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아름다운 문학

<문태준> 백년 / 어느날내가이곳에서가을강처럼 / 빈집의약속

이름없는풀뿌리 2024. 1. 10. 04:05
백년(百年) - 문태준 / <그늘의 발달> 문학과지성사 / 2008년 07월 -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빈 의자처럼 쓸쓸히 술을 마셨네 내가 그대에게 하는 말은 다 건네지 못한 후략의 말 그제는 하얀 앵두꽃이 와 내 곁에서 지고 오늘은 왕버들이 한 이랑 한 이랑의 새잎을 들고 푸르게 공중을 흔들어 보였네 단골 술집에 와 오늘 우연히 시렁에 쌓인 베개들을 올려보았네 연지처럼 붉은 실로 꼼꼼하게 바느질해놓은 百年이라는 글씨 저 百年을 함께 베고 살다 간 사랑은 누구였을까 병이 오고, 끙끙 앓고, 붉은 알몸으로도 뜨겁게 껴안자던 百年 등을 대고 나란히 눕던, 당신의 등을 쓰다듬던 그 百年이라는 말 강물처럼 누워 서로서로 흘러가자던 百年이라는 말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하루를 울었네 어느 날 내가 이곳에서 가을 강처럼 - 문태준 - 내 몸을 지나가는 빛들을 받아서 혹은 지나간 빛들을 받아서 가을 강처럼 슬프게 내가 이곳에 서 있게 될 줄이야 격렬함도 없이 그냥 서늘하기만 해서 자꾸 마음이 결리는 그런 가을 강처럼 저물게 저물게 이곳에 허물어지는 빛으로 서 있게 될 줄이야 주름이 도닥도닥 맺힌 듯 졸망스러운 낯빛으로 어정거리게 될 줄이야 빈집의 약속 - 문태준 / 시집『가재미』(문학과지성사, 2006) -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 별이 보고 싶은 날에는 개심사 심경당 별 내리는 고운 마루가 들어와 살기도 하였다. 어느 날에는 늦눈보라가 몰아쳐 마음이 서럽기도 하였다. 겨울 방이 방 한 켠에 묵은 메주를 매달아두듯 마음에 봄 가을없이 풍경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러나 하릴없이 전나무숲이 들어와 머무르는 때가 나에게는 행복하였다. 수십 년 혹은 백 년 전부터 살아온 나무들, 천둥처럼 하늘로 솟아오른 나무들 뭉긋이 앉은 그 나무들의 울울창창한 고요를 나는 미륵들의 미소라 불렀다. 한 걸음의 말도 내놓지 않고 오롯하게 큰 침묵인 그 미륵들이 잔혹한 말들의 세월을 견디게 하였다. 그러나 전나무 숲이 들어앉았다 나가면 그뿐, 마음은 늘 빈집이어서 마음 안의 그 둥그런 고요가 다른 것으로 메워졌다. 대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듯 마음이란 그냥 풍경을 들어앉히는 착한 사진사 같은 것 그것이 빈집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 시인의 말 : 어느 때, 가끔 내 존재와 정체성에 대해서 스스로한테 묻습니다. 내가 서 있는 이 곳이 어디쯤이냐고? 우리는 그렇게 잠깐 멈춰서 나를 확인하기도 하지요. 시인은 바로 그런 시심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는 듯합니다. 우리 향기님들은 이 시를 읽으시고 어떠하신지요? 가을입니다. 그리고 한가위를 한 사나흘 앞 둔 날입니다. 고향엔 나를 받겨주실 부모 형제가 계시는지요? 아님, 나를 찾아 줄 자손은 몇이나 있으신지요? * 문태준(1970-) 1970년 경북 김천에서 출생. 1995년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 1994년《문예중앙》신인문학상에 시 〈處 署〉외 9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그늘의 발달』등이 있음. 제21회 소월시문학상 대상을 수상.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 中 빈집의 약속(문태준) / 시낭송 김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