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아름다운 문학

<노천명(친일)> 사슴/자화상/장날/고독/별을/푸른오월/남사당/이름없는/누가

이름없는풀뿌리 2023. 10. 13. 08:02
사 슴 - 노천명 / <산호림>(1938) -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族屬)이었다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 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 어찌할 수 없는 향수(鄕愁)에 슬픈 모가질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자화상 - 노천명 / 시집 『산호림』, 1938 - 5척 1촌 5푼 키에 2촌이 부족한 불만이 있다. 부얼부얼한 맛은 전혀 잊어버린 얼굴이다. 몹시 차 보여서 좀체로 가까이하기 어려웠다. 그린 듯 숱한 눈썹도 큼직한 눈에는 어울리는 듯도 싶다마는..... 전시대(前時代) 같으면 환영을 받았을 삼단 같은 머리는 크럶지한 손에 예술품답지 않게 얹혀져 가냘픈 몸에 무게를 준다. 조그마한 거리낌에도 밤잠을 못 자고 괴로워하는 성격은 살이 머물지 못 하게 학대를 했을 게다. 꼭 다문 입은 괴로움을 내뿜기보다 흔히는 혼자 삼켜 버리는 서글픈 버릇이 있다. 삼 온스 의 살만 더 있어도 무척 생색나게 내 얼굴에 쓸 데가 있는 것을 잘 알건만 무디지 못한 성 격과 타협하기 어렵다. 처신을 하는 데는 산도야지처럼 대담하지 못하고 조그마한 유언비어에도 비겁하게 삼간다. 대(竹)처럼 꺾어는 질지언정 구리처럼 위어지며 꾸부러지기가 어려운 성격은 가끔 자신을 괴롭힌다. * 부얼부얼한 : 살이 쪄서 탐스럽고 복스러운 * 심단 같은 머리 : 숱이 많으면서 길고 가지런한 머리, 삼단은 삼(麻)을 묶은 단. * 클럼지한 : 볼품없는, 흉한, 장날 - 노천명 / 시집 『산호림』, 1938 - 대추 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 이십 리를 걸어 열하룻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 막내딸 이쁜이는 대추를 안 준다고 울었다. 송편 같은 반달이 싸리문 위에 돋고 건너편 성황당 사시나무 그림자가 무시무시한 저녁 나위 방울에 지깔이는 소리가 고개를 넘어 가차워지면 이쁜이보다 삽살개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 * 돈사야 : 팔아야 * 열하룻장 : 열하룻날 서는 대목장 * 가차워지면 : ‘거까워지면’의 사투리 고독 - 노천명 / <산호림>(1938) - 변변치 못한 화를 받던 날 어린애처럼 울고 나서 고독을 사랑하는 버릇을 지었습니다. ​ 번잡이 이처럼 싱그러울 때​ 고독은 단 하나의 친구라 할까요. ​ 그는 고요한 사색의 호숫가로 나를 달래 데리고 가 내 이지러진 얼굴을 비추어 줍니다. ​ 고독은 오히려 사랑스러운 것 함부로 권할 수 없는 것 아무나 가까이하기 어려운 것인가 봐요. 별을 쳐다보며 - 노천명 / <산호림>(1938) - 나무가 항시 하늘로 향하듯이 발은 땅을 딛고도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 갑시다. 친구보다 좀 더 높은 자리에 있어 본 댓자 명예가 남보다 뛰어나 본 댓자 또! 미운놈을 혼내주어 본다는 일 그 까짓 것이 다아 무엇 입니까? 술 한잔 만도 못한 대수롭 잖은 일들 입니다 발은 땅을 딛고도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 갑시다. 푸른 오월 - 노천명 / <산호림>(1938) - 청자(靑瓷)빛 하늘이 육모정[六角亭] 탑 위에 그린 듯이 곱고, 연못 창포잎에 여인네 맵시 위에 감미로운 첫여름이 흐른다. 라일락 숲에 내 젊은 꿈이 나비처럼 앉는 정오(正午) 계절의 여왕 오월의 푸른 여신 앞에 내가 웬 일로 무색하고 외롭구나. 밀물처럼 가슴속으로 몰려드는 향수를 어찌하는 수 없어, 눈은 먼 데 하늘을 본다. 긴 담을 끼고 외딴 길을 걸으며 걸으며, 생각이 무지개처럼 핀다. 풀 냄새가 물큰 향수보다 좋게 내 코를 스치고 청머루 순이 뻗어 나오던 길섶 어디메선가 한나절 꿩이 울고 나는 활나물, 호납나물, 젓가락나물, 참나물을 찾던 잃어버린 날이 그립지 아니한가, 나의 사람아. 아름다운 노래라도 부르자. 서러운 노래를 부르자. 보리밭 푸른 물결을 헤치며 종달새 모양 내 마음은 하늘 높이 솟는다. 오월의 창공이여! 나의 태양이여! * 육모정 : 육각정(六角亭). 여섯 개의 기둥으로 여섯 모가 나게 지은 정자. * 창포 : 천남성과의 여러해살이풀. 높이는 70~100cm이며, 온몸에 향기가 있다. 뿌리줄기는 통통하고 마디가 많으며, 잎은 뿌리줄기에서 모여 나고 가는 선 모양이다. 6~7월에 연한 노란색을 띤 녹색 꽃 이 핀다. 뿌리는 약용하고 단옷날에 창포물을 만들어 머리를 감거나 술을 빚는다. 남사당(男寺黨) - 노천명 / <삼천리 9호>(1940. 9) - 나는 얼굴에 분(粉)칠을 하고 삼단 같은 머리를 땋아내린 사나이 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 날라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르고 나는 향단(香丹)이가 된다. 이리하여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어 램프불을 돋운 포장(布帳) 속에선 내 남성(男聲)이 십분(十分) 굴욕되다. 산 넘어 지나온 저 동리엔 은반지를 사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 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나는 집시의 피였다.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우리들의 도구(道具)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의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라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 초립 : 주로 어린 나이에 관례를 한 사람이 쓰던 갓. * 쾌자 : 소매가 없고 등솔기가 허리까지 트인 옛 전투복. 명절, 새해에 복건과 함께 어린아이가 입는다. * 조라치 : 원뜻은 절에서 청소 등의 일을 하는 하인이지만, 여기서는 남사당패의 구성원을 가리킨다. * 날라리 : ‘태평소’의 잘못 * 집시 : 코카서스 인종에 속하는 소수의 유랑민족으로 미신적이고 쾌활하고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점쟁이, 가수, 말 장수 따위의 일로 생계를 꾸린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방랑 생활을 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 노천명 / <산호림>(1938) -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에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오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오 누가 알아주는 투사냐 - 노천명 / - 자신없는 훈장이 내게 채워졌다 어울리지 않는 표창이다 五等 콩밥과 눈물을 함께 씹어 넘기며 밤이면 다리 팔 떼어놓구 싶게 좁은 잠자리에 줄이 틀리우고 날이 밝으면 날이 날마다 걸어보는 소망 이런 하루하루가 내 피를 족족 말리운다 이런 것 다 보람 있어야 할 투사라면 차라리 얼마나 값 있으랴만 나는 무엇을 위해 이 고초를 받는 것이냐 누가 알아주는 투사냐 붉은 군대의 총부리를 받아 대한민국의 총부리를 받아 새빨가니 뒤집어쓰고 감옥에까지 들어왔다 어처구니없어라 이는 꿈일 게다 진정 꿈일 게다 밤새 전선줄이 잉잉대고 울면 감방안에서 나도 운다 땟국 젖은 겹옷에서 두고 온 집 냄새를 웅켜 마시며 마시며 어제도 꿈엔 집엘 가보았다​​ * 노천명(盧天命,1912~1957) 황해도 장연 출생. 5세때 홍역으로 사경을 넘겼하여 본명인 기선(基善)을 천명(天命)으로 고친 채 아들 낳기를 바라는 부모의 뜻에 따라 남장으로 자랐다. 진명여자보통고등학교 졸업. 이화여자전문 영문과 졸업. 조선중앙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 기자를 지냈다. 1932년 <신동아>지에 <밤의 찬미>를 발표한 이후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1938년 조선문학예술동맹 참여, 극예술연구회에 참가해서 연극에 출연하기도 했다. 1951년 일제 부역의 혐의로 9,28 수복 후 투옥 1955년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56년 <이화 70년사>를 편찬한 후 건강이 악화되어 1957년 3월에 뇌빈혈로 입원했다가 6월에 사망했다. 시집으로는 <산호림>(1938), <창변>(1945), <별을 쳐다보며>(1953), <사슴의 노래>(1958), <노천명 시집>(1972)등이 있다 1911년 황해도 장연에서 출생했다. 부친 사망 이후 1919년 경성(京城)으로 이사, 진명(進明)보통학교 를 거쳐 1930년 진명여학교를 졸업했다. 그해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에 입학했고 재학 당시 「밤의 찬미」(『신동아(新東亞)』 1932년 6월호)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33년 조선아동예술연구협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34년 졸업 이후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에 입사, 학예부 기자로 근 무했다. 같은해 부터 1938년까지 극예술연구회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1935년 『시원(詩苑)』 동인으 로 활동했다. 1937년 조선중앙일보사를 사직하고 잡지 『여성(女性)』(조선일보사 발생)의 편집을 담 당했다. 1938년 대표작인 「사슴」을 비롯한 「자화상」 등이 실린 시집 『산호림(珊瑚林)』을 출간 했고, 잡지 『신세기(新世紀)』 창간에 참여했다. * 노천명(盧天命)의 반민족 부역 행위 2002년 민족문제연구소등 5개 단체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문학인 42인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명단 5,207명중 친일 시인(詩人)이 있는데 그들은 곧 미당을 비롯한 12인이 있기에 우리는 꼭 기억하여야만 할 것이다. 김동환(金東煥), 김상용(金尙鎔), 김안서(金岸曙), 김종한(金鍾漢), 김해강(金海剛), 노천명(盧天命), 모윤숙(毛允淑), 서정주(徐廷柱), 이찬(李燦), 임학수(林學洙), 주요한(朱耀翰), 최남선(崔南善)이며 노천명의 반민족 행위는 1941년 8월 조선문인협회 간사가 되었고, 그해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결전문화대강연회(決戰文化大 講演會)에 참가하여 시를 낭독했다. 그해 12월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산하 부인대(婦人隊) 간사를 맡았고, 후방인 '총후(銃後'에서 여성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전쟁은 이제부터 본격시작 – 동 양의 평화를 지키자」(『매일신보』 1941.12.12)를 기고했다. 1942년 일본군의 무운을 비는 「기원 (祈願)」(『조관(朝光)』 1942.2),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당위성을 강조한 「싱가폴 함락」(『매일 신보』 1942.2.19)·「노래하자 이 날을」(『춘추(春秋)』 1942.3) 등의 시를 썼고, 5월 조선임전보 국단 주최로 '건국의 새 어머니가 될 우리의 감격과 포부'라는 주제로 열린 '군국의 어머니 좌담회’ 에 참여했다. 1943년 매일신보사에 입사하여 학예부 기자로 활동하면서 조선인 청년들의 적극적인 전 쟁 참여를 권유하는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매일신보』 1943.8.5)와 「출정하는 동생에게」 (『매일신보』 1943.11.10) 등의 시를 발표했다. 이는 이듬해에 발표한 「병정」(『조광(朝光)』 1944.5) 및 「천인침(千人針)」(『춘추(春秋)』(1944.10)과 같은 시에서도 나타났다. 또한 1944년 12 월에는 '가미카제[神風]특공대'로 나가 사망한 조선인들을 추모·미화하는 「신익(神翼) - 마쓰이오 장[松井伍長] 영전(靈前)에」(『매일신보』 1944.12.6.)와 「군신송(軍神頌)」(『매일신보』(사진판) 1942.12 ) 등의 시들을 썼다. 이외에도 총후 여성의 생산 증대를 강조한 「싸움하는 여성」(『조광 (朝光)』 1944.10)을 발표하기도 했다. ※ 여기 노천명의 친일시를 원문 그대로 소개한다. 싱가폴 함락 (노천명 / 1942.2.19. 매일신보) 1 아세아의 세기적인 여명은 왔다 영미의 독아에서 일본군은 마침내 신가파(新嘉披)를 뺏아내고야 말았다 동양 침략의 근거지 온갖 죄악이 음모되는 불야의 성 싱가폴이 불의 세례를 받는 이 장엄한 최후의 저녁 싱가폴 구석구석의 작고 큰 사원들아 너의 피를 빨아먹고 넘어지는 영미를 조상하는 만종을 울려라 얼마나 기다렸던 아침이냐 동아민족은 다같이 고대했던 날이냐 오랜 압제 우리들의 쓰라린 추억이 다시 새롭다 일본의 태양이 한번 밝게 비치니 죄악의 몸뚱이를 어둠의 그늘 속으로 끌고 들어가며 신음하는 저 영미를 웃어줘라 점잖은 신사풍을 하고 가장 교활한 족속이여 네 이름은 영미다 너는 신사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조상을 해적으로 모신 너는 같은 해적이었다 쌓이고 쌓인 양키들의 굴욕과 압박 아래 그 큰 눈에는 의흑이 가득히 깃들여졌고 눈물이 핑 돌면 차라리 병적으로 선웃음을 쳐버리는 남양의 슬픈 형제들이여 대동아의 공영권이 건설되는 이날 남양의 구석구석에서 앵글로색슨을 내모는 이 아침 --- 우리들이 내놓는 정다운 손길을 잡아라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에 일장기가 나부끼고 있는 한 너희는 평화스러우리 영원히 자유스러우리 얼굴이 검은 친구여! 머리에 터번올 두른 형제여! 잔을 들자 우리 방언을 서로 모르는 채 통하는 마음-굳게 뭉쳐지는 마음과 마음- 종려나무 그늘 아래 횃불을 질러라 낙타 등에 바리바리 술을 실어 오라 우리 이날을 유쾌히 기념하자- 부인 근로대 (노천명 / 1942.3.4 매일신보) 부인근로대 작업장으로 군복을 지으러 나온 여인들 머리엔 흰 수건 아미 숙이고 바쁘게 나르는 흰 손길은 나비인가 총알에 맞아 뚫어진 자리 손으로 만지며 기우려 하니 탄환을 맞던 광경 머리에 떠을라 뜨거운 눈물이 피잉 도네 한 땀 두 땀 무운을 빌며 바늘을 옮기는 양 든든도 하다 일본의 명예를 걸고 나간 이여 훌륭히 싸워주 공을 세워주 나라를 생각하는 누나와 어머니의 아름다운 정성은 오늘도 산만한 군복 위에 꽃으로 피었네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노천명 / 1943.8.5 매일신보) 남아라면 군복에 총을 메고 나라 위해 전장에 나감이 소원이리니 이 영광의 날 나도 사나이였드면 나도 사나이였드면 귀한 부르심 입는 것을- 갑옷 떨쳐입고 머리에 투구 쓰고 창검을 휘두르며 싸움터로 나감이 남아의 장쾌한 기상이어든- 이제 아세아의 큰 운명을 걸고 우리의 숙원을 뿜으며 저 영미를 치는 마당에랴 영문(營門)으로 들라는 우렁찬 나팔소리- 요랜만에 이 강산 골짜구니와 마을 구석구석을 흥분 속에 흔드네- 군신송軍神頌 (노천명 / 1942.12 매일신보) 항상 거룩한 역사엔 피가 흘렀다 아름다운 장章 우엔 희생이 있었다 유리같이 맑은 하늘 아래 조국은 지금 고요히 세기의 거체巨體_-- 새 아세아를 바로잡고 있다 앞으로 앞으로 오직 돌진이 있다 이 아침에도 대일본특공대는 남방 거친 파도 위에 혜성 모양 장엄하게 떨어졌으리 싸움 하는 나라의 거리다운 네거리를 지나며 12월의 하늘을 우러러본다 어뢰를 안고 몸으로 적기敵機를 부순 용사들의 얼굴이 하늘가에 장미처럼 핀다 성좌처럼 솟는다 1945년 2월, 1944년 10월 이전에 발표된 시들을 모은 두 번째 시집 『창변(窓邊)』을 출간했다. 해방 이후 『매일신보』의 후신인 『서울신문』에서 1946년까지, 이후 부녀신문사의 편집차장으로 근 무했고, 1948년 수필집 『산딸기』를 출간했다. 6·25 전쟁 당시 서울에 남았다가 문학가동맹 및 문 화인 총궐기대회 등의 참가와 같은 부역활동에 참여했다. 이로 인해 9·28 수복 이후 '부역자 처벌 특별법'에 의거, 20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으나 여러 문인들의 구명운동으로 1951년 4월 출감했고 가톨릭에 입교, 영세를 받았다. 이듬해 부역 혐의에 대한 해명의 내용을 담은 「오산이 었다」를 발표했고, 1953년 「영어(囹圄)에서」와 같이 옥중 경험을 바탕으로 한 옥중시들을 담은 세 번째 시집 『별을 쳐다보며』를 발간했다. 1955년 서라벌예술대학에 출강하면서 중앙방송국 촉탁으로 근무했고, 수필집 『여성서간문독분(女性 書簡文讀本)』을 출간했다. 1957년 6월 16일 사망했다. 사망 1주기를 맞아, 이듬해 6월에는 미발표 유작시를 포함한 네번째 시집 『사슴의 노래』가, 1960년에는 170여 편의 시를 모은 『노천명 전집 : 시편』이 간행되었고, 2001년 이후 노천명문학상이 제정되었다. 노천명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5: 친일반민족행위자 결 정이유서(pp.229∼268)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참고문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5: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 회, 현대문화사, 2009), 『노천명(盧天命)』(이숭원, 건국대학교출판부, 2000) 『친일문학작품선집 2』(김병걸·김규동 공편, 실천문학사, 1986) 『국민문학(國民文學)』, 『동아일보(東亞日報)』, 『매일신보(每日新報)』 『신동아(新東亞)』, 『신시대(新時代)』,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 여기 노천명의 절친 모윤숙의 친일시를 원문 그대로 소개한다. * 모윤숙(毛允淑, 1910~1990) - 약력 1910년 함경남도 원산 출생 1955년 한국자유문학가협회 시분과 위원장 및 문총 최고 위원 1967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79년 3·1문화상 1991년 금관문화훈장 추서 - 작품 목록 1940.9.10 신생활운동과 오락취미의 정화 매일신보 1940.9.17 창조적인 생활 매일신보 1942.1.6 동창 매일신보 1942.1 동방의 여인들 신시대 1942.2.21 호산나.소남도(시) 매일신보 1942.3.9 어머니의 힘 매일신보 1942.5 여성도 전사다 대동아 1943.5.27 아가야 너는(시) 매일신보 1943.11.12 내 어머니 한 말씀에(시) 매일신보 1943.12 오시지 않았는데(시) 신시대 1943.12 어린 날개(시) 신시대 1945.1.3 신년송(시) 매일신보 동방의 여인들 (모윤숙 / 1942.1 신시대) 비단 치마 모르고 연지분도 다 버린 채 동아의 새 언덕을 쌓으리다 온갖 꾸밈에서 행복을 사려던 지난 날에서 풀렸습니다 벗어났습니다 들어보세요 저 날카로운 바람 새에서 미래를 창조하는 우렁찬 고함과 쓰러지면서도 다시 일어나는 산 발자욱 소리를 우리는 새날의 딸 동방의 여인입니다 호산나 소남도 (모윤숙 / 1942.2.21 매일신보) 2월 15일 밤! 대아시아의 거화! 대화혼의 칼을 번득이자 사슬은 끊이고 네 몸은 한 번에 풀려 나왔다 처녀야! 소남도(昭南島)의 처녀야! 거리엔 전승의 축배가 넘치는 이 밤 환호소리 음악소리 천지를 흔든다 소남도! 대양의 심장! 문화의 중심지! 여기 너는 아세아의 인종을 담은 채 길이길이 행복되라 길이길이 잘살아라 - 싱가포르를 '소남도'로 이름 부름 - 일본군의 싱가포르 점령을 찬양 어린 날개 (모윤숙 / 1943.12 신시대) 날아라 맑은 하늘 사이로 억센 가슴 힘껏 내밀어 산에 들에 네 날개 쫙 펼쳐라. 꽃은 웃으리, 잎은 춤추리. 아름드리 희망에 팔을 벌리고 큰 뜻 큰 세움에 네 혼을 타올라 바다로 광야로 나는 곳마다 승리의 태양이 너를 맞으리. 고운 피에 고운 뼈에 한번 새겨진 나라의 언약 아름다운 이김에 빛나리니 적의 숨을 끊을 때까지 사막이나 열대나 솟아솟아 날아가라. 사나운 국경에도 험준한 산협에도 네가 날아가는 곳엔 꽃은 웃으리 잎은 춤추리라. *‘노천명, 여성 화자를 앞세운 친일시들 이 풍진 세상에 / 친일문학 이야기 / by 낮달2018 2021. 5. 16. ▲ 노천명(1912~1957) ⓒ 동아일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은 시인 노천명(盧天命, 1912~1957)의 「사슴」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 한 퀴즈 프로그램에서 유명 연예인이 과감히 ‘기린’이라고 답하여 장안의 화 제가 되었듯 목이 길기로는 기린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기린도 목이 길어서 슬픈가? 사슴이 ‘목 이 길어서 슬픈 짐승’이 된 것은 한 시인의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외 로운 삶’을 노래한 시에서 ‘사슴’은 곧 감정 이입의 기법으로 투영된 시인 노천명 자신이었다. 일제에 부역한 「사슴」의 시인 내가 우리 현대시를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때 한림출판사에서 펴낸 『영원한 한국의 명시』를 통 해서였다. 나는 집안을 굴러다니던 세로쓰기의 이 장정 본 시집으로 우리 현대시에 입문하였다. 이 시집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시인이 노천명이다. 정작 그의 대표작인 「사슴」보다는 「고향」이라는 시가 더 살갑게 다가왔다. ‘아프리카에서 온 반 마(斑馬)처럼’이라는 구절이 이상하게도 마음에 오래 남았다. 물론 시 자체에 대한 호오라기보다 시 가 초등학생도 알아먹을 만큼 쉬웠기 때문이다. 언제든 가리 마지막엔 돌아가리. 목화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조밥이 맛있는 내 고향으로. 아이들 하눌타리 따는 길머리엔 학림사 가는 달구지가 조을며 지나가고 대낮에 여우가 우는 산골 등잔 밑에서 딸에게 편지 쓰는 어머니도 있었다. (……) 목사가 없는 교회당 회당지기 전도사가 강도상을 치며 설교하는 산골이 문득 그리워 아프리카서 온 반마(斑馬)처럼 향수에 잠기는 날이 있다. - 「고향」, 『인문평론』(1940년 6월호) 노천명은 황해도 장연 출신이다. 진명여학교를 나와 1934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이화여전 재학 중 『신동아』(1932)에 「밤의 찬미」를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졸업 후 《조선중앙일 보》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였으며, ‘극예술연구회’와 『시원(詩苑)』의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1938 년 첫 시집 『산호림(珊瑚林)』(1932)을 펴냈다. ▲ 노천명이 펴낸 시집들. 왼쪽부터 <산호림>(1932), 창변(1945), <별을 쳐다보며>(1956) 노천명이 친일에 참여한 것은 1940년대다. 1941년 7월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호국신사(護國神社) 어조영지(御造營地) 근로봉사’에 참여한 이래 조선문인협회의 간사, 조선임전보국단 산하 부인대(婦 人隊)의 간사로 일하면서 친일 활동을 벌였다. 1942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의 ‘군복 수리 근로’에 참가하였고, 조선임전보국단에서 주최한 ‘저축 강조의 결전 대강연회’에서 연사로 활동하였고, 징 병제 선전을 위해 조선문인협회가 주관한 순국영령방문단의 일원으로 경상남도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대동아전 1주년 기념 국민시 낭독회에도 참여하였다. 부인근로대 작업장으로 군복을 지으러 나온 여인들 머리엔 흰 수건 아미 숙이고 바쁘게 나르는 흰 손길은 나비인가 총알에 맞아 뚫어진 자리 손으로 만지며 기우려 하니 탄환을 맞던 광경 머리에 떠올라 뜨거운 눈물이 피잉 도네 한 땀 두 땀 무운을 빌며 바늘을 옮기는 양 든든도 하다 일본의 명예를 걸고 나간 이여 훌륭히 싸워 주 공을 세워 주 나라를 생각하는 누나와 어머니의 아름다운 정성은 오늘도 산(山)만 한 군복 위에 꽃으로 피었네 - 「부인근로대」, 《매일신보》(1942년 3월 4일 자) 2차 대전이 점차 치열해져 가던 1940년대에는 남자들만 징용과 징병으로 끌려간 것이 아니었다. 여자 들은 여자들대로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를 통해서 금비녀를 헌납하고 군복 수리 등에 동원되었으며, 말기에는 여자정신대로 끌려가기도 하였다. 노천명의 「부인근로대」는 군복 수리에 동원된 부인을 통해서 ‘총후(銃後)’의 각오를 노래한 것이었다. * 애국금차회 : 1937년에 금차(금비녀) 등 금제 장신구의 헌납과 군인 환송연·위문 등 ‘황군 원 호’를 강화할 목적으로 총독부가 사주하여 조직한 친일 단체. 일제 수작자(受爵者)들과 친일 장교의 아내 등 상류층 부녀와 중 견 여류를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어머니와 누이를 내세운 ‘친일시’들 ▲ 노천명이 <매일신보>에 발표한 시 '진혼가'(1942년 2월 28일 자) 노천명은 주로 여성(어머니 혹은 누이) 화자를 내세운 시를 통해 일제에 부역하였다. 그의 시에는 참 전 군인들의 무운을 기원하거나 전몰 병사들을 추모하고 학병 출전을 권유하며, 일본군의 승전을 찬 양하거나 후방의 여성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가다듬는 내용 등이 담겼던 것이다. 노천명은 시를 통해 일제의 침략전쟁 수행을 옹호하고 미화하였다. 시 「젊은이들에게」를 통해서는 일본의 선전포고 행위를 미화하였고, 「기원」을 통해서는 총후 여성의 정신 자세를 노래하였다. 「싱가폴 함락」에서는 일제의 승전을 해방으로 미화하였다. 특히 ‘동아 민족’의 침략자로 규정된 ‘영미(英米)’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고,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당위성을 강조하였다. 늙은 영국을 대해서 저 혼혈아 아메리카를 향해서 제국(帝國)은 드디어 선전을 포고했다 정의를 위해 대동아 건설을 위해서 우리는 불수레를 달렸다 - 「젊은이들에게」, 『삼천리』(1942년 1월호) 신사(神社)의 이른 아침 뜰엔 비질한 자욱 머리 빗은 듯 아직 새로운데 경건(敬虔)히 나와 손 모으며 기원하는 여인이 있다 일본의 전 아세아의 무운을 비는 청정한 아침이어라 어머니의 거룩한 정성 아내의 간절한 기원 아버지를 위한 갸륵한 마음들…… 같은 이 시간 방방곡곡 신사가 있는 곳 아름다운 이런 정경이 빚어지고 있으리 - 「기원」, 『조광』(1942년 2월호) 아세아의 세기적인 여명은 왔다 영미의 독아(毒牙)에서 -「진혼가」, 《매일신보》(1942년 2월 28일 자) 일본군은 마침내 신가파(新嘉坡)를 뺏어 내고야 말았다 동양 침략의 근거지 온갖 죄악이 음모되는 불야의 성 싱가폴이 불의 세례를 받는 이 장엄한 최후의 저녁 싱가폴 구석구석의 작고 큰 사원(寺院)들아 너의 피를 빨아먹고 넘어지는 영미를 조상(弔喪)하는 만종(晩鐘)을 울려라 - 「싱가폴 함락」, 《매일신보》(1942년 2월 19일 자) 추녀 끝 드높이 나부끼는 일장기ㅅ발도 유난히 선명한 이 낮 고운 처녀들아 꽃을 꺾어라 푸른 하늘에 흰 비둘기를 날려라 - 「흰 비둘기를 날려라」, 《매일신보》(1942년 12월 8일 자) 「흰 비둘기를 날려라」는 일본군의 진주만 습격(1941) 1주년을 맞아 일본군의 명복을 비는 내용이 다. 특히 진주만 폭격에서 숨진 일본군 의 충성 뒤에 뛰어난 ‘아홉 어머니’, ‘굳센 일본의 아내’ 가 숨어 있다는 점을 환기하기도 하였다. 문인들의 친일 행위를 들여다보면 일정한 시기를 지나면서 이들의 반민족적 일탈이 매우 위태위태하 게 치달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상황을 본인이 얼마나 체감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원색적 이고 노골적인 자기 부정과 굴욕의 수사들 너머에 최소한의 민족적 정체성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다. 노천명 역시 예외가 아니다. 친일에 대한 변명이나 해명도 따로 보이지 않으니, 일말의 갈등이나 번 뇌조차도 상정해 볼 수 없다. 정말 그는 친일 부역, 그 반민족적 선택을 전폭적으로 수용했던 것일 까. 노천명의 친일은 일본의 패망이 다가오는 시기까지 일관되게 이루어졌다. 전쟁이 말기로 접어들면서 친일시의 내용도 일본군의 승리를 찬양하는 것에서 전쟁 동원 논리를 전파 하는 것으로 변해 갔다.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전쟁터로 나갈 것을 선동한 시로 「님의 부르심을 받들 고 서」와 「출정하는 동생에게」 등이 있다. 남아면 군복에 총을 메고 나라 위해 전쟁에 나감이 소원이리니 이 영광의 날 나도 사나이였더면 나도 사나이였더면 귀한 부르심 입는 것을 — -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매일신보》(1943년 8월 5일자) ▲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매일신보> 1943년 8월 5일자). 조선인 징병제가 시행에 대한 찬양시. 노천명은 가미카제(神風) 특공대로 나가 전사한 조선인 청년 마쓰이(松井) 오장의 명복을 비는 추모 시 「신익(神翼)–마쓰이 오장 영전에」(《매일신보》 1944년 12월 6일자)를 발표하고, 1944년 12월 《매일신보》의 대동아전쟁 3돌 기념 특집호에 「군신송(軍神頌)」을 싣는다. 병사들의 죽음을 ‘거 룩한 역사’를 완성하기 위한 ‘아름다운 희생’으로 미화 한 시다. 이 아침에도 대일본 특공대는 남방 거친 파도 위에 혜성 모양 장엄하게 떨어졌으리 싸움하는 나라의 거리다운 네거리를 지나며 12월의 하늘을 우러러본다 어뢰를 안고 몸으로 적기를 부순 용사들의 얼굴이 하늘가에 장미처럼 핀다 성좌처럼 솟는다 - 「군신송(軍神頌)」, 《매일신보》(사진판, 1944년 12월) 106 ▲ 1944년 12월 대동아전쟁 3돌 기념 특집호로 제작한 『매일신보』(사진판)에는 카미카제특공대로 나가 전사한 조선인 군인 사진과 함께 노천명의 군신송(軍神松)도 실려 있다. 전쟁 때 부역 혐의로 수감, 불우한 만년 1945년 2월에는 두 번째 시집 『창변(窓邊)』을 간행하면서 「흰 비둘기를 날려라」, 「진혼가」, 「출정하는 동생에게」, 「승전의 날」, 「병정」, 「천인침(千人針)」, 「학병」, 「창공에 빛나 는」, 「아들의 편지」 등 9편의 친일시를 수록하였다. 이 시집은 해방 직후에도 친일시만 뺀 채 계 속 출판되었다. 노천명의 친일은 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단상·논설·참관기 등을 통해서도 친일 행위를 계속하였 다. 수필 「싸움하는 여성」에서 그는 총 후 여성으로서 생산 증대에 노력할 것을 주장하는 등 결연 한 모습을 유감없이 연출한다. 대동아전쟁의 승패는 결국에 있어서 적국 여성들과 일본 여성의 근로의 투쟁에 있을 것입니다. ……유복 자의 외아들을 전지로 바치는 늙은 어머니도 있습니다. 엊그제 혼인한 남편을 특별지원병으로 내보내 는 젊은 아내도 있었습니다. ……여자정신대는 이때 우리 여성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길인 줄 압니다. - 「싸움하는 여성」, 『조광』(1944년 10월호) 친일에 눈먼 문인들이 시로, 수필로 전쟁을 찬미하고 젊은이들의 희생을 요구하였지만, 이미 대세는 꺾이고 일본은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바칠 외아들도 남편도 없었던 것이 노천명에게 있어 다행한 일이었을까. 해방이 되었지만, 시간은 여전히 노천명의 편이 아니었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피난을 가지 못해 서울에 남았고 북한군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서울 수복 후 노천명은 부역자 처벌 특별 법에 따라 20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나중에 문인들의 석방 운동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본인의 선택과 그 결과이긴 하지만, 노천명은 여느 친일 문인들과 달리 불운하였다. 그는 1957년 백 혈병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46세. 2001년 이후 한국시연구협회에서 노천명 문학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수필·평론 등 9개 부문에서 시상하고 있다. 시인의 이름을 딴 문학상을 제정한 것은 그의 문학을 기리고자 함일 터이다. 그러나 이 기림은 일제 의 침략전쟁을 옹호하고 동포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떠미는 데 쓰인 그의 친일 부역은 감춘 채 나머지 성취만을 선택적으로 비추고 있다. 굴절된 역사 속에 노천명은 여전히 ‘사슴’의 가련한 시인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2019. 5. 낮달 * '사슴의 시인' 노천명은 왜 그토록 구차했을까 정소슬의 詩내가 / 친일문인들 / by 정소슬 posted Apr 05, 2016 [백운동천을 따라 서촌을 걷다 16] 다재다능했지만 권력에 굴복했던 노천명 시인의 가옥 [오마이뉴스] 16.04.04 21:15 l 최종 업데이트 16.04.04 21:15 l 글: 유영호(ecosansa) | 편집: 김예지 ▲ 노천명이 1919년 경성에 와서 1949년부터 그가 사망한 1957년까지 거주한 집 ⓒ 유영호 서촌 '이상의 집'에서 불과 2~3분 거리에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시인, 노천명의 집이 있다. 비 록 세월이 흐르며 변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기본적인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기에 2015년 서울시 미래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60년 가까이 되었지만, 이곳에 서서 시인 노천명을 상상 해 보기로 하자. 노천명의 시 가운데 <사슴>이 워낙 유명한 탓에, 보통 우리는 그에게 '시인'이라는 칭호를 붙인다. 하 지만 그는 시인으로 활동할 뿐만 아니라 소설가와 언론인으로도 재능을 보여준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노천명은 1911년 황해도 장연 태생으로, 본명은 노기선이었는데 어릴 때 병으로 사경을 헤맨 뒤 지금 의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또 그는 부친이 사망한 뒤 1919년 경성으로 올라와 종로구 체부동 이모 집 에서 살면서 진명보통학교와 진명여고를 거쳐 1934년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했다. 그러다 해방된 후 1949년 이곳 누하동 225-1번지로 이사를 와서, 1957년 6월 이곳에서 숨졌다. 다재다능한 시인, 권력 앞에 갈대가 되다 ▲ 노천명 ⓒ 국어국문학자료사전 노천명의 활동 상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1934년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로 4년간 근무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되는 유명한 시 <사슴>도 이때 발표 되었다. 그 뒤 1938년에는 '극예술연구회'에서 활동했고 <조선일보> 기자가 되었다. 그러다 1943년에는 총독부기관지인 <매일신보> 기자가 되어 '승전하는 날', '출정하는 동생에게', '진혼가' 등 다수의 친일 작품을 발표했다. 광복 후에는 거센 친일파 척결 분위기에 대외활동을 자제 하고, 일본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전쟁이 발발했다. 곧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고 미쳐 피난 가지 못한 노천명은 이때 월북 작가인 임화, 김사량 등이 주 도하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문화인 총궐기 대회' 등의 행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다시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하자 노천명은 좌익분자 혐의로 자그마치 20년의 실형을 선 고받았다. 하지만 여러 문인이 구명운동을 벌였고, 약 6개월간 투옥한 뒤 1951년 4월 석방됐다. 그 후 노천명은 공보실 중앙 방송국에서 일하고, 3차 시집을 발표했지만 건강이 악화됐다. 1957년 6 월 16일엔 재생불능성 뇌빈혈로 쓰러졌고, 46년이라는 짧은 생을 마감했다. 노천명은 그의 대표작 '사슴'으로 인하여 독자들에게는 한없이 순수한 시적 낭만에 잠긴 소녀처럼 상 상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오만할 정도의 도도함과 결벽증을 지닌 여성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성품으로 인하여 동료들과 자주 충돌하였으며,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못해 독신으로 살아야만 했다. 이러한 자신의 성격을 "대처럼 꺾어는 질망정 구리 모양 휘어지기가 어려운 성격"이었다고 그는 <자화상>에서 고백하였다. 하지만 그런 도도함조차 권력 앞에서는 한낱 갈대에 불과했나 보다. 일제강점기 총독부 권력에 굴복 했고, 또 전쟁 당시 인민군과 유엔군의 권력이 교차하는 상황에서 그때그때 굴종한 노천명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그에게 도도함이란 기회주의와 같은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일본 패전 후 삭제해버린 친일시, 그는 구차했다 ▲ 해방 직전 친일시를 실어 출간했다가 해방 후 친일시만 잘라내어 다시 출간한 시집 《창변》의 목차, 친일시는 창호지로 가렸다. ⓒ 유영호 이런 면모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는 해방 전인 1945년 2월 25일 시집 <창변> 을 출간하며 성대한 출판 기념회를 했다. 그 시집에는 친일시 9편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불과 6 개월 뒤 일본이 패전하고 해방이 되자 그는 그 시집에서 친일시 9편을 빼고 계속 출판했다. 친일시는 시집의 마지막 부분에 편집되어 있었기 때문에, 뒷부분의 친일시를 본문에서 없애고 흔적을 지웠지만 목차에는 그 흔적이 일부 남아 있는 '재단장판'을 유통한 것이다. 물론 목차도 친일시가 나 열된 부분은 뜯어냈지만, 다른 시와 섞여 나열된 페이지는 친일시의 제목을 창호지로 가렸다. 참으로 구차한 행위다. 서울시가 이곳을 미래유산으로 지정할 때 어떠한 이유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알 수 없고, 또 이곳을 찾을 많은 관광객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할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최근 일본인 관광객이 이 일대를 많이 찾으니 그들을 위해 노천명의 유명한 이 시를 이곳에 써 놓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남아면 군복에 총을 메고 나라 위해 전장에 나감이 소원이리니 이 영광의 날 나도 사나이였드면 나도 사나이였드면 귀한 부르심 입는 것을- 갑옷 떨쳐입고 머리에 투구 쓰고 창검을 휘두르며 싸움터로 나감이 남아의 장쾌한 기상이어든- 이제 아세아의 큰 운명을 걸고 우리의 숙원을 뿜으며 저 영미를 치는 마당에랴 영문(營門)으로 들라는 우렁찬 나팔소리- 오랜만에 이 강산 골짜구니와 마을 구석구석을 흥분 속에 흔드네-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매일신보>, 1943. 8.5) ▲ 조선인징병제 실시를 찬양한 노천명의 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대한매일신보 1943.8.5) 참고로 노천명은 서울 중곡동 천주교 묘지에 묻혔다가, 개발에 밀려 1973년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 천 주교 묘지에 그의 언니 노기용과 함께 나란히 안장되었다. 고양시에서는 그의 시비 건립을 추진했으 나, 시민단체들이 그의 친일 경력을 들어 이를 반대하면서 취소되었다. ▲출격하는 가미가제에게 여고생들이 사쿠라꽃 가지를 흔들며 전송하고 있다 Chiran high school girls wave kamikaze pilot 주익종의 인물이야기, 노천명 / 이승만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