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아름다운 문학

<길영효> 더운냉장고 / 바위 / 단풍 / 눈오는날의소묘

이름없는풀뿌리 2023. 8. 23. 19:07
더운 냉장고 - 길 영 효 - 누군가 문을 열고 들여다보는 걸 숙명이라 여기며 산다 내 안에 들끓는 욕망도 문 가까이 서서 기다린다 ​ 김치 통, 멸치, 가지나물, 정수물병 스스로 세상을 보지 못하는 그들의 눈이 되어 주며 생각을 얼리고 말도 잃어버린다 ​ 꽁꽁 얼면 얼수록 그 가슴 열정은 반비례하고 뜨거움이 뜨거움을 넘어 심지에 닿으면 차가움이 되는 것일까 ​ 문 스치는 발소리, 다시 세상 열리는 순간, 불빛이 터트리는 함성으로 문 앞에 서성이던 고독이 무너진다 바 위 - 길 영 효 - 비가 내리고 바람이 가버리면 개울가 덩그러니 남은 몸뚱어리 하나 ​ 햇볕에 온몸이 달구어져 한꺼풀, 한꺼풀 제 옷을 벗고 고운 모래가 된다. ​ 나이가 후르르 무너진다. 계곡의 나무보다 더 먼저 시간의 나이테를 지워내고 ​ 안팎으로 환해지는 삶 생각도 물에 실려 보내며 물빛처럼 산다. 단 풍 - 길 영 효 - 바람 속으로 끌려가지 않으려 온몸이 발갛게 달아오르다가 하늘까지 불태운다 ​ 가벼워지고 싶은 저 것 푸른 가슴에 꼭 쥐고 있던 산 비밀 불태우고 있다 ​ 햇살아래 살면서도 먼, 그 속을 감싸 쥐고 머뭇거리던 아내 닮은 너 ​ 눈에, 가슴에, 무심한 듯 아린 저 것 눈 오는 날의 소묘 - 길 영 효 / 2002/12/04 - 1. 해 묵은 뼈가 부러지는 하늘 얼마나 괴로웠는지 갖은 것 다 버리고 제 살을 뜯어내고 있으니 ​ 2. 많은 날의 기억 지워내며 너무나 뜨거웠던 날의 편린들 아린 아픔들이 부서지고 있다 ​ 3. 한 치 떨어져 바람이 지나친다 어둠이 어깨를 흔들면 흔들수록 좁혀오는 모든 소리들이 떠내려간다 ​ 4. 긴 행렬 속으로 눈길들 뛰어들어 곁에 있으면서도 가깝지 않은 쓸쓸한 투신을 붙든다 가슴 무거워 지는 도로가 신경통을 일으킨다 액자 속 해바라기 - 길 영 효 / 2002/12/13 - 1. 나 관중이 필요치 않는 벽 잠시도 쉬지 않는 눈동자들 틈바구니 누구의 자취를 묻고 있나 비바람의 계절 창밖으로 돌려보내고 형광등 빛에 온 몸을 적셔대며 맞은 편 거울만 바라보며 삭고 있다 한 오라기씩 ​ 2. 너 북방으로부터 시위를 떠난 추위 모든 것 물어뜯어 속 태우는데, 뼈다귀만 남은 도시의 화단 경적은 하늘을 오르다 떨어져 부서지고 사각지대, 소리도 부러지는 길가 모욕의 눈길로 너는 누워 있다 ​ 3. 그​ 스스로 유기체이길 포기해야 하는 겨울, 지폐만이 대접받는 혹독한 신용불량의 계절 폭염 속을 뛰어다니며 물과 불의 마지막 승부를 겨루던 여름이 부서져 하얗게 곤두박질하고 있다 ​ 4.그리고, 나​ 햇살 내리쬐는 들판과 함께 잡혀 온 사각의 링, 참혹한 영생의 길에 빠져든 한 평도 안되는 감옥, 갇혀 있는 내겐 비워낼 심장조차 없어 향은 그만 필요치 않다 봄날 도시는 일어선다 - 길 영 효 / 2003/03/12 - 논과 밭이 해금되는 날 바쁜 것은 풀뿌리의 일인데 추위를 건너온 숱한 발자국들 푸른 초원을 차곡차곡 채우고 있다 일어서는 일이 주저앉는 일보다 좋은 봄날 인스턴트 도시의 인생은 빨리 빨리로 무르익는다 그래 봄날의 도시엔 푸른 초원이 회색으로 익고 있다 한자락 한자락 콘크리트 담장엔 피지 않던 우담바라 페인트로 환생하고 있다 늦게 좀더 늦게 이루어지면 좀더 멀리 살 것인데 한번에 단 한번에 이루어지기 위하여 도시의 삶은 서둘러야 하는 것 걸어온 발자국은 꿈속에나 처박아 두고 달려갈 도로를 쳐다 봐야 하는 것 그래 다가올 그 무엇을 위하여 심장의 엔진이 다 꺼질때까지 별들이 밤을 이루듯이 날고 기는 벚꽃처럼 도시는 오늘도 온몸을 불사르고 있다 저 네온사인이 순간을 사랑하는 만큼 무엇이 이 도시를 재촉하고 있다 ​ 봄빛이 걷는 도시는 그대로인데 - 길 영 효 - 교차로엔 바퀴들이 앞서 달리고, 따라 일어서는 소리들 불편한 마음 바람에 기대며 휑한 눈으로 따라 가는 도로, 성근 발 밑에 어둠을 내려놓는 빌딩, 옷깃 끌어당기며 발길을 다그치는 신호등, 어둠을 걷어내며 고개 숙인 가로수의 노곤한 아침, 하루의 실밥이 툭 터지며 해가 떠오른다 무작정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 서면 벽 위 해바라기 그림이 눈물겨운데 문밖에서 기웃거리는 햇살들은 봄 눈 뜬 나뭇가지와 도로를 들락거리며 온몸으로 엉킨 세상을 풀어낸다 두고 가야할 세상 그리움만 들고 살아야 하기에 기억의 주머니 비워 새 다짐을 하고있는 책상 위의 봄꽃 나무들 이제 다시 피려는지 몸을 떨고 빈 사무실엔 봄빛만 자유로이 드나들고 있다 정거장 - 길 영 효 / 2003/03/19 - 유리창은 오늘도 누군가 왔다 갔다고 손가락 글씨를 들고 있다 누구를 기다리는지 광고지 위에선 사발면이 팔팔 끓는다 ​ 그리움이 솟구치고 있다 정적을 움켜쥔 채, 바람 불 때 마다 국물이 흘러 넘친다 바람에 풀어 헤쳐지는가 불현듯 뚝뚝 부러지고 있다 ​ 얼마나 기다렸는지 바람이 차를 밀고, 비가 길을 내고, 눈이 나를 덮을 때까지 기다림도 그만큼의 그리움을 키우고 있다 ​ 샐러리맨 - 길 영 효 / 2003/11/11 - 죽겠네 비틀거린다 어렵네 찡그린다 바쁘네 숨을 죽인다 못 지내 작은 숨만 쉰다 울 고 싶네 하늘을 본다 어정쩡한 모습이 정신을 뺏긴다 내일에 더 친숙한 고통을 배운 다 지하철에 더 잘 어울리는 날개를 접는다 옆을 기웃거리며 어깨 굽은 몸을 추스린 다 횡단보도를 서두르며 두리번거린다 붕어빵 가게 앞에서 붕어빵 몇 개에 목젖을 드 러낸다 지나는 아이를 보고 지나온 날들을 그리워하며 숨을 들이쉰다 날개 없이 마음 은 언제나 날고 있는 눈을 감는다 모르는 것이 많아 보여 서서히 굳어간다 길 물어 보 는 사람에게 그저 미소지으며 미동도 않는다 주머니에 돈이 없어도 마음은 푸근하다 ​하루살이는 어둠을 부수던 밤 - 길 영 효 - 발소리 소란하던 밤 다락방엔 상자하나 테이프에 칭칭 감긴 채, 쪼그리고 졸고 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쪽 테이프가 터져 귀퉁이를 벌리고 있다 드나드는 달빛에 상자 속에서는 어떤 추운 기억이 바스락거리는지 쉴새없이 귀퉁이를 뚫고 나오는 소리 소리 숱한 기억들이 깨어나고 있다 배고픈 발걸음들 물이 새는 수도꼭지들 일어서고 있다 가슴을 두드리며 삶을 쏟아내는 물줄기, 희망을 들고 미끄러진다 어둠을 끌고 나가고 있다 제 집을 찾아 달려 나간다 약방의 네온싸인 앞에서 때에 절은 옷을 입은 어머니의 웅크린 절망이 무너진다 삶의 여백에 말없는 불빛이 채워지고 어둠이 부서진다 추억들이 부서진다 불현듯 바람이 달려와 옆구리가 터진 상자를 세우고 사라지고 상자는 다 채워지지 않은 한 아이의 꿈을 품고 주저앉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