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아름다운 문학

<강은교> 싸움 / 우리가 물이 되어

이름없는풀뿌리 2023. 8. 22. 19:09
싸 움 - 강은교 - 모래밭으로 갔다. 어디인가로 바삐 가는 작은 게 한 마리를 만났다. 어이 - 나는 작은 게를 불러 세웠다. 내 그림자가 그 녀석 위로 폭포같이 쏟아졌다. 게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멈칫 그림자를 옮겨주었다. 작은 게는 헐떡거렸다. 그러다 나를 향해 발딱 돌아섰다. 열 개의 발들이 하늘을 향하여 곤두섰다. 그 중 한 개가 구름 위로 우뚝 올라섰다. 집게발이었다. 분홍 집게발, 겁에 질린 - 칼날 발톱 위로 헉헉 숨소리가 뿌려졌다. 멈칫, 내가 뒤로 물러서자, 그 녀석은 집게발을 내리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힐끔힐끔 뒤돌아보며, 새파란 곁눈질, 나는 다시 따라갔다. 그 녀석 다시 분개하여 분홍 집게발 - 위로 한껏 올림 - 나 또 멈칫, 그림자를 치워줌. 그 녀석 다시 달리기 시작. 나 다시 따라감. 그 녀석 다시 헉헉 - 숨소리 앉은 집게발. 하늘로 솟구친 작디작은 분홍 집게발 ​ 땀방울을 뚝뚝 흘리며 햇볕 하나가 바삐 지나고 있엇다. 한 여름날 오후. ​ 우리가 물이 되어 - 강은교 / 시집<우리가 물이 되어> (1986) -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