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관하여
- 서 벌(서봉섭) / 시조집<걸어다니는 절간> / 우리시대현대시조 100인선 26 -
한번도
답게 한번
눕혀준 적 없었구나.
미안하다 미안하다 내 것인 줄 알았었지.
드디어 눕고 만 네가
끙끙 앓네
네 소리로
헌지갑
- 서 벌(서봉섭) -
채우면 비워지는 나날들 보내다가
닳고 닳았구나. 쓰임새 잃은 허상(虛像)
소중히 다주었으나 ㅏㄱ엽처럼 누운 너.
손때 짙게 묻어 팽개치진 못하겠다,
명함 크기만한 졸업증서 넣어 주마
품고서 편히 쉬게나, 빌린 꽃도 넣어 주마.
꼭, 올 그날을 위하여
- 서 벌(서봉섭) -
눈물이 나올 때엔
흘려야 하는 거야
엉엉 소리치며
쏟고프면
쏟는거야
하,
하,
하,
크으게 웃을 날
꼭 올 그날 위하여
그 사람의 함박눈
- 서 벌(서봉섭) -
불고 갈 뜻이 없어
바람은
멀리 있고
꿈꾸다가 돌된 듯한
그
의
머나먼 하늘.
눈발이 희끗희끗거려 무너져 내린다.
생각다가
뒤틀다가
거듭거듭 그러다가
에라 모르겠다는 듯
와락 펑펑
펑
펑
와락
나갈 데, 한 군데도 없는 저녁답이 쏟아진다.
피우자며 일으키곤
곧장 거덜나버린
지난 봄
낙화 천지
부도 낸 그 세상이
말려도
아무리 말려도
한꺼번에 쏟아진다.
* 저녁답 :‘저녁때’의 방언(경남)
입동(立冬) 일기
- 서 벌(서봉섭) -
오늘이 저 하늘이 질펀히 평사(平沙) 깔아
한 점 먼 구름 낙안(落雁)되어 아련하네.
난 무슴 기러기인가, 날개 접힌 이 기러기
생각은 청소년기의 갈대밭 모서리를
한 짐 나무 팔고 돌아가는 빈 지게.
별빛이 고독을 찔러 지금도 아린다네.
고향은 이처럼 나를 철 덜 든 아이 만들어
돌다리 딛도록 하고 물소리에 젖게 하네.
날 새면 산에다 또 올려 나뭇짐 지게 하고.
늙으신 할머니와 바깥방 함께 쓰던
그 무렵 호롱불은 밤마다 까치밥빛.
다 두고 떠나오고는 길이 없어 못가누나.
아무리 여겨봐도 이 서울 삼수갑산(三水甲山).
실 끊긴 연(鳶)들 되어 가랑잎 쌓이는데
따르릉, 느닷없는 신호, 죽마고우 바로 자네.
* 평사(平沙) : 모래가 덮인 개펄
* 낙안(落雁) : 열을 지어 땅으로 내려앉는 기러기
* 까치밥 : 까치 따위의 날짐승이 먹으라고 따지 않고 몇 개 남겨 두는 감
* 까치밥빛 : 그러므로 까치밥빛은 까만 어둠 속의 등잔이나 호롱불등 잔빛을 의미
노자(老子)를 읽다가
- 서 벌(서봉섭) -
연못에 하늘 한 쪽이 가만히 드러눕는
오로지 가라앉는 아무 것도 잡히쟎는
막막한 이 낮 한때를 가랑비는 오고 있다
두자해도 둘 데 없고 마자해도 말 것 없는
홀로고 홀로만인 참으로 비어 있는
다 끝낸 이 낮 한때를 가랑비가 오고 있다
* 작품해설 : 낮에 오는 가랑비를 보며 특별한 감회를 적고 있는 서벌의 <老子를 읽다가>는 그 가락
이 아주 자연스럽다. 독특한 어법 때문일 것이다. 하늘 한 쪽이 내려와 연못의 한 부분을 이룬다. 그
리고 가라앉고 있다. 아무 것도 잡히지 않고 있다. 둘 데 없는 마음, 말 것 없는 심경, 끝내 홀로이
며 온전히 비어 있는 그런 시간에 가랑비는 온다. 그 시간의 정황을 시인은 '막막한 이 낮 한때',
'다 끝낸 이 낮 한때'로 규정하고 있다. 무슨 일로 막막한 것인가? 어찌된 까닭에 다 끝내고 말았다
는 말인가? 그 적연함 위로 비는, 가랑비는 그치지 않고 오고 있다. 필시 시인에겐 그 무렵 어떤 절
박한 일이 있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와의 별리?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여튼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
을 것이다. '다 끝난'이 아니라 '다 끝낸'이다. 이 말엔 시인의 의지가 짙게 배어 있다. 무너질 일
을 이겨낸 강인함이 맺혀 있는 표현이다. 시제가 무엇인가? '老子를 읽다가'이다. 여기서 제목이 차
지하는 비중을 헤아릴 수 있다. 제목으로 인하여 이 작품은 그 의미가 웅숭 깊어진다. 요즘과 같은
장마비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묘한 분위기에 마음 젖으며 다시금 생의 그윽함을 떠올려 보는 아침이다.
* [2004 경남신문 신춘문예-시조] 당근밭에서(이명자) 심사평
[신춘문예-시조] 시조 심사평 -남다르면서도 당당한 패기 / 서벌
이 세상 정전 상태 언제까지 계속될까
아무리 둘러봐도 안팎 다 깜깜하다
불지펴 밝히고 싶은 어둠 저 한복판
흙에 묻힌 깊은 기억 꿈속에서 몸부림친다
마음을 갈아엎고 회심줄기 찾고있는
명멸의 흔들림 속에 머언 훗날 낯선 기척
눈튼 새순 입맞추고 샐샐 웃는 꽃샘바람
수줍어 뿌리까지 새빨갛게 젖었는가
지심(地心)을 딛은 발걸음 뽑아들면 횃불이다.
시조로 쓴 자유시, 아니 자유시로 쓴 시조, 이런 느낌부터 주는 「당근밭에서」를 두 심사위원은 당
선작으로 밀었다. 응모된 많은 시조들 가운 가장 남다른 성취의 실체였기 때문이다.
이 시조의 경우, 말을 놓는 처음 단계부터 “이 세상 정전 상태 언제까지 계속될까”라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 다음 “아무리 둘러봐도 안팎 다 깜깜하다”라고 스스로에게 답한다. 당근 밭에 선 작중
화자의 자문 답은 이처럼 특수어 아닌 일상어로 돼 있지만, 기실은 놀라운 발상이다. 당근 밭은 이
세상이고, 정전상태는 이 시대여서 그러하다. 그 같은 자문자 답의 한 결말은 “불지펴 밝히고 싶은
어둠의 저 한복판”이다. 이처럼 성취된 제1수의 언어 능력만 봐도 명민한 자의 눈이 어떻게 밝은가
를 곧바로 전달받게 된다. 시제인 「당근 밭에서」를 연상하고서 말이다.
그런데, 이 시조는 1편 전9장으로 수간(首間)없이 되어 있다. 얼핏 자유시로 읽혀진다. 그리고, 시조
문장은 산문성이다. 말하자면, 수간(首間)없는 산문성 일상어의 율격화이다. 전9장 1편을 단숨에 읽
도록 하는 의도에다 1천년 가까운 시조 흐름의 가락 특징인 유장함에 식상했다는 뜻이겠다. 3·4조
4·4조에만 얽매이지 않고, 2·4조와 4·5조도 거침없이 섞어서 최소단위인 음보와 음보 연결을 거뜬
히 해냈다. 따라서 율독 호흡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 명실상부한 신인의 패기가 이러도록 하였을 것
이다.
그러나, 뭔가 좀 께느른한 점은 이런 패기있는 신인일수록 신춘문예의 당선 영광과 함께 상금만 챙기
고는 다른 분야로 가거나 잠적한 나머지 시조작단을 실망시켜 왔다는 점이다. 이 점을 우려하면서도
설마하니 이번에까지 그럴라고 하는 반신 반의에 모험 한번 걸기로 했다.
〈흙에 묻힌 깊은 기억 꿈속에서 몸부림친다/마음을 갈아엎고 회심줄기 찾고있는/명멸의 흔들림 속에
머언 훗날 낯선 기척//눈튼 새순 잎맞추고 샐샐 웃는 꽃샘바람/수줍어 뿌리까지 새빨갛게 젖었는가/
지심(地心)을 딛은 발걸음 뽑아들면 횃불이다〉 할 정도로 자기화한 대상의 인식 능력의 소유자이고
보면 허튼 짓을 못할 것이다. “지심(地心)을 딛은 발걸음 뽑아들면 횃불이다”라는 이 초심대로 정
진하여 대성하길 바란다. 심사위원=서벌(한국시조시인협회장·시조시인) 김남환(한국문협 시조분과회
장·시조시인)
비와 찻잔 사이 / 양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