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아름다운 문학

<번 한> 고려성회고시

이름없는풀뿌리 2023. 8. 28. 06:12
고려성회고시(高麗城懷古詩) - 번한(樊漢) / 唐(당)나라 詩人(시인) - 僻地城門啓(벽지성문계) 주인 없는 외딴 곳 성문 활짝 열렸있고 雪林雉堞長(설림치첩장) 눈덮인 숲 속에 긴 성벽(치첩)이 늘어져 있네. 水明留晩照(수명유만조) 맑디맑은 호수에 저녁노을은 붉게 물들어가고 沙暗燭星光(사암촉성광) 호변 모래사장에 어둠이 깔리고 별빛만 반짝이네. ​ 壘鼓連雲起(루고연운기) 쩌렁쩌렁 울리던 북소리에 구름 걷히고 新花拂地粧(신화불지장) 새꽃들 피어나 피맺힌 땅 새단장하니 居然朝市變(거연조시변) 어느덧 시절이 변하여 나라가 바뀌었음을 알겠구나 無復管絃鏘(무부관현장) 땅 울리던 진군소리(관현장) 다시 들을 수 없고 ​ 荊棘黃塵裏(형극황진이) 가시밭우거진 들판엔 누런 흙먼지만 쌓여 있고 蒿蓬古道傍(호봉고도방) 옛 길 가에는 쑥대 만이 무성하게 우거졌구나. 輕塵埋翡翠(경진매비취) 날리는 흙먼지는 비취(누각 문양. 화려함)를 묻어버리고 荒壟上牛羊(황롱상우양) 황량한 언덕(롱산:섬서성 산) 위에 소와 양들이 노닐 뿐인데 無奈當年事(무나당년사) 그 때의 일들을 어찌 다 회상하지 않을 수 있으랴. 秋聲肅雁行(추성숙안행) 쓸쓸한 가을바람 일며 기러기만 외로이 나는구나. * 작시 배경과 출처 당(唐)과 고구려(高句麗)와의 치열(治熱)한 전투(戰鬪)가 끝나고 황폐했던 북경 근처에 연개소문이 고려성을 길게 세우니, 별보다 많은 촛불들이 빛나고 북소리 구름끝까지 일고 땅에는 꽃들이 단장하 고 옥소리같은 음악소리가 그칠날이 없었다 라며 멸망(滅亡)한 고려성(高麗城)을 돌아보면서 역사(歷 史)의 무상(無想)함을 당(唐)나라 시인(詩人) 번한(繁閑)이 노래한 시(詩)로 단재 신채호 著 『朝鮮 上古史』, 『桓檀古記』중 『太白逸史』등에 인용되고 있다. * 고구려 멸망 약사 660年신라(新羅)김유신(金庾信) 당(唐) 소정방(蘇定方)과 합세(合勢) 백제(百濟)를 공격(攻擊). 황산 벌에서 백제(百濟)가 패하고 웅진성(熊津城)에서 항복. 고구려(高句麗)는 신라군(新羅軍)의 공세(攻 勢)와 당(唐)의 협공으로 665年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죽은 뒤 아들 형제간(兄弟間)의 내분(內紛). 668年9월 라당군(羅唐軍) 고구려(高句麗) 평양성(平壤城) 함락(陷落). 고구려(高句麗) 28代 보장왕 (寶藏王)26年에 706年에 걸친 웅장(雄壯)한 역사(歷史)를 마감(磨勘)한다. * 고려성(高麗城) 위치와 작품 배경 고려성(高麗城)은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땅에 있는 고려성유지(高麗城遺址)라고도 불리는 성으로 길 림성(吉林省) 안도현(安圖縣) 송강진(松江鎭) 송강둔(松江屯) 서북쪽, 내몽고자치구 적봉시 임서현 (内蒙古自治区赤峰市林西县) 북쪽 50Km지점에 있는 백탑자(白塔子), 하북성 진황도시 무녕현 온천보 (河北省秦皇岛市抚宁县温泉堡村)의 북쪽 산중 고씨촌(高氏村) 등에 있는데 현지인들은 고려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고려성은 중화인민공화국 북동부에 있는 성으로 현재 둥베이[东北] 지역 중부에 있으 며, 남동쪽으로 북한·러시아와 인접하여 있다. 관화로 지린성라 하며 길림성(吉林省, 병음 Jílín Shěng, 만주어 girin ula) 안도현(安圖縣) 송강진(松江鎭) 송강둔(松江屯)에서 서북쪽으로 6km 떨어 진 곳에 있다. 송강진은 소사하향(小沙河鄕)과 접경한 산등성이 남쪽 기슭에 있고, 남쪽으로 이도강 과는 350m, 서북쪽으로 소사하향 사하둔(沙河屯)과 2km 떨어져 있다. 동쪽은 남쪽으로 뻗은 산등성이 이다. 유지가 자리잡은 곳은 평탄하며 바람이 없고 볕이 잘 드는 지역으로, 면적은 동서 길이 140m, 남북 너비 100m이다. 이미 경작지로 개간되었다. 지면에는 많은 베무늬기와편들이 흩어져 있다. 그중 에서 언강이 있는 기와·지압문 기와 등이 발견되었다. 현지인들은 이곳을 고려성이라고 부른다. 유 지 가운데에는 중화민국 시기 사찰지가 있다. 유지 동쪽편에 건축 기단이 있는데 주변보다 약 1m정도 높다. 그 규모는 동서 길이 18m, 남북 너비 12m이다. 위쪽에는 커다란 초석·회색을 띤 네모 벽돌· 니질홍갈도기편(泥質紅褐陶器片) 등이 흩어져 있는데, 이 유물들은 당연히 민국시기의 사찰지와 동일 한 시기의 것들이다. 이 기단에서 동쪽으로 약 16m 떨어진 곳에 이미 무너져 버린 우물이 있다. 잔존 지름은 2.5m이다. 우물자리에서 서쪽으로 약 6m 떨어진 곳에도 연못 유지가 있는데, 그 지름은 4m, 깊이는 1.5~2m이다. 유지 규모와 흩어져 있는 유물에 근거하면 발해시기 비교적 큰 촌락유지이다. 이 와는 별도로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에는 고려성의 유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두 곳을 소개한다. 하나는 내몽고자치구 적봉시 임서현(内蒙古自治区赤峰市林西县) 북쪽 50Km지점에 있는 백 탑자(白塔子)에 있는 고려성이다. 지도는 1940년 10월에 중화민국 정부에서 발행한 몽고 지방지도의 한 부분으로 우측 북위 44도 부근에 고려성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이곳은 대흥안령산맥(大興安嶺 山脈)을 뒤로하여 길게 성을 쌓았음을 볼 수 있다. 또 다른 한곳은 하북성 진황도시 무녕현 온천보 (河北省秦皇岛市抚宁县温泉堡村)북쪽 산중 고씨촌(高氏村)에 있는 고려성으로 진황도시(秦皇岛市)에 서 자동차로 온천보까지는 20분쯤 걸린다. 여기에는 고려성터와 우물이 남아 있다. 산 위에 있는 봉 화대는 청나라 때까지 사용했다고 한다. 고구려는 645년(고구려 보장왕4년)에 안시성에서 당태종(唐太宗)의 당군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다. 한쪽 눈까지 잃은 당태종은 전 병력을 후퇴시키지만 고구려군은 오골성까지 합세하여 총공격을 개시하고 요하(遼河)까지 추격하여 당나라 군대를 무수히 섬멸시킨다. 한편 안시성전투가 한창일 때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 3만은 만리장성을 넘어 적봉진(赤峰鎭)을 따라 남하하여 당군의 퇴로를 차단한다. 당군은 진흙뻘로 이루어진 요택을 건너며 무수한 희생을 치르는데 병력이나 소와 말의 십 중팔구가 여기서 죽었다고한다. 처참했던 당시 상황을 말해주는 장면이다. 소수의 병력이 구사일생으 로 요택을 건넜지만 연개소문의 대군이 요소요소에서 길목을 막고서 당군을 공격하고 당태종을 사로 잡기 위해 추격한다. 당태종은 군사옷으로 변장하였지만 결국 고구려군에게 포위당하여 포로가 되기 직전에 설인귀(薛仁貴)가 뛰어들어 겨우 구해내어 고구려군의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간다. 당군이 고 구려군과 싸우는 틈에 당태종은 몇 명의 장수들과 일부의 병사들만 이끌고 몰래 빠져나가 고생고생하 며 겨우 장안에 도착한다. 이 당시 연개소문에게 쫓겨가던 당태종이 지나던 고을마다 설화들이 남아 있어 그때의 비참한 상황들을 잘 말해준다. 요동성 해성(海城)역사소설 의용군연의(義勇軍演義)에는 당태종이 진흙뻘인 어니하(淤泥河)에 빠져서 사로잡히자 연개소문이 당태종에게 항복문서를 작성하라 는 명령을 내리는 장면도 나온다. 처음 출정할 때 10만에다 그 뒤 지원군까지 합해 50만정도가 고구 려 정벌에 동원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장안에 도착한 수는 불과 몇 천명 밖에 되지 않았다고 당서(唐 書)에도 기록되어 있다. 연개소문은 북경근처까지 추격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당군의 재침에 대비하고 장차 중원공략의 전진기지로 삼기 위해 도처에 성을 쌓아 요새를 만드는 한편 주민들까지 이주시켜 살게 한다. 이때 생긴 성들이 청나라 말기까지 남아 고려성(高麗城)이라 불렸다. 당나라 사람 번한 (樊漢)이 지은 고려성 회고시(高麗城懷古詩)가 지금까지 전해온다. 고려(高麗)라는 말은 고구려(高句 麗)를 가리키는 말로 과거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그렇게 불렀다. 태조 왕건이 세운 고려와는 구별된다. * 집안 산성하 고구려 고분군 :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은 통구 고분군이라는 표현을 잘 쓰지 않지만 지안에 있는 고구려 고분들의 총칭이며 가장 포괄적인 표현이다. 통구 고분군이 워낙 넓다보니 우산하, 마 선구, 칠성산, 만보정, 산성하, 하해방 고분군으로 구분되어 불리고 있다. 최근에는 장천 고분군도 이 범주에 들 었다. 통구 고분군은 약 1만여 기 이상의 무덤이 분포해 있으며 1960년대 무덤 전체에 대한 측량조사가 이루어졌 고 1997년 재차 측량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가 2002년 출간된 『洞沟 古墓群 - 1997年 调查测绘报告』통구 고 분군은 고구려 고분문화의 총체이기 때문에, 본격적인 서술에 앞서 왕릉급을 제외하고 그 이하의 규모의 준 왕릉 급 고분 및 고구려 고분문화의 전개 과정 상의 주요한 고분들을 별도의 항목으로 나누는 것 보다는 이 항목에서 설명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된다. 공식적으로 통구 고분군을 관리하는 중국 측에서는 통구 고분군만을 고분군 이라 부른다. 각 우산하, 마선구와 같은 구분은 '묘구'라고 하며 묘구 내에서도 지형적으로 구분되는 경우에는 '편' 또는 '구역'이라고 지칭한다. 여담으로 지안 일대의 고분군을 구경해보면 통구 고분군이라고 써진 아주 오래 된 나무팻말부터 새롭게 만든 석비까지 표지석들이 굉장히 많다. 고구려 묘지는 집안의 노령산맥 일대에 총 32곳 에 12,358좌(座)가 분포되어 있고, 이중 비교적 상태가 좋은 것이 7,160좌이다. 엄청난 숫자다. 집안의 묘지군을 통구고묘군(洞沟古墓群)이라 하는데, 이들을 6개 묘지군[하해방下解放, 우산하禹山下, 산성하山城下, 만보정万宝 汀, 칠성산七星山, 마선구麻线溝]으로 구분한다. 돌무덤은 대부분 산록에 있고, 흙무덤은 계곡 주변이나 평지에 있다. 평민들의 묘지가 가장 많고 귀족들의 무덤은 질서 있게 배열되어 있다. 매장 시기는 기원전부터 5세기 초까 지로 본다. 고구려고분은 돌로 쌓아 만든 적석총(積石塚:돌무지무덤)과 흙으로 덮은 봉토무덤이 있다. 적석총은 대략 BC 3∼2세기경부터 만들어졌다고 추정되고, 봉토무덤은 대체로 4세기경 출현했으며, 고구려 지배층의 주된 묘제가 된 고구려 후기의 대표적 무덤양식이다. 벽화가 있는 묘 20좌가 발견되었는데, 모두 4세기경의 봉토석실묘 이다. 벽화 내용은 묘지 주인의 생활과 불교 소재가 많고, 사신도상도 일부 출현한다. 고구려 묘는 묘실(시체가 있는 곳)이 지표면 보다 높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래서 무덤이 대부분 도굴돼 부장품이 발견되지 않았다. 만 기에는 그 높이가 반지하로 내려와 부장품도 나왔다. 도자기류, 무기류, 장식류 등이 있다. (https://blog.naver.com/onewings/90092700140 : [출처] 집안의 황성시대|작성자 일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