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 박형준 /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창비 / 2002년 04월 -
오리떼가 헤엄치고 있다.
그녀의 맨발을 어루만져 주고 싶다.
홍조가 도는 그녀의 맨발,
실뱀이 호수를 건너듯 간질여 주고 싶다.
날개를 접고 호수위에 떠 있는 오리떼.
맷돌보다 무겁게 가라앉는 저녁해.
우리는 풀밭에 앉아있다.
산 너머로 뒤늦게 날아온 한 떼의 오리들이
붉게 물든 날개를 호수에 처박았다.
들풀보다 낮게 흔들리는 그녀의 맨발,
두 다리를 맞부딪히면
새처럼 날아갈 것 같기만 한.
해가 지는 속도보다 빨리
어둠이 깔리는 풀밭.
벗은 맨발을 하늘에 띄우고 흔들리는 흰 풀꽃들,
나는 가만히 어둠속에서 날개를 퍼득여
오리처럼 한번 날아보고 싶다.
뒤뚱거리며 쫓아가는 못난 오리,
오래 전에
나는 그녀의 눈 속에
힘겹게 떠 있었으나.
장롱 이야기
- 박형준 /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1994) -
나는 장롱 속에서 깜박 잠이 들곤 했다.
장에서는 항상 학이 날아갔다.
가마를 타고 죽은 할머니가 죽산에서 시집오고 있었다.
물 위의 집을 스치듯 ―
뻗는 학의 다리가 밤새워 데려다 주곤 했다.
신방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오동나무 장롱처럼, 할머니는
― 잎들이 자개붙이에 비로소 처음의 물소리로 빛을 흔들었고,
차곡차곡 할아버지의 손길을 개어 넣고 있었다.
나는 바닥 없는 잠 속을 날아다녔다.
그리운 죽은 할머니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고추가 간지러워 천천히 깨어날 때,
마지막으로 힘찬 울음소리와 함께 장롱에서 ―
학의 길고 긴 다리가 물 위의 집으로 돌아가는 소리를 듣곤 했다.
* 박형준(1966~ )
박형준, 시인, 대학교수
출생 : 1966. 전라북도 정읍
소속 : 동국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교수
학력 : 명지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 박사
데뷔 :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가구(家具)의 힘' 등단
수상 : 2020년 제7회 풀꽃문학상 대숲상
시인 박형준은 1966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서울예대를 졸업하고 현재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에 재학중이다.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家具의 힘」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
집으로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1994)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물 속까지 잎사
귀가 피어 있다』(2002)가 있다. 또한 『물 속까지…』로 제15회 동서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96년 제1회 꿈과시문학상 수상, 2005년 제10회 현대시학 작품상
박형준의 시에는 소멸해 가고 있는 것, 이미 소멸한 것들로 난무하다. 그의 시를 읽으면 우리가 미처
발견하거나 알아보지 못한 것들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자각에 당혹스럽다. 우리들이 부의 축적이나
명예와 관련된 성과들에 연연하고 있을 때 박형준은 '저음의 음계로 떠는 사물'(「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 하련다」)들을 보고 있었다. 이는 그가 시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당연한 결과가 아닐
까. 시인은 유년 시절 가족의 죽음을 겪는다. 남동생의 죽음은 그에게 이면의 세상을 보는 시선을 갖
게 했다. 그는 '허름한 가슴의 세간살이를 꺼내어 이제 저문 강물에 다 떠나보내련다'(「나는 이
제…」)라고 고백하며 소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흉터로 굳은 자리'가 또 다른 '새로운 별
빛'으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시인의 열망이 시를 쓰게 하는 힘인 것이다.
사랑(박형준) / 시낭송(이진선)/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