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 19

<이호우> 살구꽃핀마을 / 개화 / 석류 / 달밤 / 바람벌 / 회상

살구꽃 핀 마을 - 이호우 / (1955) -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 뉘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바람없는 밤을 꽃 그늘에 달이 오면 술 익는 초당(草堂)마다 정이 더욱 익으리니 나그네 저무는 날에도 마음 아니 바빠라. 개화(開花) - 이호우 / (1955) - 꽃이 피네, 한 잎 두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 석류(石榴)1 - 이호우 / (1955) - 토장맛 덤덤히 밴 석새 베 툭진 태생 두견은 섧다지만 울 수라도 있쟎던가 말 없이 가슴앓이에 보라! 맺힌 핏방울 * 석새 베 : 석새삼베의 약어로 240올의 날실로 짠 베라는 뜻. 성글고 굵은 ..

<이영도> 신록 / 노을 / 진달래 / 단풍 / 석류 / 단란 / 모란 / 황혼에서서

신록 - 이영도 / (1954) - 트인 하늘 아래 무성히 젊은 꿈들 휘느린 가지마다 가지마다 숨 가쁘다. 오월(五月)은 절로 겨워라. 우쭐대는 이 강산(江山). 노을 - 이영도 / (1954) - 먼 첨탑(尖塔)이 타네 내 가슴 절벽에도 돌아앉은 인정 위에 뜨겁던 임의 그 피 회한은 어진 깨달음인가 ‘골고다’로 젖는 노을. 진달래 - 이영도 / (1954) -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爛漫)히 멧등마다, 그 날 스러져 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恨)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 위엔 하늘이 무거운데, 연연(戀戀)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山河). 단풍 - 이영도 / (1954) - 너도 타라 여기 황홀한 불길 속에 사랑도 미움도 넘어선 ..

<김민정> 마치...처럼 / 반투명

마치...처럼 - 김민정 / 샘터 / 2007년 10월 - 내가 주저앉은 그 자리에 새끼고양이가 잠들어 있다는 거 물든다는 거 얼룩이라는 거 빨래엔 피존도 소용이 없다는 거 흐릿해도 살짝, 피라는 거 곧 죽어도 빨간 수성사인펜 뚜껑이 열려 있었다는 거 반투명 - 김민정 / 《창작과비평》 2021년 봄호 - 스스로가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눈으로 그가 벽시계를 보고 있다. 오래 보느라 노려보는 거 그렇다, 한쪽은 어느 하나의 기면이라 신은 아침을 믿고 아침은 그를 믿어 그는 아직 신을 믿는다. 다만 아침은 아름다우니 그는 혼잣말을 내뱉는데 침대 아래로 손에 쥔 둥근 붕대가 미끄러진다. 스스로가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팔로 휘적거리면서 그가 잡으려는데 집까지 굴러가는 테니스공이라 하고 십자로 칼집을 내었다 ..

<송찬호> 나비 / 찔레꽃

나비 - 송찬호 / , 문학과지성사, 2009(초판 1쇄), (2010년 초판 6쇄) - 나비는 순식간에 째크나이프처럼 날개를 접었다 펼쳤다 ​ 도대체 그에게는 삶에서의 도망은 없다 다만 꽃에서 꽃으로 유유히 흘러 다닐 뿐인데, ​ 수많은 눈이 지켜보는 환한 대낮에 나비는 꽃에서 지갑을 훔쳐냈었다 찔레꽃 - 송찬호 / 창비 / 2008년 06월 - 그해 봄 결혼식날 아침 네가 집을 떠나면서 나보고 찔레나무숲에 가보라 하였다 나는 거울 앞에 앉아 한쪽 눈썹을 밀면서 그 눈썹 자리에 초승달이 돋을 때쯤이면 너를 잊을 수 있겠다 장담하였던 것인데, 읍내 예식장이 떠들썩했겠다 신부도 기쁜 눈물 흘렸겠다 나는 기어이 찔레나무숲으로 달려 가 덤불 아래 엎어놓은 하얀 사기 사발 속의 너의 편지를 읽긴 읽었던 것인데 ..

<황지우> 새들도세상을 / 무등 / 너를기다리는동안 / 게눈속의연꽃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황지우 / (1981) - 映畫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륙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 앉는다. 무등(無等) - 황지우 / (1987) - 山 절망의산, 대가리를밀어버 린, 민둥산, 벌거숭이산 분노의산, 사랑의산, 침묵의 산, 함성의산, 증인의산, 죽음의산 부활의산, 영생..

<박성우> 고추씨같은귀울음소리들리다 / 가뜬한잠 / 물의베개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들리다 - 박성우 / 창비 / 2007년 03월 - 뒤척이는 밤, 돌아눕다가 우는 소릴 들었다 처음엔 그냥 귓밥 구르는 소리인 줄 알았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누군가 내 몸 안에서 울고 있었다 부질없는 일이야, 잘래잘래 고개 저을 때마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마르면서 젖어가는 울음소리가 명명하게 들려왔다 고추는 매운 물을 죄 빼내어도 맵듯 마른 눈물로 얼룩진 그녀도 나도 맵게 우는 밤이었다 가뜬한 잠 - 박성우 / 창비 / 2007년 03월 - 곡식 까부는 소리가 들렸다 둥그렇게 굽은 몸으로 멍석에 차를 잘도 비비던 할머니가 정지문을 열어놓고 누런 콩을 까부르고 있었다 키 끝 추슬러 잡티를 날려보내놓고는, 가뜬한 잠을 마루에 뉘였다 하도 무섭게 조용한 잠이어서 생일 밥숟갈 ..

<이문재> 농담 / 거미줄 / 너는내운명

농담 - 이문재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거미줄 - 이문재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 거미로 하여금 저 거미줄을 만들게 하는 힘은 그리움이다 ​ 거미로 하여금 거미줄을 몸 밖 바람의 갈피 속으로 내밀게 하는 힘은 이미 기다림을 넘어선 미움이다 하지만 그 증오는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이어서 고요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 팽팽하지 않은 기다림은 벌써 그 기다림에 진 것, 져버리고 만..

<권혁웅> 파문 / 내가던진물수제비가그대에게건너갈때 / 청춘1

파문 - 권혁웅 / 문학세계사 / 2001년 11월 - 오래 전 사람의 소식이 궁금하다면 어느 집 좁은 처마 아래서 비를 그어보라, 파문 부재와 부재 사이에서 당신 발목 아래 피어나는 작은 동그라미를 바라보라 당신이 걸어온 동그란 행복 안에서 당신은 늘 오른쪽 아니면 왼쪽이 젖었을 것인데 그 사람은 당신과 늘 반대편 세상이 젖었을 것인데 이제 빗살이 당신과 그 사람 사이에 어떤 간격을 만들어 놓았는지 궁금하다면 어느 집 처마 아래 서보라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에 촘촘히 꽂히는 저 부재에 주파수를 맞춰보라 그러면 당신은 오래된 라디오처럼 잡음이 많은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파문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 권혁웅 / 문학세계사 / 2001년 11월 - 그날 내가 던진 ..

<성미정> 사랑은야채같은것/처음엔당신의착한구두를/시인의폐허/심는다

사랑은 야채 같은 것 - 성미정 / 민음사 / 2003년 07월 -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씨앗을 품고 공들여 보살피면 언젠가 싹이 돋는 사랑은 야채 같은 것 그래서 그녀는 그도 야채를 먹기를 원했다 식탁 가득 야채를 차렸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오이만 먹었다 그래 사랑은 야채 중에서도 오이 같은 것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야채뿐인 식탁에 불만을 가졌다 그녀는 할 수 없이 고기를 올렸다 그래 사랑은 오이 같기도 하고 고기 같기도 한 것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의 식탁엔 점점 더 많은 종류의 음식이 올라왔고 그는 그 모든 것을 맛있게 먹었다 결국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사랑은 그가 먹는 모든 것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 성미정 -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그러..

<김용택> 달이떴다고전화를주시다니요 / 들국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 김용택 / 시와시학사 / 2007년 01월 -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이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들국 - 김용택 - 산마다 단풍만 저리 고우면 뭐헌다요 뭐헌다요 산 아래 물빛만 저리 고우면 뭐헌다요 산 너머, 저 산 너머로 산그늘도 다 도망가불고 산 아래 집 뒤안 하얀 억새꽃 하얀 손짓도 당신 안 오는데 무슨 헛짓이다요 저런 것들이 다 뭔 소용이다요 뭔 소용이다요, 어둔 산머리 초생달만 그대 얼굴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