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 24

<이성부> 산길에서 / 벼

산길에서 - 이성부 / , 1974 - 이 길을 만든 이들이 누구인지를 나는 안다 이렇게 길을 따라 나를 걷게 하는 그이들이 지금 조릿대발 눕히며 소리치는 바람이거나 이름 모를 풀꽃들 문득 나를 쳐다보는 수줍음으로 와서 내 가슴 벅차게 하는 까닭을 나는 안다 그러기에 짐승처럼 그이들 옛 내음이라도 맡고 싶어 나는 자꾸 집을 떠나고 그때마다 서울을 버리는 일에 신명나지 않았더냐 무엇에 쫓기듯 살아가는 이들도 힘이 다하여 비칠거리는 발걸음들도 무엇 하나씩 저마다 다져 놓고 사라진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나는 배웠다 그것이 부질없는 되풀이라 하더라도 그 부질없음 쌓이고 쌓여져서 마침내 길을 만들고 길 따라 그이들 따라 오르는 일 이리 힘들고 어려워도 왜 내가 지금 주저앉아서는 안 되는지를 나는 안다. 벼 - 이성..

<오규원> 사랑의기교2/비가와도이제는/프란츠카프카/커피나한잔/하늘과돌멩이

사랑의 기교2 - 라포로그에게 - 오규원 /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11월 - 사랑이 기교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나는 사랑이란 이 멍청한 명사에 기를 썼다. 그리고 이 동어 반복이 이 시대의 후렴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까지도 나는 이 멍청한 후렴에 매달렸다. 나뭇잎 나무에 매달리듯 당나귀 고삐에 매달리듯 매달린 건 나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사랑도 꿈도. 그러나 즐거워하라. 이 동어 반복이 이 시대의 유행가라는 사실은 이 시대의 기교가 하느님임을 말하고, 이 시대의 아들딸이 아직도 인간임을 말한다. 이 시대에 가장 아름다운 기교, 나의 하느님인 기교여. (1978년) * 라포르그(Jules Laforgue) :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서정적 반어법의 거장이며 베르 리브르(..

<박봉우> 휴전선 / 악의봄

휴전선 - 박봉우 / (1956 신춘문예 당선작) -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번은 천둥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 같은 정신도 신라 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 ……,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는 여기에 있었던가. 모든 유혈은 꿈같이 가고 지금도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 광장, 아직도 정맥은 끊어진 채 휴식인가 야위어가는 이야기뿐인가. 언제 한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같이 징그러운 바람이여,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살이를 또 한번 겪으라는가, 아무런 죄도 없이 피어난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얼마를 ..

<함형수> 회상의방 / 해바라기의비명

회상의 방(回想의 房) - 함형수 - 찢어진문풍지로쏘아드러오는차디찬바람에남포ㅅ불은 몇번이고으스러져다가는다시살아나고어두운불빛아래 少年은몇번이고눈을감고는蒼白한過去를그리고 暗澹한未來를낮고부시려애썻다. 어지러운四壁은괴롭디괴로운沈默속에잠기고. 半이나열려진채힘없는숨을쉬는어머니의입술. 少年의얼골은苦痛으로가득찼었고. 少年의두눈은殺氣를띠고빛났다. 아아하로ㅅ동안의고달픈勞動의疲勞는 그래도어머니에게不自然한熟睡를가저왔으며. 가엾은어머니의간난이는지금은시드러버린 어머니의젖꼭지도잊어버리고귀여운꿈가운데서 天眞한그얼골에깃벗든일슬펏든일두나절의光景을쫓고있었다.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 청년 화가 L을 위하여 / 함형수 / (1936) -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거운 비(碑)ㅅ 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