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152

명아주 지팡이 小顧(17/10/20)

명아주 지팡이 小顧 (1) 평소 명아주를 보면서 어떻게 저렇게 가녀린 풀로 지팡이를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소위 명아주 지팡이에 대하여 말로만 명아주 지팡이이지 다른 나무로 만든 것이겠지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어제 하산길에 밭가에 자라는 아주 큰 명아주 두 그루를 보았다. (2) 텃밭을 가꾸는 할머님 말씀에 의하면 아들이 명아주지팡이(靑藜丈)를 만들어 준다고 정성껏 가꾸었단다. 아~~ 명아주가 저렇게 크게 자랄 수 있구나. 이제야 명아주 지팡이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 그런데 자료를 찾아보니 의외로 명아주 지팡이를 만드는 곳도 있었고 제조과정이 보통 힘든 과정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냥 잘라 건조만하여서는 지팡이로 쓸 수 없고 많은 공정을 거쳐야 지팡이다운 지팡이로 쓸 수 있음을 알았다...

그리운 임금님(17/10/17)

그리운 임금님 (1) 호모싸피엔스는 天性이 집단을 이룬다. 홀로 살아가지 못한다. 그 속에서 序列이 생기고 組織이 만들어지고, 倫理가 생겨나고, 文化가 탄생되었다. 개미들이 여왕을 중심으로 조직을 유지하듯 오랜 기간 호모싸피엔스는 수장을 모셔왔고 그건 최근의 국가들 대부분 명칭만 좀 달리 할 뿐, 개미집단과 별반 다르지 않다. (2) 다르다면 끊임없이 집단을 생각하는, 私益보다 집단의 이익과 번영을 생각하는 수장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제왕학이요, 헌법에 명시된 수장의 권한과 의무이다. 그래서 수장은 자신뿐 아니라 그룹에서 그러한 윤리로 오랜 기간 훈육되고 길러져야 한다. (3) 문제는 덜 성숙된 수장을 갖게 되는 순간 그 집단은 불행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수장은 자신의 그룹뿐만이 아니고 반대..

싸리나무기둥은 과연 실재했을까?(17/05/27)

싸리나무기둥은 과연 실재했을까? (1) 예전에 역사서를 탐독하다보니 궁예가 철원에 태봉국을 세우면서 대궐기둥을 싸리나무로 세웠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다. 또한 대전 살 때 고즈넉하여 자주 찾았던 대둔산 안심사 일주문도 싸리기둥이라 들었던 기억이 있다. (2) 그 뒤 軍에 가서 최전방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가을이면 싸리나무를 잘라 1년 동안 사용할 마당 빗자루를 만드는 일이 연례 행사였다. 그 때마다 그게 사실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전방이라 후방보다 싸리가 훨씬 크기는 하지만 겨우 손가락 굵기 정도인 싸리나무로 과연 대궐기둥을 세울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은 그 뒤에도 계속 나의 숙제일 수 밖에 없었다. 싸리나무를 다발로 묶어서 세우지는 않았을까? 혹은 예전에는 싸리나무가 크게 자라는 종류가 있지는 ..

육관도사와 국립현충원 풍수(17/04/10)

육관도사와 국립현충원 풍수 (1) 벚꽃 아침 뉴스에 서울의 3대 벚꽃 명소로 여의도 윤중제, 석촌호수 둘레길, 국립현충원이라 하여 오늘 나섬. 그러니까 국립현충원은 2013년 6월 친구와 갔었는데 아내는 아직 못 가봐 보여주면 좋아하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2) 국립 현충원 야탑에서 9408번 광역버스를 타고 정문을 내리니 온통 하이얀 벚꽃 세상이다. 분향소에 들러 묵념을 올리고 무명용사탑을 지나 사병들의 무덤을 지나 이승만, 김대중, 박정희 대통령 묘소를 차례로 뵙고 아내와 묵념을 올렸다. 아내는 국립현충원이라 하여 유명인들이 분향하는 모습이 TV에도 비치고하여 아무나 접근할 수 없는 곳으로 알았는데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을뿐더러 각 대통령님들 묘소에도 아무런 제약없이 찾아 볼 수 있는 곳이어서 놀랍다..

實錄에 나타난 三峯 정도전 記錄(17/12/25)

실록(實錄)에 나타난 삼봉(三峯) 정도전 기록(記錄) 요즘 삼봉(三峯) 정도전을 탐구면서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삼봉을 검색 일별하여 보았다. 앞서 열거한 그의 生前 찬란한 업적은 제1차 왕자의 난 이후에는 패배자로 낙인 찍혀 간신으로 묘사하고 있기는 하지만, 당대에도 그의 동생, 큰 아들, 증손까지도 조정의 중책을 담당하고 천수를 누릴 정도로 성종대까지 삼봉의 조선 창업의 공로를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러던 그가 조선 중기 이후 허균, 정여립의 롤모델이 정도전이었고 허균, 정여립과 교류한 최영경, 심우영등과 대척점에 서 있던 송시열을 중심으로한 유학자 그룹을 중심으로 그를 역적으로 배척하는 극심한 분위기에 그의 자손들의 출사가 전무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 정조의 명으로 그의 사상..

누가 감히 삼봉(三峯)을 하륜과 비교하는가?(17/12/20)

(((三峰이란 호가 한때 도담 삼봉에서 유래되었다고 알려졌으나 현재는 삼각산이 정설이다))) 누가 감히 삼봉(三峯)을 하륜과 비교하는가?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다. 그러기에 애당초 패배자는 그의 행적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평가받기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인지도 모른다. 조선을 실질적으로 디자인한 삼봉 정도전과 디자인된 조선에 인테리어를 가한 하륜, 당시에는 패배자였던 삼봉과 제1차,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승리자였던 하륜, 그러기에 삼봉은 假墓로만 남아있고, 하륜은 實墓로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역사의 라이벌로 비교하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재의 승리자는 삼봉이고 패배자는 하륜 아닐까? 이방원의 일개 책사에 불과했던 하륜을 조선을 기획한 삼봉에 비교한다는 자체가 비둘기를 봉황에 ..

몽골대제국의 실질적 기획자 야율초재(耶律楚材)와 삼봉 정도전(17/12/17)

몽골대제국의 실질적 기획자 야율초재(耶律楚材)와 삼봉 정도전 (1) 역사를 탐구하면서 몽골이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대제국을 7대에 걸쳐 160여년간 유지할 수 있었던 동인(動因)에 대하여 항상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는 조선의 창업자가 이성계이지만 실질적 기획자는 정도전이란 인물이 존재하였듯이 야율초재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음을 알고 그 의문을 풀 수 있었다. (2) 다만 그러한 인물을 알아보고 그를 중용한 징기스칸과 이성계의 식견은 비슷하지만 징기스칸 사후 오고타이대칸도 계속 그를 중용한데 비하여 이방원과 책사 하륜은 주권재민의 위대한 사상가 정도전을 자신들의 정치적 야망을 위하여 주살한 점이 다르다면 다를 것이다. 그러나 삼봉 정도전은 주저하는 이성계를 움직여 망해가는 고려를 버리고 창업 단계부터..

실록 속의 정도전 그리고 야율초재, 하륜과의 비교(18/01/20)

실록 속의 정도전 그리고 야율초재, 하륜과의 비교 1. 실록 속의 정도전 요즘 삼봉(三峯) 정도전을 탐구면서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삼봉을 검색 일별하여 보았다. 앞서 열거한 그의 生前 찬란한 업적은 제1차 왕자의 난 이후에는 패배자로 낙인 찍혀 간신으로 묘사하고 있기는 하지만, 당대에도 그의 동생, 큰 아들, 증손까지도 조정의 중책을 담당하고 천수를 누릴 정도로 성종대까지 삼봉의 조선 창업의 공로를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러던 그가 조선 중기 이후 허균, 정여립의 롤모델이 정도전이었고 허균, 정여립과 교류한 최영경, 심우영등과 대척점에 서 있던 송시열을 중심으로한 유학자 그룹을 중심으로 그를 역적으로 배척하는 극심한 분위기에 그의 자손들의 출사가 전무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 정조..

연표(年表)로 본 三峰 鄭道傳(1342∼1398)

연표(年表)로 본 三峰 鄭道傳(1342∼1398) ○ 1세/1342년 충혜왕 복위3년 부친 정운경(鄭云敬), 모친 영천 우씨 사이에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남 (장남 道傳, 차남 道存, 3남 道復) 조부는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정균(鄭均) ○ 정운경(鄭云敬, 1305-1366) 약력 - 본관은 奉化, 봉화현 호장 정공미(鄭公美)의 증손, 檢校軍器監 정균(鄭均)의 아들 - 1305(충렬31) 출생 - 1326(충숙13) 사마시 합격 - 1330(충숙17) 문과 급제 상주목 사록 출사 전교교감(典校校勘), 주부(注簿), 도평의녹사(都評議錄事), 삼사도사(三司都事),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 전의주부(典儀注簿), 홍복도감(弘福都監)의 판관을 거쳐 - 1342 장남 정도전 출생(정운경 38세) - 1343..

오죽헌1. 역사 유래와 관련 인물들(19/03/09, 22/02/11)

오죽헌(烏竹軒)의 유래와 관련 인물들 1) 오죽헌 유래 신사임당과 율곡의 탄생지라는 오죽헌에서 새삼 알게 된 사실들... 오죽헌은 최초 단종 때 병조참판과 대사헌을 지낸 최응현(崔應賢)의 부친 최치운(崔致雲)이 창건하여 최응현에게 상속되었고, 최응현이 둘째 사위인 이사온(李思溫)에게 상속되었다가, 이사온의 딸인 용인 이씨에게 상속, 용인 이씨(신사임당 어머니)는 딸만 다섯 두었는데, 재산을 물려줄 때 둘째 딸(신사임당)의 아들인 외손 율곡에게는 조상의 제사를 받들라는 조건으로 서울 수진방 기와집 한 채와 전답을 주었고, 넷째 딸의 아들 외손 권처균(權處均)에게는 묘소를 보살피라는 조건으로 오죽헌 기와집과 전답을 주어 최종적으로 권씨 소유로 오랬동안 유지되어 왔다는 사실, 그리고 외할머니로부터 오죽헌을 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