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아름다운 문학

<신석정> 어느지류에서서 / 전아사 / 꽃덤불 / 등불 / 대바람소리

이름없는풀뿌리 2023. 10. 20. 04:55
어느 지류(支流)에 서서 - 신석정 /『문장』, 1941.3 - 강물이 아래로 강물이 아래로 한 줄기 어두운 이 강물 아래로 검은 밤이 흐른다 은하수가 흐른다 낡은 밤에 숨 막히는 나도 흐르고 은하수에 빠진 푸른 별이 흐른다 강물 아래로 강물 아래로 못 견디게 어두운 이 강물 아래로 빛나는 태양이 다다를 무렵 이 강물 어느 지류에 조각처럼 서서 나는 다시 푸른 하늘을 우러러 보리...... 전아사(餞迓詞) - 신석정 / 시집 『산의 서곡』, 1967 - 포옹(抱擁)할 꽃 한 송이 없는 세월을 얼룩진 역사(歷史)의 찢긴 자락에 매달려 그대로 소스라쳐 통곡하기에는 머언 먼 가슴 아래 깊은 계단(階段)에 도사린 나의 젊음이 스스러워 멈춰 선다. 좌표(座標) 없는 대낮이 밤보다 어둔 속을 어디서 음악(音樂) 같은 가녀린 소리 철 그른 가을비가 스쳐 가며 흐느끼는 소리 조국(祖國)의 아득한 햇무리를 타고 오는 소리 또는 목마르게 그리운 너의 목소리 그런 메아리 속에 나를 묻어도 보지만, 연이어 달려오는 인자한 얼굴들이 있어 너그럽고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고 두 손 벌려 차가운 가슴을 어루만지다간 핏발 선 노한 눈망울로 하여 다시 나를 질책(叱責)함은 아아, 어인 지혜(智慧)의 빛나심이뇨! 당신의 거룩한 목소리가 내 귓전에 있는 한 귓전에서 파도처럼 멀리 부서지는 한, 이웃할 별도 가고, 소리 없이 가고 어둠이 황하(黃河)처럼 범람할지라도 좋다 얼룩진 역사에 만가(輓歌)를 보내고 참한 노래와 새벽을 잉태(孕胎)한 함성(喊聲)으로 다시 억만(億萬) 별을 불러 사탄의 가슴에 창(槍)을 겨누리라 새벽 종(鐘)이 울 때까지 창을 겨누리라. * 스스러워 : 수줍고 부끄러워 * 만가 : 상엿소리 * 작품해설 : 신석정은 첫 시집 『촛불』(1939)에서 식미 치하의 어둠과 절망의 시대 상황 속에서 어 머니에 대해 느끼는 고립감과 낙원에 대한 동경(憧憬)을 노래하다가, 『슬픈 목가』(1947)에서는 이 러한 꿈들이 불가능함을 깨닫고는 목가적인 시풍으로 삭막한 현실과 대면한다. 해방기와 6.25의 격랑 (激浪)을 거치면서 신석정 시의 여성적 정조(情調)의 화자드은 남성적인 기개(氣槪)로써 역사와 현실 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부정을 깨우치려는 저항의 목소리를 드러내는데, 『빙하』(1956)와 『산의 서 곡』(1967) 등의 작품집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 시는 관념적인 내용이라 쉽게 이해되지 않는 작품이지만, 감상의 실마리는 바로 제목 ‘전아사’ 에 있다. ‘전아사’의 ‘전(餞)’은 보내다의 뜻이며, ‘아(迓)’는 맞이하다는 뜻이다. 즉 ‘송구 영신(送舊迎新)’이 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시인이 보내려고 하는 것은 밤이며, 맞이하려고 하는 것 은 새벽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포옹할 꽃 한 송이 없는 세월’을 살아온 시인이 ‘밤’으로 표상 된 고난의 역사를 보내고, ‘새벽’으로 표상된 새 역사를 맞이하겠다는 현실 극복 의지를 남성적 어 조로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시인이 처해 있는 현실 공간은 ‘좌표 없는 대낮’으로, 밤보다 어두운 상황이다. 통곡을 하 기에도 스스러운 상황 속에서 그는 음악과도 같이 가녀린, 가을비와도 같이 흐느끼는, 아득한 햇무리 를 타고 오는 것 같은, 목마르게 그리던 그리운 목소리를 듣고 달려오는 ‘당신’의 모습을 발견한 다. ‘당신’은 인자한 얼굴과 환한 웃음으로 다가와 시인의 차가운 가슴을 어루만져 주는 한편, 빛 나는 지혜의 눈으로 꾸짖어 주면서 좌표를 잃고 시대의 어둠 속을 헤매던 시인을 깨어나게 한다. 마침내 시인은 ‘당신의 거룩한 목소리가 / 내 귓전에 있는 한 / 귓전에서 파도처럼 멀리 부서지는 한’, 이 세상을 어둡게 만든 ‘사탄의 가슴에 창을 겨누’고 그것과 맞서 싸우겠다고 하면서 얼룩진 역사에 종언을 고하고 새벽을 맞이하겠다는 의지를 다짐한다. 이렇듯 이 시는 일제 치하라는 암흑의 긴 세월을 지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지럽기만 한 1960년대 초 조국의 현실 상황을 바라보는 시인의 역사 인식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꽃덤불 - 신석정 / <신문학> (1946) - 태양을 의논하는 거룩한 이야기는 항상 태양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하였다. 달빛이 흡사 비 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우리는 헐어진 성터를 헤매이면서 언제 참으로 그 언제 우리 하늘에 오롯한 태양을 모시겠느냐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가슴을 쥐어뜯지 않았느냐?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 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 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 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 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여섯 해가 지나갔다. 다시 우러러보는 이 하늘에 그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오는 봄엔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그 어느 언덕 꽃덤불에 아늑히 안겨보리라. * 작품해설 : 이 시는 식민지 시대의 고통스러웠던 체험을 바탕으로 창작된 자품이다. ‘어둠’과 ‘광명’이라는 대립적 이미지를 주축으로 하여 조국 광복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조국을 상실한 식민지시대는 ‘태양’이 없는 암흑기였으므로 ‘태양’은 곧 조국의 해방을 상징한다. 1연은 일제 치라에서의 지하 독립 투쟁을 개괄적으로 보여 주는 한편, 2연은 식민지의 어두운 시대를 회상하는 내용이다. ‘달빛이 흡사 비 오듯 쏟아지는 밤’이라도 그것이 밤인 한, 어둠이고 암흑을 수밖에 없기에 ‘우리는 헐어진 성터를 헤미이면서’ ‘가슴을 쥐어뜯으며’ 조국 해방을 갈망하였던 것이다. ‘헐어진 성터’는 국권 상실의 비극을 은유하고 있으며, 반복법으로 국권 회복을 간절히 바 라는 심경을 강조하고 있다. 3연은 애국 투사의 죽음과 방랑, 변절과 전향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반복적 운율로 토로하고 있다. 이와 함께, 그들의 죽음과 방랑에 가슴 아파하는 동시에, 일제에 국복 하거나 타협한 이들에 대해선 뜨거운 민족애로 감싸 주려는 시인의 따스람이 느껴진다. 4연에서는 마 침내 오랜 고통 끝에 잃어버린 태양을 되찾았지만, 새로운 민족 국가를 아직 수립하지 못한 채, 좌, 우익의 이념 갈들으로 인해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찬’ 혼란스러운 정국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 준 다. 마지막 5연에서 시인은 근심스런 시선으로 불안한 시대 상황을 바라보면서, 이러한 혼란과 갈등 을 모두 극복한 후 이루어 낼 하나의 조화로운 민족 국가 건설에의 벅찬 기대감을 ‘분수처럼 쏟아지 는 태양을 안고 / 꽃덤불에 아늑히 안기는’ 것으로 표현한다. 그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태양을 오롯이 되찾는 것이라고 시인은 굳게 믿오 있는 것이다. 신석정은 이 시에서 보듯, 우익 진영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당대의 정치적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민족 국가 건설이라는 새로운 민족사적 과제에 부응하는 시를 창작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과거 ‘시 문학파’ 시절의 긴장도(緊張度)와 서정성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미덕을 보여 주고 있는 바, 이 외에 도 「삼대」 · 「움직이는 네 초상화」 등 다수의 작품이 그러하다. 등불 - 전북매일 창간 2주년 기념시 / 신석정 / 유고집 <내 노래하고 싶은 것은> 중에서 - 비바람 부는 속을 총총히 걸어왔느니라. 눈보라 치는 속을 견디고 걸어왔느니라. 그러나 비바람 속에서도 눈보라 속에서도 항상 우리들의 꿈과 생시는 빛나는 설계를 도모하여 왔거늘 차라리 孤高(고고)한 우리들의 의지는 저 명멸하는 계단에서도 꺼질 줄 모르는 등불이었노라 라일락꽃이 무더기로 피던 날에도 모란꽃잎으로 뜨거운 가슴을 문지르던 날에도 다 타지 못한 사연이사 가쁜 숨결을 안고 서서 하늬바람에 묻어오는 봄을 기다리며 살아왔노라. 아예 초라한 지난 날일랑 돌아볼 겨를도 갖지 말라! 인젠 벅차는 전진의 궁리를 위하여 다만 가슴을 태울 뿐이로다. 대바람 소리 - 신석정 / 시집 『대바람 소리』, 1970 - 대바람 소리 들리더니 소소(蕭蕭)한 대바람 소리 창을 흔들더니 소설(小雪) 지낸 하늘을 눈 머금은 구름이 가고 오는지 미당이에 가끔 그늘이 진다. 국화 향기 흔들리는 좁은 서실(書室)을 무료히 거닐다 앉았다, 누웠다 잠들다 깨어 보면 그저 그럴 날을 눈에 들어오는 병풍의 ‘낙지론(樂志論)’을 읽어도 보고 ...... 그렇다! 아무리 쪼들리고 웅숭그릴지언정 『어찌 제왕의 문에 듦을 부러워하랴』 대바람 타고 들려오는 머언 거문고 소리...... * 소소한 : (바람이나 빗소리가) 쓸쓸한 * 소설 : 이십사절기의 하나. 입동과 대설 사이에 들며. 11월 22일이나 23일경이다. * 무료히 : 흥미 있는 일이 없어 심심하게 * 작품해설 : 신석정은 1931년 『시문학』을 통해 등단하면서부터 『백조』로 대표되는 1920년대의 퇴폐적 낭만주의 시에 대해 반발하여 감정의 절제, 운율적 요소, 이미지를 중시하는 서정시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다. 그는 절대적인 존재의 공간인 동경의 나라를 향한 희구를 어린이의 천진스러운 시선으로 그려낸 첫 시집 『촛불』을 통해 전원시인 · 목가시인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두 번 째 시집 『슬픈 목가』에서는 첫 시집에서 보여 준 바 있는 모성(母性)에 기댄 유아적, 퇴영적 자아 의 모습은 줄어든다. 그 대신 성숙한 현실의 눈으로 돌아오게 됨으로써 이상향에 대한 천진난만한 그 의 희구는 상실감으로 바뀌게 되고 내적 체험의 결여로 인한 공허감이 나타나게된다. 그 후 『빙하』 와 『산의 서곡』에 이르러는 삶의 체험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게 됨으로써 고난의 역사 체험 속에서 성장한 예리한 현실 인식이 구체화되면서 주제의식이 문학적 심미성을 선행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시집인 『대바람 소리』에서는 다시 초기 시의 서정시 세계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 시는 서정의 세계로 다시 회귀한 그가 관조의 시작 태도로 직조해 낸 ‘유교적 은둔의 노래’로 대나무의 곧은 기상과 굳은 절개를 시 정신의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시에서 화자는 대를 흔드는 바 람과 댓잎이 서로 부딪는 소리를 들으며 망중한(忙中閑)을 즐기고 있다. 이러한 화자의 세속을 초월 한 듯한 선비의 기질은 ‘어찌 제왕의 문에 듦을 부러워하려’라는 넉넉한 자세에서 잘 나타난다. “신석정은 적극적으로 현실을 개조하겨는 지사(志士)로서의 기질은 아니지만, 멍든 역사와 얼룩진 현실을 거부하려는 선비적 기질을 가진 시인이었다”라는 평가와도 같이, 이 시는 역사의 현장에서 한발 뒤로 물러선 신석정의 조용하고 차분한 관조적 자세를 잘 보여 주고 있다. □ 한국 신석정 시낭송협회 https://cafe.daum.net/magnolia0815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시를 주로 썼다고 평가되는 시인 신석정(왼쪽)은 1943년 서정주(徐廷柱, 1915~2000) 에게 〈흑석고개로 보내는 시〉를 '정주에게'라는 부제를 달아 보낸다. 이때 신석정은 전북 부안에 살고 있 었고, 부안 바로 옆 고창이 고향이었던 서정주는 1942년 아버지 장례를 치른 후 가산을 정리해 한강변 흑 석정의 기와집으로 이사와 살고 있었다. 서정주는 흑석동으로 이사한 직후부터 일제의 대동아공영권 논리를 수용하고 전파하는 친일문학에 이미 빠져들기 시작했다. 신석정이 이 시를 쓴 이유도 고향 후배 서정주의 이런 변화를 감지하고 염려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이 시는 해방 이후 펴낸 시집 《슬픈 목가》(오른쪽)에 실렸다. 흑석(黑石)고개로 보내는 시 신석정 / - 정주(廷柱)에게 흑석고개는 어늬 드메 산골인가 서울서도 한강 한강 건너 산을 넘어가야 한다드고 좀착한 키에 얼굴이 까무잡잡하여 유달리 희게 들어나는 네 이빨이 오늘은 선연히 보이는구나 눈 오는 겨울밤 피비린내 나는 네 시를 읽으며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는 청년 그 청년이 바로 우리 고을에 있다 정주여 나 또한 흰 복사꽃 지듯 곱게 죽어갈 수도 없거늘 이 어둔 하늘을 무릅쓴 채 너와 같이 살으리라 나 또한 징글징글하게 살아보리라 - 1943 짓고, 1947년 대지사(大志社)에서 펴낸 시집 《슬픈 목가》에 실음. 未堂과 夕汀의 고향인 고창과 부안은 지근거리였으며 간혹 교류하는 사이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志操와 사랑을 신념으로하는 석정과 時流에 편승했던 미당은 밟아간 길이 확연히 달라지게 된다. 평생‘지재고산유수志在高山流水’가 좌우명이었던 비사벌초사 정원에서의 서수적 외모의 석정 시인. [특집다큐]시인의 시대,신석정 / JTV전주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