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아름다운 문학

<박라연> 서울에사는평강공주 / 몬테그로토에밤이오면 / 무창포에서

이름없는풀뿌리 2023. 12. 25. 07:23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 박라연 /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05월 - 동지달에도 치자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일기를 쓴다 없는 것이 많이 더욱 따뜻한 아랫목은 평강공주의 꽃밭 색색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 무더기 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 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네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대추나무 밤마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꿰맨다 ......가끔...... 전기가...... 나가도...... 좋았다...... 우리는...... 새볔녘 우리 낮은 창문가엔 달빛이 언 채로 걸려 있거나 별 두서넛이 다투어 빛나고 있었다 전등의 촉수를 더 낮추어도 좋았을 우리의 사랑방에서 꽃씨 봉지랑 청색 도포랑 한땀 한땀 땀흘려 깁고 있지만 우리 사랑 살아서 앞마당 대추나무에 뜨겁게 열리지만 장안의 앉은뱅이 저울은 꿈쩍도 않는다 오직 혼수며 가문이며 비단 금침만 뒤우뚱거릴 뿐 공주의 애틋한 사 랑은 서울의 산 일번지에 떠도는 옛날 이야기 그대 사랑할 온달이 없으므로 더더욱 * 치자 꽃이 피는 신방 → 신혼의 행복과 사랑 * 없는 것이 많아 더욱 따뜻한 아랫목 → 가난한 삶에 대한 역설적 표현으로, 가난한 살림살이를 사 랑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 화자의 긍정적인 마음이 나타나 있다. * 평강 공주 → 시적 화자의 비유 * 색색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 무더기 → 화자는 꽃씨 봉투를 깁는 일을 하고 있음. * 산동네의 맵찬 바람 → 산동네에서 겪는 고난과 시련 *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 가난한 삶의 비애를 자신의 일에 연결 지어 나 타낸 부분으로, 현실적 삶의 어려움이 잘 나타나 있다. * 산동네의 인정 → 사람 사는 따뜻한 정 * 대추나무 → 시련을 극복한 성숙한 사랑을 의미함. * 밤마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꿰맨다 → 순수한 사랑을 만들어가는 화자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부분으로, 진정한 사랑이란 서로의 허물이나 상처까지 감싸줄 수 있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 … 가끔 …… 전기가 …… 나가도 …… 좋았다 …… 우리는 ……→ 삶의 고난에 대한 긍정적 자세 말줄임표의 반복으로 시적 긴장감과 리듬감을 동시에 형성함. * 우 낮은 창문가 → 산동네 낮은 집의 창가 * 달빛이 언 채로 걸려 있거나 별 두서넛이 다투어 빛나고 있었다 → 추위에 얼어붙은 달과 두서너 개의 별밖에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의 모습 * 전등의 촉수를 더 낮추어도 좋았을 → 삶의 시련이 심해진다 해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사랑 의 힘에 대한 굳은 믿음과 확신이 나타나 있다. * 장안 → '신방'과 대조적인 공간 * 앉은뱅이저울은 꿈쩍도 않는다 → 앉은뱅이여서 쉽게 움직이지 않음. * 혼수, 가문, 비단 금침 → 사랑과 대조되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가치 * 공주의 애틋한 사랑은 서울의 산 일 번지에 떠도는 옛날이야기 → 현대 사회의 물질적인 사랑을 비판한 부분,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에서 진정한 사랑이란 흘러간 옛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 그대 사랑할 온달 → 평강 공주를 사랑할 순수한 온달 * 더더욱 → 더더욱 그것은 떠도는 옛날 이야기일 뿐이다. 몬테그로토 테르메 호텔의 초저녁 풍경 몬테그로토에 밤이 오면 - 박라연 - 상처가 노을의 일부인 줄 몰랐을 때 그의 시간 속에 붉은 노을 스며들 때 남남인 어제의 아픈 고백들이 흘러들어와 조금은 더 붉게 붉어졌다 하늘이 사람이라는 씨앗을 땅에 뿌려놓으시고 완전체의 지루함을 견디시는 중인 셈이다 노을로 퍼지는 희로애락을 즐기시는 중이다 이 저녁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제 몸 거쳐 간 노을들이 고뿔 들 때 설사할 때 공부할 때 밥벌이할 때 부부가 되었을 때 그들의 잔잔한 어미가 되어 붉었을 것이다 생로병사까지 넘보면서 붉게 흘러갔을 것이다 * 몬테그로토 : 이탈리아 북부 베네치아 인근 휴양지 무창포에서 - 박라연 - 추운 얼굴들 모여 모여서 젖은 이야기로 잠이 드는 밤 가라앉으며 떠오르며 끝없이 서성이 는 세상은 눈 굵은 그물로 다 가릴 수 없는 슬픔인데 출렁일수록 깊어가는 상처 따라서 안 보이는 섬 찾아 조금씩 작아지는 푸른 물방울 소금처럼 빛나는 한줌 슬픔으로 섬을 이룰 수 없는 키 작은 어부들의 영혼이 발목 붉은 도 요새 되어 뿔뿔이 허공을 떠돌고 불빛 찾아 손 흔드는 낯선 안강망 어선들 어디에도 지친 닻을 내릴 곳이 없다​ 눈물이 강물같이 보이던 날 성욕처럼 들끓는 물거품을 바라보며 누구는 죄를 짓고 누구는 용서하고 목쉰 파도 되어 흐느끼지만 죽어서도 산란하는 늙은 어부의 꿈 만난다 앉은뱅이 섬, 혹은 * 박라연(1951-) 1951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한국방송통신대 국문과와 수원대 국문과 석사, 원광대 국문과 박사과정 을 졸업했다.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가 당선되어 시단에 나왔으며, 시집으로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생밤 까주는 사람』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공중 속의 내 정원』 『우주 돌아가셨다』와 산문집으로 『춤추는 남자, 시 쓰는 여자』 등이 있다. 제3회 윤동 주상(2008) 문학 부문을 수상했다.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박라연) / 시낭송 추언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