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춘(早春)
- 정인보 /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 -
1
그럴싸 그러한지 솔빛 벌써 더 푸르다.
산골에 남은 눈이 다산 듯이 보이고녀.
토담집 고치는 소리 별밭 아래 들려라.
2
나는 듯 숨은 소리 못 듣는다 없을손가.
돋으려 터지려고 곳곳마다 움직이리.
나비야 하마 알련만 날기 어이 더딘고.
3
이른 봄 고운 자취 어디 아니 미치리까?
내 생각 엉기올 젠 가던 구름 머무나니,
듬 붓대 무능타 말고 헤쳐 본들 어더리.
첫 정
- 정인보 /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 -
1
그 기별 듣던 밤에 온 하늘이 별이더니
꿈이면 어서 깨자 꿈아니면 어찌할고
배 떠나 바다 넓으니 곧 미칠듯 하여라
2
그러니 그럴라구 집에 가면 만나려니
건너 방 덧문 닫고 마당조차 다른 듯다
어머니 반 울음으로 너왔느냐 하서라
3
내 건너 골을 닫넘어 드뭇 성긴 솔아래로
가르쳐 저기라니 님 아니고 흙이로다
밤낮에 그리던 남편 여기온 줄 아신가
4
이월달 생일기거의 더 안 묵고 떠났것다
어머니 뒤따라서 중문까지 나오던 님
말 없이 서로 헤져서 다시 볼 길 없고녀
5
하늘 위 옥련화가 삼간난리 인간으로
늘 보기 바라리만 너무 총총 이다지오
씨남겨 새잎 나오니 정 머문 줄 아노라
6
뼈깊이 맺힌 정을 내가 어찌 다 안다리
아니본 상해 남경 눈에 오즉 그렸을까
그 배로 지어 논 옷은 사람대신 반겨라
7
어려서 놀던 동무 내외라니 더 달리라
철 아즉 나기 전도 바라보고 좋았었다
첫 정이 어혈(瘀血)이 되니 님만 불상하리오
8
세월이 약이라고 이제와선 어렴풋다
잊기야 잊을신정 인간맛은 섬거워라
나그려 못갔으려니 제사과인 받는가
9
큰딸애 사십 거의 아들딸해 여덟이외
눈썹새 엷은 결이 볕에 서면 더 어머니
닮고도 저는 모르니 가슴 찌연하여라
10
어머니 일평생에 며느리로 못이 박혀
잃건만 하는 때는 바로 목이 메시더니
산소가 뫼 앞이시니 어루만져 주시리
여수(麗水)서 목포(木浦)까지
- 정인보 /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 -
1
짐 먼지 사람 법석 어느덧에 멀었는고
물 넓고 하늘 낮고 섬 하나 둘 뒤로 선다
눈뗑이 떼 저 나르니 해오리라 하더라
2
산그늘 거뭇한데 돛폭마다 해 바읜*다
용총줄 늦춰둔가 반이 넘어 기우단말
물 절로 배 밀어가니 저어 무삼 하리오
3
물결도 자란자란 먼 산 점점 어렴풋이
여기가 어대쯤고 백야섬이 돋아난다
앞만을 좋다지 마소 돌아 다시 보시오
4
해 아직 안 떴는데 섰는 돛들 희끗거뭇
울두목 저저기라 천둥소리 은은하다
옛날일 들추려 마소 안 들춰도 느꺼라
5
나로도(羅老島) 그림같다 산은 어이 휘여 낮아
그 넘어 푸른바다 활시윈양 그엇구나
동청(冬靑) 숲 처진 가지가 반잠긴 듯하여라
6
실같은 긴 섬들이 들어가면 막히기도
두르고 또 에워싸 함박꽃 속 같으시니
바다가 그림에 들어 무놀**마저 잊어라
* 바읜 : 빛남
** 무놀 : 파랑(波浪)
백마강(白馬江) 뱃 속에서
- 정인보 /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 -
1
줄로신 사시나무 산그림과 마주 잠겨
흰 모래 푸른 언덕 동서남북 두루 좋다
술 없이 취하는 흥을 못내 겨워 하노라
2
높대야 만질만한 미인(美人)같이 앉은 산들
결 없는 넓은 강(江)이 바라수록 호묘(浩渺)하다
공중(空中)에 도는 구름도 나즉한 듯 하여라
3
물 위에 퍼진 태양(太陽) 뛰노느니 금 빛인데
게으른 노(櫓) 소리에 양안청산(兩岸靑山) 옮겨간다
대재각(大哉閣) 저기라하니 수북정(水北亭)은 어댄고
4
낙화암(落花巖) 저 석벽(石壁)아 너만 어찌 남았는다
강풍(江風)에 날린 홍상(紅裳) 백제번화(百濟繁華) 마지막을
자취나 지켜 보려고 무딘 듯이 있소라
5
계실 제 꽃이로대 떨어지니 빙옥(氷玉)이라
지나며 숙는 고개 어제런듯 느꺼워라
이 넋엔 낙시 없으니 용(龍)을 영(靈)타 하리오
6
흐르는 인생백년(人生百年) 저 물길과 어떠하니
머물 듯 붙드랴니 그일 아니 우스운가
내던져 되오는 목숨 알 리 없어 하노라
7
유리(琉璃)가 흐르다니 물결치는 거울 본다
못 믿건 예 와 보오 백마강(白馬江)에 배를 타오
노 저어 유리(琉璃)로 드니 경기 어떠 하닛고
8
남 순인 겹스란의 어른대는 고운 결을
십리청강(十里淸江)에 그 뉘라서 옮겨온고
산경(山影)도 흥(興)겨운듯이 우줄우줄 하더라
9
하늘빛 산그림자 사자수로 갓불났다
게다가 배를 실어 헤치면서 가단말가
37
벽유리(碧琉璃) 예런듯하니 지났던지 몰라라
10
긴 강에 배를 저어 흘러흘러 나려갈 제
산들야 맘 없을손 사람이니 정없으랴
구름이 저기서오니 내 시름가 하노라
11
초하구(草河口)* 궂은 비에 깊이 매진 영릉**지통(寧陵至痛)
저 비답(批答)*** 하오실 때 상하(上下)아니 울었으리
그제가 성세(盛世)로 뵈니 산 줄 몰라 하노라
* 초하구 : 효종조(孝宗朝) 시조의 일부
** 영릉 : 효종의 능호(陵號)
*** 비답 : 신하의 상주문(上奏文)의 밑에 적는 임금의 대답
석파 이하응의 석란도(石蘭圖)
난화사(蘭花詞) 삼첩(三疊)
- 정인보 / <담원시조, 을유문화사, 1948> -
1
븨인골* 외로운 싹* 녯뿌리를 구지지켜
밟아도 맑은 향내 남모른다 꼿 안픠랴.
자랑*에 살랴는 무리 이 뜻 어이 알리오.
* 븨인골 : 空谷
* 싹 : 芽
* 자랑 : 誇矜
2
동국(東國)에 업는 란초(蘭草)* 비슷하다 긔일쏘냐
북도든* 이 한 꼿이 달른 채로 국향(國香)*이라
속헤쳐 란심(蘭心)일진대 이 진란(眞蘭)가 하노라.
* 우리나라에는 蘭草가 없다. 李山雲의 『東國無眞蘭 只有似蘭者』라 한 싯귀가 있다.
* 북도든 : 북돋은, 培花의 뜻
* 國香 : 一家一鄕의 香이 아니라 一國의 香이란 말.
3
꼿조타 기리는다 뿌리 더욱 귀하리라
싹조차 트고안코 품은 유방(幽芳) 의연(依然)하다
삼동(三冬)에 내 업다마소 몽처 단단하니라.
* 이 時調 지을 때는 敵의 重壓이 바야흐로 심하여 우리의 精神을 거의 부지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빗대놓고 이렇게 말하여 혹 感發되는 바 있을까 한 것이다.
정인보(鄭寅普1893.5.6.∼1950.9.7)
한문학자⋅사학자. 아명(兒名)은 경시(景施), 자는 경업(經業), 호는 수파(守坡)⋅미소산인(薇蘇山
人)⋅위당(爲堂)⋅위당(爲當)⋅담원(薝園)⋅수파(守坡). 서울 출생.
1910년 중국에 유학, 동양학을 전공하면서 동지들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조국 광복운
동에 종사하다가 1919년 귀국하여 주로 연희전문학교를 비롯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세브란스의학전
문학교⋅중앙불교전문학교에서 국학(國學)⋅동양학(東洋學)을 강의하는 한편, [시대일보] [동아일보]
의 논설위원으로서 날카로운 필봉(筆鋒)으로 민중들에게 국혼(國魂)을 환기시켰다.
1948년 광복 후 국학대학장(國學大學長)에 취임, 1951년 초대 감찰위원장에 취임, 6⋅25 전쟁 때 납
북(拉北)되었다. 국문학사⋅한문학⋅국사학에 연구가 깊었으며, 시조⋅한시(漢詩)에도 능숙하였다.
- 이홍직 : <국사대사전>(백만사.1975) -
사학자. 1893년 서울 명동에서 명문가의 외아들로 출생했으며 유명한 학자인 이건방에게서 사사했고
1913년 상하이로 건너가 박은식,신규식 등과 함께 동제사를 결성했다. 1945년 8월 광복 후에 국학대
학의 초대 학장을 지냈으며 1946년<조선사 연구>를 저술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에 의해 초대 감찰위원장에 선임되었으나, 임영신의 독직 사건을 두고
대통령 이승만과 갈등을 빚고 물러났다 1950년 6⋅25가 일어난 그해 7월 31일 서울에서 공산군에 의
하여 납북된 이후 사망 시기가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공식 사망일은 9월 7일로, 북행 직후 황해도에
서 폭격 피해를 당해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실심을 강조한 양명학 연구의 대가였고 한민족이 주체가 되는 역사체계 수립에 노력한 역사학자였으
며, 감찰위원장 제직 시 광복절노래, 삼일절 노래 등을 작사했고, 1990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이 추
서되었다.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일제의 강압을 피해 1940년 8월 서울시 도봉구 창동리 731번지로 이
주했으며 정인보옛집은 초가였으며 사랑방도 갖춰져 있는 조금 규모가 있는 초가였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가인 김병로, 고하 송진우와 함께 창동의 '세 마리 사자'라 불렸으며 도봉구 창동 733번
지에 거주하였고 현재는 이 지역이 쌍문2동 587번지로 변경되었다.
1990년 대한민국건국훈장이 추서되었으며, 1991년 11월 21일 납북독립유공민족지도자 15위에 대한 추
모제전을 거행하고 정인보의 위패를 국립묘지 충열대의 납북독립유공자제단에 모셨다. 묘소는 본래
평양시 형제산 구역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특설묘지에 조성되어 있었는데, 2003년부터 재북인사 62
인의 묘역을 재조성하면서 평양시 용성구역 용궁1동에 있는 재북인사 묘역 내로 다시 이장되었다.
사학자ㆍ한문학자ㆍ시조시인. 서울 생. 아명은 경시(景施). 호 위당(爲堂), 담원(薝園). 한학 수학,
동양학 전공. 어려서부터 외삼촌 서병수(徐丙壽)를 통해 이건방(李建芳)의 휘하에서 양명학 등을 수
학. 1913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박은식(朴殷植)ㆍ신규식(申圭植)ㆍ신채호(申采浩)ㆍ문일평(文一平)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하다 1919년 귀국하여 연희전문, 이화여전, 세브
란스 의전 등서 동양학 강의를 맡았다.
[시대일보] [동아일보] 등의 논설위원으로 활약하면서 ‘국학(國學)’이란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한국의 얼’을 강조하고 국민문학 운동에 호응하여 시조를 짓기 시작하
였다. 이때 <조선고전해설>(1931), <양명학연론(陽明學縯論)>(1933), <오천년간 조선의 얼>(1935) 등
을 [동아일보]에 연재하여 한국사에 대한 관심과 자긍심을 환기시키고 주체적인 민족의식을 고취시키
는 데 주력하였으며, 8ㆍ15광복 후에는 남조선 민주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으나 곧 탈퇴하였다.
1946년 전(全)조선문필가협회 회장, 초대 감찰위원장, 국학대학 학장 등 역임.
6ㆍ25 때인 1950년 7월 31일 납북되었다가 평북 희천서 폭격으로 사망하였다고 전한다. 그는 우리나
라 최후의 양명학자(陽明學者)로서, 한문학의 대가(大家)로서, 민족주의사관(史觀)의 확립자로서의
공적이 매우 크다.
사학자. 서울에서 태어나 한말의 양명학자(陽明學者) 이건창(李建昌)의 문학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한일합방이 되자,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北京)에서 동양학(東洋學)을 전공하면서 박은식(朴殷植)ㆍ신
채호(申采浩)ㆍ김규식(金圭植)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1918년
귀국하였다.
주로 연희전문ㆍ이화여전ㆍ중앙불교전문 등에서 국학9國學)ㆍ동양학(東洋學) 등을 강의했고, 언론계
에도 관계하여 [시대일보] [동아일보] 등의 논설위원으로 일본총독부의 탄압정책을 신랄하게 비난했
으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이 무렵 ‘국학(國學)’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으며. 새로운 민족사관(民族史觀)의 확립에 주력
하여 국학연구의 기초를 조선(朝鮮) 영조ㆍ정조 시대의 실학(實學)에서 찾았다. 1937년 [동아일보]에
발표된 <5천년간 조선의 얼>이란 논문은 새로운 민족사관 확립을 위한 대표적인 논문이다.
광복 후 1946년 우익(右翼) 민족진영 문화인ㆍ문필인들의 집결체인 전조선문필가협회(全朝鮮文筆家協
會)] 창립에 참여하여 초대 회장이 되었고, 이어 국학대학장(國學大學長),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
대 감찰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5ㆍ25 때 납북(拉北)되어 묘향산 근처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1921년 시 <기진 어미님>을 발표한 후 1927년 시조 <가신 임>, 1928년 <자모사(慈母思)>, 1929년
<월야(月夜)> 등을 계속 발표했으며, 1927년 희곡 <가신 임>을 발표했다. 1948년 간행된 시조집
<담원시조>에는 1925년 이후의 국민문학운동의 일익을 담당한 작품 46편이 수록되어 있다.
- 김윤식 : <한국현대문학명작사전>(일지사.1982) -
【작품세계】
정인보는 프롤레타리아문학과 반대 입장에 있던 국민문학파로 최남선⋅이광수⋅이병기⋅이은상 등과
함께 민족혼이 깃들인 순수시조를 창작하고 시문학파의 일원이 되기도 하였다. 작품의 소재로는 어머
니와 조국, 우리 역사 및 자연에 관한 것이 지배적으로 많았으며, 작품의 내용은 주로 존상사상(尊上
思想)과 인륜(人倫)에 관한 것이 중심이 되었다.
저자의 대표적 작품인 <자모사>는 생모와 양모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도시이지만, 그 배경에는 상하
이, 안동 등지로 망명갔던 동지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도 깔려 있다는 점에서, 넓게는 민족에 대한 사
랑을 주제로 삼고 있는 작품이다. 전통적인 시조형식을 고수하여 초‧중장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종장에
서 ‘3⋅5⋅4⋅3’의 형태를 깨는 일이 없었다. 시어로서 고어를 많이 발굴하여 활용하였으며, 이것
이 그의 역사적 소재와 잘 조화되어 전아한 시풍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의 시조는 전아
(典雅)한 기풍을 견지하고 있으면서 날카롭고도 섬세한 감성과 인정의 기미를 번득인다. 그리고 밀도
있는 기교를 엿보이고 말투는 예스럽다.
위당은 한문학자나 사학자 못지않게 시조 작가 활동을 했으며, 그의 시조에 항일의 민족사상과 지조
가 잘 반영되어 있음을 본다. 그가 불굴의 지조나 항일 사상을 갖게 된 것은 성장 과정에서 조부 정
기년의 반골사상을 많이 영향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인격 형성에 직접적인 양향을 미친 사람은
생모, 양모 두 어머니인 것이다.
위당이 시조 창작에 손을 댄 시기가 1926년이다. 이 해는 프로문학이 풍미하고 가갸날(한글날)을 제
정, 시조부흥운동이 일어나던 해이다. 프로문학파와 국민문학파가 대결을 보이던 1920년대 후반에 한
시만 짓던 위당은 <계명> 16호에 '가신 어머님'을 처녀작으로 발표하면서 시조단에 등단한 것이다.
위당은 첫 시조집 <담원시조>를 상재하던 1948년까지 무려 20여년 시조 창작 활동을 했다. 현재까지
알려진 작품 수는 37편(369수)으로 되어 있다. 작품 내용은 주로 존상사상(존상사상), 혈족, 친척의
인륜 관계를 많이 다루었다. 소재는 어머니와 조국, 역사, 자연에 관한 것이 지배적이다. 어머니와
조국은 어머니의 다층적 의미로 근원, 생산, 흙, 조국, 자애, 희생, 회한 등의 상징적 주제를 보인
다.
'자모사'는 희한, 자연, 희생, 조국의 집중 주제로 직접적으로 생모, 양모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모시
로 나타나지만 간접적 창작 동기는 문원 홍승헌, 수파 안효재, 경재 이건승, 가당 정원하 등이 상해,
안동 등지로 망명을 갔다가 1941년부터 1925년 사이에 이들이 장송 행렬이 되어 위당 앞에 나타난 비
극적 사실에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자모사'는 항일 민족시로 해석해야 될 것이다.
위당은 민족주의 사상을 주제로 나타나게 하기 위해 역사적 소재를 많이 시어로 활동했으며, 위당이
사학자이므로 단군으로부터 삼국, 고려, 조선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역사적 주제를 구사하
여 겨레의 얼을 주제로 살리면서 일제시 민족혼을 계속하여 부가시켰다.
“우리말을 표현으로 삼은 신문학은 한문과 함께 사상과고 그만 작별을 하고 말았다. 우리 신문학은
사상이 없는 문학이 되고 말았다”고 말한 평자(評者)가 있다.
그 말에 있어서의 사상이란 한문과 더불어 표기된 불교 및 유교를 지칭한다. 또 그 평자에 의한다면,
오직 한 가지 예외가 <님의 침묵>이다. 유교나 불교는 오래도록 한국인의 사상으로 형성되어 왔다.
그리고 한문은 그 사상의 운반 도구였다. 이 중 불교의 측면이 <님의 침묵>에 연결되었다면 유교적
사상의 발현을 문제삼을 수 있는 것이 정인보의 <담원시조>이다.
<담원시조>의 주축을 이루는 것은 <자모사> <유모 강씨의 상행(喪行)을 보내면서> 등이다. 그런 종류
의 시조가 그 사상적 기반을 유교의 실천적 측면 중의 하나인 ‘효(孝)’에 두었음은 명백하다. 그
‘효’는 <소학(小學)에 규정된 ‘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損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
母 孝之終也’의 성질을 지닌 것이다. 이 ‘효’의 발현이 정인보의 가장 현저한 특징이면서 동시에
그의 개인적 편향성을 넘어서는 시대적 의미를 지닌다.
즉 그것은 ‘효’를 제일 원리로 강조하도록 강요된 시대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가 처했던 시기는
‘천(天)’의 관념이 상실된 때였다. 국가의 상실은 군신관계(君臣關係)의 소멸이며, 이에 오륜(五
倫)중 군신관계에 대체되는 덕목이 부자관계(父子關係)로 놓였을 것이다. 부 혹은 부모의 상실이 국
가 개념의 상실에 준한다는 사유에 따를 경우 비로소 효의 관념화가 특별한 사상적 문제성으로 드러
난다. 또한 효의 강조에서 심리적 균형을 획득할 수가 잇었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 그의 문학이 독자에게 절실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잇다. 효가 단순한 육친애(肉親愛)를 넘
어서서 어떤 성스러운 ‘천(天)’의 개념으로 원광을 둘러썼던 것ㅇ르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
은 천(天)의 상실감으로서의 부모의 상실 다음에 오는 형언하기 어려운 그리움이다.
정인보의 시조에 있어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의 위와 같은 사상적 측면이 시조라는 양식에 결부되
었다는 점에 대해서다. 도남(陶南)과 가람이 각각 단수(單首) 원칙의 시조론과 3수 이상의 시조론을
주장했고, 그 양 극단이 이호우(李鎬雨)와 정인보이다. 이호우는 단일한 발상과 그것의 집중을 핵으
로 했고, 정인보의 시조는 그와 반대로 보통 10수 이상을 넘는 것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정인보의 시조에서도 사상을 배경으로 하지않은 <조춘(早春)>과 같은 시는 3수로 족했으나, <자모사>
는 40수 연작이며, 기타 다른 것들도 보통 10수 이상이다. 그 경우 연작의 각 수가 부분과 전체의 관
계로 구성되느냐, 단순한 나열에 불과하느냐가 문제된다. 그러나 정인보의 시조는 나열에 가까운 것
이며, 부분과 전체의 관계로 성립된 높은 수준의 연작시조(連作詩調)는 시도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여기(餘技)로 시조를 한 증거일 수도 있다. 또 그것은 유교의 ‘효(孝)’라는 것이 ‘천
(天)’의 관념과 결합되지 못하고 생활상의 의미가 강조됨으로써 <님의 침묵>의 불교처럼 형이상(形
而上)이 되지 못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과거에 시조의 한 특징이었던 곡조(曲調)의 소멸은
정인보의 시조에서는 그 대체물을 찾지 못하며, 결국 그것은 가람에 이르러 ‘난(蘭)’으로 나타난
다. - 김윤식 : <한국현대문학명작사전>(일지사.1982) -
【경력】
▶1910 중국에서 동양학을 전공하며 신규식 등과 동제사를 조직, 독립운동과 교포계몽에 힘씀.
▶1918 박은식⋅신채호⋅김규식과 함께 [동제사(同濟社)] 조직, 독립운동하다가 귀국
▶1918 연희전문ㆍ이화여전ㆍ중앙불교전문학교 등에서 국학⋅동양학을 강의
▶1924 5월 17일 동아일보 논설반
▶1924 8월 31일 동아일보 촉탁기자
▶1924 [폐허이후(廢墟以後)]에 평론 <문장강화(文章講話)> 발표. 주로 연희전문(延희專門)을 비롯해
서 이화여전, 세브란스 의전 등에서 강의. 시대일보⋅동아일보 논설위원 역임
▶1927 불교전문학교 출강
▶1929 조선국어사전편찬회 참여
▶1932 동아일보 객원사원
▶1936 연희전문학교 한문학⋅국사학⋅국문학 교수
▶1946 전조선문필가협회(全朝鮮文筆家協會) 발족, 회장에 피선됨
▶1946 [신강회(新强會)] 결성
▶1946 전국민애국회 발기
▶1946 국학대학 학장
▶1946 한중문화협회 발족 참여
▶1948 감찰위원장
▶1948 이충무공기념사업회 발기
▶1950 7월 31일 6ㆍ25전쟁 때 피납
▶1950 11월 별세
【평론】
<문장강화(文章講話)>(폐허이후 1.1924.1)
<‘백팔번뇌(百八煩惱)’ 비평에 대하여>(동아일보.1927.3.1.∼3)
<도향애사(稻香哀詞)>(현대평론 7.1927.8)
<동양철학 강화(講話): 양명학(陽明學)에 대하여>(동아일보.1927.11.24.)
<수양강좌(修養講座): 묵자(墨子)에 대하여>(동아일보.1928.2.10.)
<수양강좌(修養講座): 중국문학강화(中國文學講話)>(동아일보.1928.5.10.)
<지나문학논총(支那文學論叢)>(如是.1928.6)
<수양강좌(修養講座): 박지원(朴趾源)의 문장(文章)과 그 사상(思想)>(동아일보.1928.10.5.)
<고황학파(顧黃學派)와 신중국(新中國)과의 관계>(동아일보.1928.10.18.)
<지나문학논총(支那文學論叢)>(청년 83.1928.11)
<지나문학논총(支那文學論叢)(2)>(청년.1928.12)
<지나문학논총(支那文學論叢)(3)>(청년.1929.1)
<문장일석화(文章一夕話)>(동아일보.1929.1.18.)
<지나문학논총(支那文學論叢)(4)>(청년.1929.2)
<지나문학논총(支那文學論叢)>(청년.1929.3)
<삼백년 당쟁을 회고>(동아일보.1929.5.2.)
<이가환(李家煥)의 시>(동아일보.1929.10.24.)
<이성호(李星湖)와 곽우록(藿憂錄)>(동아일보.1929.12.22.∼25.전3회 연재)
<십자광고(十字廣詁)>(동아일보.1930.4.2.∼12.전9회 연재)
<동경잡지(東都雜誌): 경주유물(慶州遺物)의 사적(史的) 고찰>(동아일보.1930.9.2.∼28.전20회 연재)
<통속강좌: 동양문화>(동아일보.1930.11.20.)
<조선문학원류초본(朝鮮文學源流草本)>(조선어문연구 1.1930.12)
<민영달(閔泳達)과 한규설(韓圭卨)>(동아일보.1930.12.1.∼3)
<조선고전해제(朝鮮古典解題)>(동아일보.1931.1.19.∼5.11.전19회 연재)
<근세조선(近世朝鮮) 학술변천(學術變遷)에 대하야>(청년.1931.2)
<이충무공 묘산(墓山) 경매 문제>(동아일보.1931.5.15.)
<충무공 평생에 대한 본전(本傳)과 소설>(동아일보.1931.6.25.)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동아일보.1933.9.8.∼12.17.전66회 연재)
<동양학강화(東洋文學講話) : 동양문학에 대하야>(동아일보.1933.10.13.)
<다산선생(茶山先生)과 조선학>(동아일보.1934.9.5.)
<유일한 정법가(政法家) 정다산(丁茶山) 선생 서론(敍論)>(동아일보.1934.9.10.∼15.전6회 연재)
<5천년간 조선의 얼>(동아일보.1935.1.1.∼8.27.전283회.일장기 말소사건 정간으로 중단)
<다산선생(茶山先生)의 일생: 정다산 서세(逝世) 백년기념>(동아일보.1935.7.16.)
<단군개천(檀君開天)과 10월>(동아일보.1935.10.29.)
<조선역사강좌: 상고사(上古史)>(동아일보.1935.11.10.)
<병자(丙子)와 조선(朝鮮) 금고병자(今古丙子)의 재음미>(동아일보.1936.1.1.∼3)
<단재(丹齋)와 사학(史學)>(동아일보.1936.2.26.∼28)
<신단재 추억: 잔억(殘憶)의 수편>(신동아 54.1936.4)
<을지공묘산수보문제(乙支公墓山修保問題)>(동아일보.1936.5.23.)
<훈민정음운해해제(訓民正音音韻解題)>(한글.1937.4)
<광복선열의 영령 앞에 삼천만 다 함께 머리 숙이자>(동아일보.1946.3.1.)
<충무공(忠武公) 사후(死後) 350년 기념 특집>( 노량진(露梁津) 충렬사(忠烈祠) 비문(碑文)⋅
한산도(閑山島) 제승당(制勝堂) 연구)(신천지 41.1949.12)
【시】
<가신 님>(동광 9.1927.1)
<남장미(男壯美)>(삼천리.1936.2)
【시조】
<내장산 벽련암(內藏山碧蓮菴)>(동아일보.1924.9.4.)
<청명(淸明)>(동아일보.1924.9.12.)
<가신 어머님>(16수 연시조.계명 16.1926.12)
<자모사(慈母思)>(1925. 40수의 연시조)
<고전애(古典哀)>(현대평론.1927.3)
<결절사7수(決絶詞七首): 혜초애(蕙草哀)>(동아일보.1928.12.2.)
<편지 속에 든 댓님을 보고>(동아일보.1929.5.21.)
<유모(乳母) 강씨(姜氏)의 상여(喪輿)를 보내면서>(동아일보.1930.2.14.)
<경기사(競技詞)>(동아일보.1930.9.27.)
<강석(江石) 한공만(韓公挽)>(동아일보.1930.11.14.)
<박연행(朴淵行)>(동광 18.1931.2)
<척수허씨만(戚嫂許氏挽)>(동아일보.1932.3.8.)
<가을>(동아일보.1933.9.5.)
<고전애삼결(古曲哀三闋)>(삼천리.1934.5)
【가사】
<3⋅1절의 노래>(자유신문.1950.2.26.)
【수필】
<개결무구(介潔無垢)의 박은식(朴殷植) 선생>(개벽 62.1925.8)
<유릉지문(裕陵誌文)>(동아일보.1926.6.10.)
<독서잡감(讀書雜感)>(신민 30.1927.10)
<해산(海山) 추량기(追凉記)>(중외일보.1929.8.3.∼10)
<곡(哭) 이일성>(조선중앙일보.1933.8.19.)
<이찬숙애사(李瓚叔哀詞)>(동아일보.1933.8.19.)
<남유기신(南遊寄信)>(동아일보.1934.7.31.∼9.29.전43회 연재)
<중간(重刊) 일주년기념일에; 숙초(宿草) 밋헤 누은 고우(故友) 송고하(宋古下)를 우노라(상)>
(동아일보.1946.12.1.)
<중간(重刊) 일주년기념일에 ; 숙초(宿草) 밋헤 누은 고우(故友) 송고하(宋古下)를 우노라(하)>
(동아일보.1946.12.10.)
【시조집】
<담원시조(薝園時調)>(을유문화사.1948)
【저서】
<양명학연론(陽明學縯論)>(동아일보.1933.9.8.-12.17)
<오천년간 조선의 얼>(동아일보.1935)
<성웅(聖雄) 이순신(李舜臣)>(통문관.1946)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전2권.서울신문사.1946)
<담원국학산고(薝園國學散藁)>(문교사.1955)
<담원문록(薝園文錄)>(연세대학교.1967)
【편저】
<성호사설류선(星湖僿說類選)>(문광서림.1929)
조춘(정인보) / 시낭송(횃불장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