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白石) 추억(追憶)
서고(書庫)에 묻혀있던 보물을 꺼내던 날
붓 꺽고 양(羊)치기로 삼수갑산 숨은 백석
그와 나 한 하늘 아래 살아가고 있을 줄이야.
배달9221/개천5922/단기4357/서기2024/08/10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어린이회관에서 <국립중앙도서관>으로 개관, 1983년 내가 공부할 당시의 모습, 현재는 1988 서초동으로 이전
백석 시집 『사슴』과의 인연에 대한 나의 추억
이제부터 시작하려는 이야기는 지금부터 약 40여 년 前,
필자가 남산에 있던 국립중앙도서관으로 공부하러 다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국립도서관이 지금은 서초동에 현대식 건물을 지어 이전한 것으로 아는데
그 당시에는 남산 중턱에 있었다. (지금은 다른 용도로 개조)
군 복무를 끝내고 복학한지 얼마 안 되어 고시공부를 준비하던 중이었는데
남들처럼 절간이나 고시원에 들어 갈 형편이 못되어 난 주로 국립도서관에서 공부를 하여야 했다.
그러나 좁디좁은 국립도서관의 도서실에서 고시공부를 한다는게 생각같이 쉬운일은 아니었다.
새벽 5시에 반지하의 자췻집에서 나와 시내버스를 타고 서울역에서 내려
허위허위 남산 비탈길을 올라 도서관 앞 안중근 의사 기념관 광장에 도착하면
이런저런 이유로 나처럼 여기서 공부하려는 학생들이 먼저 도착하여
좋은 자리 차지하려고 이삼백 미터 줄을 지어 서 있었던 모습이 눈 앞에 선하다.
그리하여 도서관에 입장하면
밤 10시 폐관할 때 까지 거기서 공부에 열중하였다.
그러한 여건에서 공부하느니 만큼 집중력있게 공부에 매진하였던 기억이 있는데
공부하고자하는 마음만 있다면 굳이 고시원이나 절간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기도 했었다.
당시는 중동특수(中東特需)가 단절되어 취직한다는게 하늘의 별따기여서
기술(技術)을 전공한 이들에게도 고시(考試)등 공무원 시험이 최고의 인기였었다.
그렇게 공부하여 1차는 몇 번 되었건만 2차에서 번번이 떨어져
결국 국영기업체에 취직하고 말았지만 지금 생각해보아도
나의 일생에 후회없이 마음껏 공부해 보았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 때 거기서 만나 같이 공부하던 사람들 중에는
지금은 내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사람들도 제법 있다.
나 자신도 그러했지만 사시, 행시, 외시, 기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여
모두 다 심산유곡의 절간이나 고시원에서 공부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도 그 때 깨달았다.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학교불문하고 꽤 많이 어울려 공부하였던 것이다.
각설하고... 이따금 머리를 식히려 가끔은 창 밖을 내다보곤 하였는데
창 밖의 세상은 나에겐 경외의 대상이었다.
몇 센티미터로 차단된 창 너머로 엄청나게 다른 풍경이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봄이면 남산 식물원 주위로 온갖 기화요초(琪花瑤草)가 흐드러지게 피었다간 지고,
가을이면 현란하게 울긋불긋한 단풍이 어우러진 창 밖의 풍경은
그때만해도 피끓는 청년이었던 나에게
고리타분한 도서관을 어서 뛰쳐나오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더구나 고즈넉한 공원 숲 사이사이로 쌍쌍이 거니는 데이트 족속들이
시야에 어른거릴 때면 나에게 한없는 부러움의 대상일 수 밖에 없었다.
그 때의 부러움으로 훗날 결혼 전 아내와 데이트라도 할 때면
남산이 우리의 약속 장소로 되기까지 하였었다.
또 한편으로는 그러한 창 밖의 풍경은 고요한 평정 속에서
공부에 몰두하여야할 젊은 나를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그러한 경계선 너머의 유혹을 참고서 공부하자하니
많은 사람들이 왜 고시원이나 절간을 찾아가는지 이해 할 것도 같았다.
그럴 때마다 그토록 미치도록 아름다운 창 밖의 풍경을 애써 피하려
도서관 바로 맞은 편 안중근 의사 기념관 앞 광장에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이라
각인(刻印)된 선돌(立石)에 눈길을 주며 이을 악 물고 공부에 매진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공부에 방해될까봐 아예 창 밖을 내다보지 않고
틈틈이 자유 열람실에 들어가 머리를 식힐 겸
나의 평소 관심 분야인 역사와 문학에 관한 책을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일반 도서관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한 책이 많이 있었다.
나는 어려서 증조부의 영향으로 그래도 한문에는 우리 동년배들보다도 조금 자신 있었기에
희귀한 한문 서적도 그 때 거기서 참 많이 빌려 보았던 것 같다.
그 당시 중앙도서관 사서주임이 미모(美貌)의 노처녀였는데
젊은 사람이 한문 서적을 빌려보는 것을 보고 호기심 있게 생각했나 보다.
나중에는 그녀와 친밀하게 이야기도 하고, 소장도서 중 희귀도서에 대한 정보도 알려주고,
절대 대출되지 않는 책(所藏本)까지 마구 빌려주는 것이었다. (여기까지만 이었음)
그녀 덕분에 당시에는 금기시(禁忌時)된(1988년 해금)
납북.월북작가들의 생경한 충격을 주는 이제껏 볼 수 없던 작품들도 접해 볼 수 있었다.
金起林(片石村), 韓雪野, 李箕英, 鄭芝鎔, 白石, 安含老, 林和, 李泰俊...
지금은 1988년부터 순차적으로 해금되어 다들 웬만큼 알지만
당시에는 입에 올리는 것조차 두려운 작가들이었다.(金○○로 표현)
徐廷柱(未堂), 李光洙, 柳致鎭, 金東煥, 朱耀翰등이 친일 부역 작가들이요,
오히려 납북.월북.재북작가들이 어떤 면에서는
민족의 자존(自尊)을 지킨 작가들이란 사실도 나는 이미 그 때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역사와 문학에 빠지다 보니 나중에는 고시공부는 뒷전으로 하고
그런 책들에 푹 빠져 틈틈이 많이도 섭렵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번번이 고시 2차에서 떨어졌는지도 모른다.)
남들은 죽어라고 고시공부만 해도 붙을둥 말둥인데 머리식힌다는 핑계로
하루에 몇 시간씩 그런 분야에 투자했으니 당연한 결과였을지 모르지만
지금 생각해도 후회는 없다. 오히려 그 당시에 그리 못했으면 지금 후회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서주임의 배려로
희귀본 100부 한정 출판된 조선총독부관인이 찍인
백석의 『사슴』을 볼 수 있었는데 보자마자 한마디로 푹 빠지고 말았다.
평안도의 구수한 사투리와 미끄러지듯 써 내려간 시의 흐름과 조화,
토속적이면서도 주지주의적 요소가 가미된 정제된 詩語...
그 때까지 접해본 어떠한 詩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 밀려왔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그 당시 연희전문 윤동주는 필사하여 외우다시피하였고
노천명의 시『사슴』에서의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 바로 백석이었을까?
나중에는 반납하기가 아쉬워 한 부 복사할 수 없는냐고 물었더니
고맙게도 사서주임이 당시로서는 고화질의 국립도서관 내부 복사기로 복사해 주어
집으로 가져와 본드로 스스로 제본하여 수시로 읽곤 하였었는데
나중에 보니 정본 1부가 어느 경매시장에서 7천만원에 낙찰되었다는 기사를 접한 기억이 있다.
그 뒤에도 백석에 대한 자료는 꾸준히 스크랩해 오고 있는데
백석 연구의 최고 권위자 중의 한 분인는 송준 작가가
중국과의 접경지역에서 백석의 아내 이윤희씨를 면담하여
백석의 해방이후 북한에서의 삶과 죽음과 북한에서의 시편들이 알려지기도 하였다.
5개국어에 능통하고, 누구보다도 자유주의자로
일본, 남행, 함주, 서행, 만주등지로
몸으로 뛴 체험으로 순수문학을 추구하던 그가,
가족을 버릴 수 없어 남행하지 않아 사상을 강요당하다가
“더러운 글을 쓰지 않고 번역만 할 것이다”라며
동화(童話)와 번역 활동으로 문학의 끈을 놓치지 않다가
종국에는 절대 자의가 아닌, 단지 살아남기 위한 목적으로
부역의 글에 손댈 수 밖에 없었던 그가,
40여년 전 국립도서관 수장고에서 『사슴』을 꺼내던 그 날에도
끝내는 30여년간 절필(絶筆)하고 오지의 삼수갑산에서
세상을 잊어보려 양치기 생활로 만년(晩年)의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니
한 하늘 아래에서 백석과 내가 숨쉬고 있었다는 자체가 기적이다.
본바탕이 순수문학이었던 그의 양심은
그러한 해방 후의 그의 글들이 후세에 남겨지길 원치 않았는지
아내 이윤희에게“지금까지 내가 쓴 모든 원고를 불태워라”라는 유언을 하였다니
해방 후의 그의 작품들은 절대 그가 추구하는 문학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하겠다.
배달9219/개천5900/단기4335/서기2002/2/6(초고)
배달9201/개천5902/단기4337/서기2004/7/2(퇴고)
배달9221/개천5922/단기4356/서기2023/9/9(삼고)
배달9222/개천5923/단기4357/서기2024/8/9(사고)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씀.
그 옛 건물은 변함 없는데 지금은 서울특별시교육청교육연구정보원으로 바뀐 모습
1984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정본을 복사, 제본하여 애독하던 시집 복사본 『사슴』
인터넷에서 입수할 수 있는 정본 『사슴』과 필자 소장 복사본 『사슴』의 대조 결과 관인 일치함.
40년 전 국립도서관에서 복사한 조선총둑부 관인이 찍힌 100부 한정판 『사슴』 복사본
함흥 영생고보교사 시절(1936-1938, 25세-27세)의 강의하는 백석의 모습(백석시 최고의 시기)
필자가 아버지에게서 물려 받은 표지는 훼손되었지만 내부는 온전한 한용운 저 『님의 沈默』 正本
국내 현대문학 서적 중 경매에서 역대 최고가를 기록한 책은 1926년 출간된 한용운 시집 ‘님의 침묵’의 초판본
으로 지난 2023년 2월 1억5100만원에 낙찰됐다. 김소월의 ‘진달래꽃’ 초판본(1925년)은 2015년 경매에서 1억
3500만원을 기록했다. 백석 ‘사슴’의 초판본(1936년)은 2014년 7000만원에 팔렸다. 고서 전문가 A씨는 “20세기
이후의 책 가격이 1억원이 넘는 경우는 유명인이나 독립운동가의 자필본 등 대단히 큰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책”
이라고 했다.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 초판본, 1억 3500만원에 낙찰…현대문학 경매 최고가 기록
우리나라의 대표적 서정시인인 김소월(1902~1934년)의 유일한 시집 '진달래꽃' 초판본이 현대문학작품으로는 경매
최고가인 1억 3500만원에 낙찰됐다. 2015년 12월 19일 서울 종로구 회봉문고에서 열린 경매에서 '진달래꽃'은
9000만원에 경매를 시작해 1억 3500만원에 새 주인을 찾았다. 경매에 나온 '진달래꽃'은 매문사가 지난 1925년 12
월26일 내놓은 것으로 당시 정가 1원20전이었다. 저작 겸 발행인은 김소월의 본명인 김정식(金廷湜)돼 있다. 지금
까지 최고 경매가 기록은 지난해 7월 7000만원에 낙찰된 백석(1912~1996년)의 시집 '사슴'이었다
고독(孤獨) / 낭송 봉경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