石碑(석비)에도 검버섯이
- 유하(維夏) 나순옥(羅旬玉) -
윤기 자르르 흐르던 피부
비바람에 거칠거칠
또렷했던 글자들도
치매인 듯 흐릿흐릿
石碑도
세월이 아파
검버섯이 피었다
바위
- 유하(維夏) 나순옥(羅旬玉) -
엎드려 우는 속사정
네게도 있었구나
그리움에
야위어 간
달 하나 걸어 둔 채
부서진
눈물의 흔적을
환히 닦고 있구나
과녘
- 유하(維夏) 나순옥(羅旬玉) -
자,
쏠테면 쏘아봐라
온 몸을 내어 주마
내 심장 깊숙한 곳에
네 원한의 살을 꽂아라
안된다!
빗나가서는
다른 생명 다친다
- 유하(維夏) 나순옥(羅旬玉) ‘강’ 육필원고.
강
- 유하(維夏) 나순옥(羅旬玉) / 1993년 《중앙시조백일장》 연말 장원작 -
모이면 힘이 되어 낮은 데로 길을 열어
우리네 가슴 한켠 유역을 다스리며
만 갈래
시름도 재워
반짝이며 흐른다
살아 한 생전 다투어 가는 녘에
때로는 갈대꽃의 샛강도 열어놓고
묵필로
긴 획을 그어
자술서를 쓰고 있는
*작품해설 : 인류에게 강은 삶의 근원이다.
다시 말해 강은 인간을 품어 안고 사회를 만들었다.
지류가 어디서 시작되었든 간에 강의 젖줄은 조상 만대로 흘러왔다.
그래서일까? 애환을 엿듣는 강은 밤마다 출렁이는 물소리로 목이 쉰다.
물을 떠나 한시도 살 수 없는 우리네 삶.
아무리 현실은 버겁다지만, 가끔은 강가에 나가 앉아 물빛이라도 익힐 일이다.
돌무지탑
- 유하(維夏) 나순옥(羅旬玉) / 조선일보 2016/12/23 -
후미진 산모롱이 산새들도 쉬는 곳에
누군가 무던하게 터 잡아놓은 돌무지탑
완성이 뭐 대수냐며 사부랑사부랑 크고 있다
가슴 속 소원 담은 뜨거운 막돌 하나
어떤 이의 소원 위에 또 다시 얹어질 때
돌 틈새 지나던 바람도 가만히 귀 기울인다
이뤄도 자고 깨면 이룰 것만 쌓이는 삶
생김생김만큼이나 서로 다른 비나리들
지은 죄 뉘우치는 거면 도담도담 크겠다
* 시조시인 나순옥(羅順玉·1957년~ ).
충남 서천 출생. 1993년 《중앙시조백일장》 연말 장원 『강』,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새벽공단』 등으로 문단 데뷔.
시조집 『바람의 지문』, 『석비에도 검버섯이』. 공저 『차마, 그 붉은 입술로도』,
『강은 역류를 꿈꾼다』, 『그믐의 끝』 등 다수.
2005년 새시대시조 좋은 작품상, 2009년 시조시학상 본상 수상 외.
「역류」 동인. 충북시조시인협회 회장 역임.
유하(維夏) 나순옥(羅旬玉) 2020년
* 누구든 시조를 쓸 수 있다 / 나순옥
강의내용 여기에 올리는 글은 열린시조[98년 봄호]에 실린 글입니다.
문학에 관한 꿈은 있으나 용기를 내지 못하시는 분들이나 시조를 쓰고저 하나 엄두를 내지 못하는 분
들을 위해 다소나마 도움이 되리라 믿어 올립니다 .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글을 쓸 계기를 만나지 못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용기를 내십시요. 그리고 계기를 만드십시요. 두 손 꼭 잡아드리겠습니다.
시조의 정형, 내 고동소리 같은 나는 유난히 어머나를 귀찮게 하며 자랐다.
중학교 이학년 때까지 어머니 가슴에 손을 넣고 비쩍 마른 젖꼭지를 만져야만 잠이 오곤 했으니까.
오남매 중 막내로 어머니 나이 사십이 다 되어 나를 낳으셨으니
내가 자란 뒤 어머니 가슴은 풍만할 리가 없었지만
그 마른 젖가슴이 나를 참으로 편안히 잠들게 해 주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대까지로 기억된다. 모내기 철이나 벼 베는 철에
우리집 일할 날이 잡히면 일꾼들의 먹거리 준비로 어머니는 거의 밤을 세우다시피 하셨다
그럴 때면 나는 베개를 안고
"엄마 나는 누구하고 자, 누구하고 자." 하면서 졸졸 따라다니면 어머니는 그 바쁜 틈에도
하시던 일을 멈추고 나를 데리고 돌어와 잠들여 놓고 다시 나가 일을 계속 하셨다고 한다.
무던히도 너그럽고 자애로우셨던 어머니!
그 어머니 곁을 중학교 이학년 때 떠나게 되었고
그 뒤로 어머니와 한 집에 살아 본 것은 어머니 임종 전 7개월 분이다.
병환이 깊으셔서 딸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하여 모녀의 정을 나눌 수도 없는 형편이었지만
그나마도 모시지 않으면 불효만 했다는 한이 남을 것 같아 무리인 줄 알면서도 어머니를 모셔왔었다.
어머니가 나를 떠나보낸 것은 통학거리가 너무 멀어 점점 야위어 가는 나를
보다 못해 읍내 사는 큰언니 댁에 맡기기로 하셨던 것이다.
언니댁은 시골 집보다 깨끗하고 편리한 환경이었고 첫새벽에 일어나 밥 한 술 먹는둥 마는둥하고
어둠이 채 가시지도 않은 신작로를 따라 20리 길을 걸어 학교에 오가는 불편은 없었으나
저녁이면 어머니가 보고싶어 견딜 수가 없었던 나는 무작정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일기를 쓰고 편지를 쓰고 내 기억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은 글이 되었고
쓰는 일만이 가장 큰 위안이 되던 중 시조를 배우게 되면서
[내가 미워하던 아버지와 오빠들의 이야기를 엿들어 시조에 매력을 느껴]
자연스럽게 시조에 빠져들었다. 결국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시조를 쓰도록 만든 것이다.
그때 나는 가뭄에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시조에 관한한
어느 것도 놓지지 않고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는지 시조의 정형률이 부자유스럽다거나
억압한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오히려 그것은 내 심장의 박동과 같은 것이었다.
평온히 노래하고 싶을 때는 평시조로 좀 더 긴 이야기를 하고싶을 때는 엇시조로
폭풍우 속을 휘달리고 싶을 때는 사설시조로
나의 상상력은 시조 안에서 자유로이 유영할 수 있었으며 그와 더불어 사는 것이 참으로 행복했다.
그러나 그렇게 좋아하던 시조를 포기해야 했었다.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흐린 날, 개인 날 시달림의 연쇄고리 속에서
현실과 이상과의 괴리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나는 네 발 달린 짐승이길 자처했다.
"이제부터 문학은 나하고 상관 없는 것이다. 다시는 문학을 생각조차 하지 않겠다."고
그동안 써 모은 습작노트를 모두 불태우고 독하게 마음 다져먹고 십 년쯤 살았다.
그러나 다 사라진 줄로 알았던 문학에 대한 열정이 그때까지도 살아 남아있었던지
쓰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그 어떤 불길에 휩싸여 무던히도 방황하다가
다시 쓰기 시작하였고, 다시 시작한 지 6년만에
중앙일보와 조선일보를 통해 시조인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남들은 시조를 시작하여 이, 삼 년이면 넘는 고개를 너무도 힘들게 넘어왔기에
그에 대한 사랑 또한 남다르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사람을 시조만큼 사랑 해 보지 못했다.
한 번 시조에 몰두하면 밥을 먹으면서도, 길을 걸으면서도,
차를 마시면서도, 잠을 자면서도 그를 생각한다. 그리고 시조의 각 장르를 두루 사랑하여
지금까지 내가 낳은 시조들 중 30%정도가 평시조의 그릇에 넘치는 것들이다
내가 낳은 시조가 내 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그것이 기형아이든, 칠불출이든, 아니면 미끈하게 잘 생긴 놈이든.
나는 확신한다. 내가 바라는 모든 것 또는 나의 신념들이 배신만을 안겨준 채 떠나고
사랑하는 사람들도 기억 저 편으로 하나 둘 떠나지만
오직 시조만이 나를 지켜주고 평생을 나와 함께할 것이라고.......
요즘 나의 최대 관심사는 시조의 저변 확대다.
우리만의 이 좋은 감칠맛 나는 시조를 내 이웃들과 함께 맛보며 사는 일이기 때문에
그리고 나처럼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에
시조에 관해 알고싶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든 대문 활짝 열어준다.
혹여 나의 이런 열정을 꼴에 시조의 질만 떨어뜨리고 있다는 질타를 하더라도 나는 달게 감수하리라.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돌무지탑(나순옥) / 낭송(이명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