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望 춘망
- 杜甫 두보(712 ~ 770) -
國破山河在(국파산하재) 나라는 깨졌어도 산하는 남아 있어
城春草木深(성춘초목심) 성안에 봄이 오니 초목이 무성하다.
感時花濺淚(감시화천루) 때를 느꼈는지 꽃도 눈물을 뿌리고
恨別鳥驚心(한별조경심) 이별이 서러운지 새도 놀란 듯 운다
烽火連三月(봉화연삼월) 봉홧불 석 달 동안 연달아 이어지니
家書抵萬金(가서저만금) 집에서 오는 편지는 만금보다 값지네.
白頭搔更短(백두소갱단) 흰머리 긁으니 다시 짧아지고
渾欲不勝簪(혼욕불승잠) 아예 비녀조차 이기지 못하는구나
* 杜甫 두보(712~770) : 이백과 함께 중국의 최고 시인으로 일컬어진다. 두보는 7세 때부터 시를지
었다는 조숙한 소년이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뤄양의 숙모 밑에서 자랐는데 그의 시에 대한 재능
은 일찍이 뤄양의 명사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과거에 급제를 하지 못하고 곤궁한 생활을 계속
해야 했다. 두보의 눈은 차츰 사회의 모순으로 향하게 되었고, 그의 시는 사회의 불합리한 실정을 여
실히 그려냈다. 두보는 "부잣집에서는 술과 고기냄새가 나지만, 길에는 얼어죽은 해골이 뒹굴고 있다
"고 하며 빈부의 차가 너무나도 현격한 세상에 대해 분노를 토로했다. 계속되는 전란 속에서 관직 생
활과 귀향의 길을 오가면서 병을 얻어, 겨우 연명하다가 고된 일생을 마쳤다.
春望詞 춘망사
- 薛濤 설도(768 ~ 832) -
花開不同賞(화개불동상) 꽃 피어도 함께 즐길 이 없고
花落不同悲(화락불동비) 꽃 져도 함께 슬퍼할 이 없네.
欲問想思處(욕문상사처) 묻노니, 그대는 어디에 계신고
花開花落時(화개화락시) 때 맞춰 꽃들만 피고 지누나.
攬草結同心(람초결동심) 풀을 따서 이 마음과 묶어
將以遣知音(장이유지음) 지음의 님에게 보내려 하나
春愁正斷絶(춘수정단절) 봄날 시름에 님 소식 속절없이 끊기고
春鳥復哀吟(춘조복애음) 봄새만 다시 찾아와 애닲이 우는구나.
風花日將老(풍화일장로)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佳期猶渺渺(가기유묘묘) 만날 날은 아득 타 기약이 없네.
不結同心人(불결동심인)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空結同心草(공결동심초)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가.
那堪花滿枝(나감화만지) 어찌 견디리 가지 가득 핀 저 꽃이여
煩作兩相思(번작양상사) 괴로워라 사모하는 이 마음 어이할꼬
玉箸垂朝鏡(옥저수조경) 눈물이 주루룩 아침 거울에 흐르네.
春風知不知(춘풍지부지) 봄바람, 넌 이런 내 마음을 아느냐 모르느냐.
* 春望詞(춘망사-7세기 중국 시인 설도薛濤의 글) 唐, 中期 대표적 女流詩人 薛濤의 五言絶句.
文學的 재능이 뛰어나, 當代의 고관, 文士들과 교유하였고 四川 按撫使 위천(韋泉)이 그 후견인이 되
어 보살피다 죽은 후, 홀로 살았다 한다. 이 詞는 그녀가 나이 들어 만난 知音, 元縝과 마음을 허락
하여 사모하여 지은 시라 하며, 설도는 나이 40세의 독신녀였고 원진은 처가 있는 10세의 연하의 관
리였으니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이었으리라.
* 同(동) : 한가지 "동"자인데, 여기서는 <함께 하다>의 뜻.
* 欲問(욕문) : "꽃 피고 질 때면, 당신은 무슨 생각을 아느냐" 고, 님이 계신 쪽에 대고 외쳐 보고 싶다.
* 攬草(람초) : 풀을 손에 들고. 즉, 풀 뜯어 내어.(攬람 : 손에 들 람)
* 遣知音(견지음) : 벗(知音之己)에게 (내 마음을 전하도록) 보내다.
* 春鳥復哀吟 : 봄 새가 다시 슬피 우니, 잘라내려 하던 相思之情이 다시 샘 솟음을 어찌 할 수 없노라.
* 風花(풍화) : 바람이 불어서 꽃들이~. 風(풍)은 여기서 動詞.
* 日將老(일장노) : 나날이 문득 노쇄해 지다. 日은 부사.
* 空結(공결) : 매듭을 지어도, 님이 계시지 않으니 <헛된 매듭>이다.
* 同心草(동심초) : 풀이름이 아니고 편지를 말함.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는 '쓸데없이 편지
만 접었다 폈다한다'라 해석. 부치지도 못할 편지 써놓고 하릴없이 접었다 폈다하는 여인의 애타는
심정을 그린 것이며 同心結은 옛날 연애편지를 접는 방식 또는 그 편지라고 한다.
* 那堪(나감) : 어찌 견디나.
* 堪(감) : 감당할 감, 견딜 감.
* 飜作(번작 : 날아서 짓다.
* 兩相思(양상사) : 양측의 相思情. 또는 곱 절이나 되는 상사의 마음.
* 玉箸(옥저) : 옥으로 만든 젓가락. 여기서는 두 줄기 맑은 눈물.
* 설도(薛濤, 768년? ~ 832년)는 당나라의 시인이다. 자는 홍도(洪度)이다. 장안 사람으로 아버지 설
운을 따라 성도(成都)에 왔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음률에 밝아 나이 8세에 시를 짓기도 했다고 한
다. 그러나 14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가세가 기울어 16세에 기녀가 되었다. 두보가 죽은 해에 그녀의
나이는 서너 살 정도였다. 원래는 장안(長安) 출생이었지만, 사천성 성도(成都)의 자사(刺史)로 부임
한 부친을 따라 성도에 와서 살게 되었는데, 부친은 반란을 진압하는 도중에 전사하게 되고, 곧 이어
모친도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자, 아무데도 의지할 곳이 없게 되고 먹고 살길이 막막해진 그녀는
결국 악기가 된다. 악기(樂妓)란 기예(技藝)는 팔아도 몸은 팔지 않는다는 고급 기녀이다. 당시 무원
형, 이이간, 단문창(段文昌), 이덕유 등의 명사들과 교류하였다. 일류 문인들 백거이(白居易), 원진
(元鎭), 유우석(劉禹錫), 두목(杜牧) 등과도 교류하였다. 시성(詩聖) 두보는 만년에 성도의 서쪽 교
외에 있는 완화계(浣花溪)라 불리는 시냇가에 옆에 초당(草堂)을 짓고 살다가 죽었는데, 설도도 만년
에 그 근처로 와서 음시루(吟詩樓)라는 집을 짓고 살았으며, 집에는 항상 창포(菖蒲) 꽃과 대나무가
가득했다고 한다.
특히 설도가 열여덟 살 때 서천절도사로 부임해 온 위고(韋皐)라는 이는 그녀를 몹시 아껴, 자주 막
부(幕府)에서 여는 연회에 그녀를 불러 시를 짓도록 하였으며, 조정에 비서성(秘書省)의 교서랑(校書
郞)직에 임명해달라는 주청을 올리기도 하였는데, 주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이후 그녀는 문인들
로부터 여교서(女校書)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위고의 조카 위정관이 과거에 급제해 관리가
되었을 때 설도가 그에게 보낸 구애의 시가 위고의 귀에 들어가게 되고, 위고는 설도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그녀를 송주로 보내버렸다. 송주에서 설도는 십리시(十離詩)를 지어 위고에게 용서를 구했지
만, 위고는 설도를 성도로 불러들이는 대신 기적(妓籍)에서 지우고 막부에서도 내쫓아버렸다. 이후
성도에 감찰어사(監察御史)로써 부임해 온 원진(元鎭)과 알게 되어 4년을 보냈는데, 설도가 먼저 원
진을 떠나고 원진도 다른 관직에 임명되면서 장안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금강 포구에서 배를 타고 출
발하는 원진을 설도가 만나러 왔지만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헤어졌고, 원진이 떠난 뒤 설도는
사랑의 시를 써서 원진에게 보냈으며 원진 역시 기증설도라는 시로 대답했지만, 이후 원진이 새 부임
지 절강에서 유채춘이라는 연극배우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된 설도는 이후 다시는 남자를 만
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만년에는 여도사의 옷을 입고 벽계방에 살면서 음시루를 세웠다(현
존하는 것은 청대에 다른 곳에 세워진 것으로 이름만 따온 것일 뿐이다).
부친이 사망하자 가세가 기울어 16세에 악적(樂籍 : 기예는 팔아도 몸은 팔지 않는 고급기녀)에 올랐
다. 설도는 문학적 재능뿐만 아니라 총명하고 말재주도 뛰어났다. 그녀는 당시 사천 절도사 위천(韋
泉,위고)이라는 사람의 총애를 받았다. 설도를 공식적인 관명인 교서(校書)를 부여해 주었고, 후세에
기녀를 교서라 칭하게 된 유래다. 위천은 805년(설도 나이 약 35세)에 사망했다. 설도는 위천 사망후
악적(樂籍)에서 나오게 된다. 원진은 백거이와 아주 절친한 관계였고 그와 더불어 알기 쉬운 새 시풍
을 개척했는데, 소동파는 이를 일러 원경백속(元輕白俗)이라고 평하였다. 원진은 권력 다툼에 중앙에
서 밀려나 대략 809년 동천(東川, 혹은 통주(通州))에 좌천되었다. 809년 설도와 원진이 처음 만났
다. 당시 원진은 동천으로 좌천되어 와 있었는데 설도의 문명(文名)을 듣고 방문하게 된 것이다. 설
도 역시 원진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설도는 시를 쓰기위해 직접 목부용(木芙蓉)을 원료로
양질의 종이를 발명하였는데 당대 풍류인들에게 좋은 평을 받으며 설도전, 완화전이라는 이름을 얻고
당시대에 크게 유행하게 된다. 이 아름다운 색종이에 원진과의 애뜻한 사랑의 시를 쓰며 서로 주고
받았는데 일종의 러브레터이다. 두 사람은 이별을 할 때, 동그란 벼루를 반으로 나누어서 하나씩 간
직하면서, 다시 만나 반쪽이 된 벼루를 동그랗게 만들 날을 기약하였다. 그러나 원진의 은사였던 위
하경(韋夏卿)이 자신의 질녀(姪女)를 중매하게 된다. 은사의 질녀 위(韋)씨녀는 원진을 사랑하여 그
벼루 반쪽을 강물에 던저버렸다. 설도는 악기(樂妓)였던 자신의 한계와, 원진보다 10년 정도 연상이
었고, 천한 집안은 아니었지만 명문 출신도 아니었다, 설도의 나이 40세, 이미 청춘을 벗어나고 있었
으므로 자신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아픔을 감내할 수 밖에 없었다. 40세나 되어서야 마음을
줄 수 있는 정인을 만난 설도는 사랑은 찾았으나 영원히 마음을 엮을 수 있는 동심인(同心人)이 되지
는 못한 것이다. 설도는 비록 원진과 함께 할 수는 없었지만 죽을 때까지 원진을 사랑했고 평생 독신
으로 살았다. 설도는 만년에 두보가 살았던 성도의 서쪽 교외 완화계(浣花溪)에 초당을 짓고 은거하
며 살았는데 설도도 그 근처에 음시루(吟詩樓)라는 집을 짓고 살았으며 집에는 항상 창포와 대나무가
가득 했다고 한다. 지금도 성도의 망강공원 주위에는 그녀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대나무가 숲을 이루
고 있으며 그녀의 시 91수가 전해진다.
설도의 무덤은 중국 쓰촨성(四川省) 청두시(成都市) 우허우 구(武侯區) 망강로(望江路)에 조성된 망
강루공원(望江楼公园) 북서쪽 대나무 숲 속에 있으며, 묘비는 그녀의 묘지명과 함께 당시 검남절도사
로 있던 단문창이 서천여교서설도홍도지묘(西川女校書薛濤洪度之墓)라고 써 주었고 한다. 1994년에
다시 '당여교서설홍도묘'(唐女校書薛洪度墓)라고 쓴 비석이 세워졌다. 설도의 문집으로 《금강집》
(锦江集) 5권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전당시》(全唐诗)에 그녀의 시 한 편이 수록
되어 있다. 완화계(浣花渓)에 머물면서 그녀는 백거이(白居易) ・ 원진 ・ 우승유(牛僧孺) ・ 영호초
(令狐楚) ・ 장적(張籍) ・ 두목(杜牧) ・ 유우석(劉禹錫) 등의 문인과도 교류하며 명기(名妓)로 알
려졌다. 장위(張為)가 지은 시인주객도(詩人主客図)에는 설도의 시를 청기아정(清奇雅正)이라 평하며
가도(賈島) ・ 방간(方干) ・항사(項斯) 등과 같은 반열에 두었다. 원(元)의 신문방(辛文房)은 설도
의 시를 두고 「정(情)이 필묵에 가득하고 한원숭고(翰苑崇高)하다」고 하였으며, 청(清)의 《사고제
요》(四庫提要)에서는 「주변루(籌邊楼)」라는 시에 시정의 여성으로는 보기 드문 우국(憂国)의 정이
담겨 있다고 지적하였다. 현대의 호운익(胡雲翼, 1906년-1965년)은 「당시의 문인 명사와 교류하며
그 영향을 받아 기교는 숙련되어 있으나 솔직한 감정을 표출하지는 못했다」고 평가하였다. 기녀였던
설도로써는 사교 및 접대가 중요한 일이었기에, 예술가라기보다는 직업인으로써의 기능적인 작풍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설도의 시 《춘망사》(春望詞) 4수 가운데 세 번째 시는, 김억이 한국
어로 번역하고 김성태가 곡을 붙여 《동심초》(同心草)라는 제목의 가곡으로 개작하였다.
시조(時調) 춘망사(春望詞)
- 薛濤(설도)의 춘망사(春望詞) -
꽃피고 시드는데 나 홀로 보고 있네
임이여 말 하소서 어디에 계신가요
저 꽃은 무정하게도 나 몰라라 합니다.
풀잎에 내 마음을 묶어서 보내려해도
시름에 소식 끊겨 어찌할 바 모르겠는데
봄새만 다시 찾아와 애달프게 웁니다.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다 져가고
만날 날 아득해서 기약조차 없는데
쓴 편지 부치지 못하고 접었다 폈다 합니다..
꽃들이 지는 것도 나를 닮아 서럽네요
주르륵 흘린 눈물 거울을 적시는데
무심한 저 봄바람은 속절없이 붑니다.
동심초(同心草) / 설도 시, 김억 역, 김성태 곡, 송광선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