 손자랑 사는 곳 버리고 온 '생활'이며 나의 벅차던 청춘이 아직도 되살아 있는 고향인 성만싶어 밤을 새운다. 평생‘지재고산유수志在高山流水’가 좌우명이었던 비사벌초사 정원에서의 서수적 외모의 석정 시인.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 시낭송 오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