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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사랑 / 장롱이야기

사랑 - 박형준 / , 창비 / 2002년 04월 - 오리떼가 헤엄치고 있다. 그녀의 맨발을 어루만져 주고 싶다. 홍조가 도는 그녀의 맨발, 실뱀이 호수를 건너듯 간질여 주고 싶다. 날개를 접고 호수위에 떠 있는 오리떼. 맷돌보다 무겁게 가라앉는 저녁해. 우리는 풀밭에 앉아있다. 산 너머로 뒤늦게 날아온 한 떼의 오리들이 붉게 물든 날개를 호수에 처박았다. 들풀보다 낮게 흔들리는 그녀의 맨발, 두 다리를 맞부딪히면 새처럼 날아갈 것 같기만 한. 해가 지는 속도보다 빨리 어둠이 깔리는 풀밭. 벗은 맨발을 하늘에 띄우고 흔들리는 흰 풀꽃들, 나는 가만히 어둠속에서 날개를 퍼득여 오리처럼 한번 날아보고 싶다. 뒤뚱거리며 쫓아가는 못난 오리, 오래 전에 나는 그녀의 눈 속에 힘겹게 떠 있었으나. 장롱 이야기 -..

<박라연> 서울에사는평강공주 / 몬테그로토에밤이오면 / 무창포에서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 박라연 /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05월 - 동지달에도 치자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일기를 쓴다 없는 것이 많이 더욱 따뜻한 아랫목은 평강공주의 꽃밭 색색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 무더기 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 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네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대추나무 밤마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꿰맨다 ......가끔...... 전기가...... 나가도...... 좋았다...... 우리는...... 새볔녘 우리 낮은 창문가엔 달빛이 언 채로 걸려 있거나 별 두서넛이 다투어 빛나고 있었다 전등의 촉수를 더 낮추어도 좋았을 우리의 사랑방에서 꽃씨 봉지랑 청색 도포랑 한땀 한땀 땀흘려 깁..

고고학에서 노벨상이 나오다...데니소바의 '구석기 동굴' 이야기 [배기동의 고고학 기행]

고고학에서 노벨상이 나오다...데니소바의 '구석기 동굴' 이야기 [배기동의 고고학 기행] 한국일보 입력 2023. 12. 24. 11:00 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겨진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알타이 산맥, 데니소바 동굴 아누이 강에서 바라본 데니소바 동굴 입구 모습. 20여m 위 절벽에 위치해 있다. 러시아 남중부 시베리아의 데니소바(Denisova) 동굴.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그리고 몽골 국경이 만나는 알타이 산맥 북쪽 사면에 위치한 데니소바 동굴은 전 세계 고고학 유적 중 유일하게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곳이다. 그만큼 이 동굴의 발견은 고대 인류사 연구에..

20[sr]인류진화 2023.12.24

17개 행성에 지하 바다 가능성…그곳엔 ‘외계 문어’ 헤엄칠까

17개 행성에 지하 바다 가능성…그곳엔 ‘외계 문어’ 헤엄칠까 경향신문 이정호 기자입력 2023. 12. 24. 08:00 NASA 연구진, 원거리 외계행성 분석 발표 ‘얼음 천체’이지만 내부에서 열 자체 발생 동위원소 붕괴·조석력이 ‘자연 난로’ 역할 외계 생명체 탐색용 망원경 개발 때 고려돼야 지구에서 4.2광년 떨어진 외계행성인 ‘프록시마 센타우리 b’ 표면 상상도. 최근 미국 항공우주국(NASA) 연구진은 프록시마 센타우리 b 등 17개 행성에 지하 바다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유럽남방천문대(ESO) 제공 #가까운 미래, 인류는 목성 위성 ‘유로파’를 향해 우주비행사 6명으로 구성된 탐사대를 파견한다. 지구를 떠난 직후부터 우주선 안은 ‘설렘’으로 가득하다. 지구 밖 천체..

19[sr]우주,지구 2023.12.24

<고재종> 날랜사랑 / 그리운죄 / 세한도

날랜 사랑 - 고재종 / 날랜 사랑 / 창비 / 2000년 12월 - 얼음 풀린 냇가 세찬 여울물 차고 오르는 은피라미떼 보아라 산란기 맞아 얼마나 좋으면 혼인색으로 몸단장까지 하고서 좀더 맑고 푸른 상류로 발딱발딱 배 뒤집어 차고 오르는 저 날씬한 은백의 유탄에 봄햇발 튀는구나 오호, 흐린 세월의 늪 헤쳐 깨끗한 사랑 하나 닦아 세울 날랜 연인아 연인들아 그리운 죄 - 고재종 - 산아래 사는 내가 산 속에 사는 너를 만나러 숫눈 수북이 덮힌 산길을 오르니 산수유 고 열매 빨간 것들이 아직도 옹송옹송 싸리울을 밝히고 서 있는 네 토담집 아궁이엔 장작불 이글거리고 너는 토끼 거두러 가고 없고 곰 같은 네 아내만 지게문을 빼꼼이 열고 들어와 몸 녹이슈! 한다면 내 생의 생생한 뿌리가 불끈 일어선들 그 어찌 ..

<정끝별> 디폴트값 / 모래는뭐래 / 세세세 / 과일의일과 / 깁스한시급

디폴트값 - 정끝별 - 얼마나 오래 혼자인가요? 얼마나 오래 말을 해본 적이 없나요? 얼마나 오래 날짜와 날씨와 요일과 요즘을 잊나요? 얼마나 오래 거울에서 얼굴을 보지 않나요? 얼마나 오래 여기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르나요? 얼마나 자주 자기를 웃어넘기나요? 얼마나 자주 누군가의 말과 눈빛에 베이나요? 얼마나 자주 이가 상할 정도로 이를 악무나요? 얼마나 자주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얼마나 자주 칼날에 혀를 대보나요? 얼마나의 해저를 산 채로 파고들어 저를 묻고 적을 묻다 두 눈이 불거지고 온몸이 투명해져 스스로 빛을 낼 때면 눈물에 부력이 생기고 가슴에 부레가 차올라 마침내 심해의 바닥을 치고 솟아오른다 언제나 너는 모래는 뭐래 - 정끝별 - 모래는 어쩌다 얼굴을 잃었을까? 모래는 무얼 포기하고..

<정끝별> 춘장대동백숲/기나긴그믐/가지가담을넘을때/가지에가지가걸릴때

춘장대 동백숲 - 정끝별 - 오백 년 동안 축축 늘어진 동백나무 가지가 바닥에 철렁 내려놓으며 들여놓은 동백나무 방들 ​ 미처 널어 말리지 못한 채 몇 철이나 쌓인 낙엽에 진 꽃에 어룽 햇살을 금침으로 깔아놓고 ​ 시간 없어 나 한 번 밖에 못했다며 젊은 아줌마를 앞세워 동백그늘을 나오는 아저씨라든가 그 나이에 한 번 허면 됐다며 추임새 좋게 동백 그늘에 드는 늙은 아줌마라든가 ​ 동백의 몸통은 쌍춘년 동백처럼 불끈불끈 동백의 팔다리는 춘삼월 정맥처럼 구불구불 ​ 봄이 길다는 춘장대 옆 마량리 화력발전소 뒤 그렇게 한 오백 년 동안 춘정의 봄군불을 때다 그만 벌겋게 데기도 하는 ​ 오백 년 된 동백숲의 온 몸 동력 내연(內燃)의 한 천년은 들고나겠네 기나긴 그믐 - 정끝별 - 소크라테스였던가 플라톤이었던..

<정끝별> 세상의등뼈/사랑의병법/은는이가/가스밸브/불선여정/강그라가르추

세상의 등뼈 - 정끝별 / 제22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 문학사상사 / 2007년 05월 - 누군가는 내게 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입술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어깨를 대주고 대준다는 것, 그것은 무작정 내 전부를 들이밀며 무주공산 떨고 있는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져 더 높은 곳으로 너를 올려 준다는 것 혈혈단신 땅에 묻힌 너의 뿌리 끝을 일깨우며 배를 대고 내려앉아 너를 기다려 준다는 것 논에 물을 대주듯 상처에 눈물을 대주듯 끝 모를 바닥에 밑을 대주듯 한 생을 뿌리고 거두어 벌린 입에 거룩한 밥이 되어 준다는 것,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 사랑의 병법 - 정끝별 - 네가 나를 베려는 순간 내가 너를 베는 궁극의 타이밍을 일격(一擊)이라 하고 뿌리가 같고 가지 잎새가 ..

<이성복> 남해금산 / 위기지학의시 / 서시

남해 금산 - 이성복 /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명시 100선 중 18 -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위기지학의 시” - 이성복 / [극지의 시] 中 - 시는 한편 쓰나 천편을 쓰나 차이가 없어요. 한편 한편에 천편의 수준이 다 드러나는 것, 한편이 수준미달이면 아무 것도 안 쓴 거나 마찬가지예요 인간의 정신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분야가 시와 수학 음악이라고 하지요. 시 수학 음악 이 세 가지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세 가지 모두 패턴을 추구하는 것이기에 아름다..

<최승자> 즐거운일기 / 나는기억하고있다 / 청파동을기억하는가

즐거운 일기 - 최승자 / 시집(1984) - 오늘 나는 기쁘다. 어머니는 건강하심이 증명되었고 밀린 번역료를 받았고 낮의 어느 모임 에서 수수한 남자를 소개받았으므로. 오늘도 여의도 강변에선 날개들이 풍선 돋친 듯 팔렸고 도곡동 개나리 아파트의 밤하늘에선 달님이 별님들을 둘러앉히고 맥주 한 잔씩 돌리며 봉봉 크랙카를 깨물고 잠든 기린이의 망막 에선 노란 튤립 꽃들이 까르르거리고 기린이 엄마의 꿈속에선 포니 자가용이 휘발유도 없이 잘 나가고 피곤한 기린이 아빠의 겨드랑이에선 지금 남몰래 일 센티미터의 날개가 돋고 ……. 수영이 삼촌 별아저씨 오늘도 캄사캄사합니다. 아저씨들이 우리 조카들을 많이많이 사랑해 주 신 덕분에 오늘도 우리는 코리아의 유구한 푸른 하늘 아래 꿈 잘 꾸고 한판 잘 놀아났습니다. 아싸..

<함민복> 서울역그식당 / 그샘 / 눈물은왜짠가 / 그림자

서울역 그 식당 - 함민복 /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 창비 / 1999년 01월 - 그리움이 나를 끌고 식당으로 들어갑니다 그대가 일하는 전부를 보려고 구석에 앉았을 때 어디론가 떠나가는 기적소리 들려오고 내가 들어온 것도 모르는 채 푸른 호수 끌어 정수기에 물 담는 데 열중인 그대 그대 그림자가 지나간 땅마저 사랑한다고 술 취한 고백을 하던 그날 밤처럼 그냥 웃으면서 밥을 놓고 분주히 뒤돌아서는 그대 아침, 뒤주에서 쌀 한 바가지 퍼 나오시던 어머니처럼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마치 밥 먹으러 온 사람처럼 밥을 먹습니다 나는 마치 밥 먹으러 온 사람처럼 밥을 먹고 나옵니다 그 샘 - 함민복 - 네 집에서 그 샘으로 가는 길은 한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이면 물 길러 가는 인기척을 들을 수 있..

<기형도> 입속의검은잎/빈집/내인생의中世/엄마걱정/질투는나의힘

입 속의 검은 잎 - 기형도 / 시집 (1989) - 택시 운전사는 어두운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

<허수경> 혼자가는먼집/잎새라는이름/너의눈속에나는있다/봄날은간다

혼자 가는 먼 집 - 허수경 / 시집 『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지성사, 1992) -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 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 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 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 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이 나에게 기대 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 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황동규> 조그만사랑노래 / 기항지1 / 풍장1 / 즐거운편지

조그만 사랑 노래 - 황동규 / , 1978 -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 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환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 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기항지 1 - 황동규 / , 1967 - 걸어서 항구(港口)에 도착했다. 길게 부는 한지(寒地)의 바람 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 긴 눈 내릴 듯 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 지전(紙錢)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 버리고 조용한 마음으로 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 정박중의 어두운 용골(龍骨)들이 ..

암각화는 고대 하드디스크에 저장된 사진(Twilight At The River Side)

순광으로 촬영된 암각화. 탐블르이, 카자흐스탄, 2017 / 사진가 강운구 암각화는 고대 하드디스크에 저장된 사진 창작의 순간 22. 강운구의 암각화 사진전 조선일보 조인원 기자 입력 2023.12.09. ‘암각화가 어디 보여?’ 암각화를 보러 울주군 반구대를 가보면 실망부터 한다. 사진으로는 바위에 새긴 고래와 동물들이 또렷이 보이지만 막상 현장에 바위 앞에선 그림을 찾기 어렵다. 사실 신석기시대 그림이 희미한 건 당연하다. 그래도 암각화를 보고 싶다면 햇빛이 비스듬히 비추는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강운구 사진가는 최근 전시 중인 자신의 암각화 사진전에서 암각화 사진을 어떻게 찍었는지 알려주었다. “ 기운 햇살은 색 온도가 낮아 붉은색이 두드러진다. 카메라 화이트밸런스를 데이라이트에 맞추고 암각화를 그..

<정현종> 초록기쁨 / 나는별아저씨 / 모든순간이꽃봉우리인것을

초록 기쁨 - 봄 숲에서 - 정현종 / 시집 , 1985 - 해는 출렁거리는 빛으로 내려오며 제 빛에 겨워 흘러 넘친다. 모든 초록, 모든 꽃들이 왕관이 되어 자기의 왕관인 초록과 꽃들에게 웃는다. 비유의 아버지답게 초록의 샘답게 하늘의 푸른 넓이를 다해 웃는다. 하늘 전체가 그냥 기쁨이며 신전이다. 해여, 푸른 하늘이여. 그 빛에, 그 공기에 취해 찰랑대는 자기의 즙에 겨운, 공중에 뜬 물인 나뭇가지들의 초록 기쁨이여. 흙은 그리고 깊은 데서 큰 향기로운 눈동자를 굴리며 넌지시 주고받으며 싱글거린다. 오, 이 향기 싱글거리는 흙의 향기 내 코에 댄 깔대기와도 같은 하늘의, 향기 나물들의 향기 나는 별아저씨 - 정현종 / 시집 , 1974 - 나는 별아저씨 별아 나를 삼촌이라 불러다오 별아 나는 너의 삼..

<정호승> 파도타기 / 그리운부석사 / 풍경달다

파도타기- 정호승 / , 1979 -눈 내리는 겨울밤이 깊어갈수록눈 맞으며 파도 위를 걸어서 간다.쓰러질수록 파도에 몸을 던지며가라앉을수록 눈사람으로 솟아오르며이 세상을 위하여 울고 있던 사람들이또 이 세상 어디론가 끌려가는 겨울밤에굳어 버린 파도에 길을 내며 간다.먼 산길 짚신 가듯 바다에 누워넘쳐 버릴 파도에 푸성귀로 누워서러울수록 봄눈을 기다리며 간다.다정큼나무 숲 사이로 보이던 바다 밖으로지난 가을 산국화도 몸을 던지고칼을 들어 파도를 자를 자 저물었나니단 한 번 인간에 다다르기 위해살아갈수록 눈 내리는 파도를 탄다.괴로울수록 홀로 넘칠 파도를 탄다.어머니 손톱 같은 봄눈 오는 바다 위로솟구쳤다 사라지는 우리들의 발사라졌다 솟구치는 우리들의 생(生)그리운 부석사- 정호승 / 창비, 1999년 ..

<정희성> 저문강에삽을씻고 / 한그리움이다른그리움에게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정희성 / (1978) -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 정희성 /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 창비 / 1998년 05월 - 어느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

<이성부> 산길에서 / 벼

산길에서 - 이성부 / , 1974 - 이 길을 만든 이들이 누구인지를 나는 안다 이렇게 길을 따라 나를 걷게 하는 그이들이 지금 조릿대발 눕히며 소리치는 바람이거나 이름 모를 풀꽃들 문득 나를 쳐다보는 수줍음으로 와서 내 가슴 벅차게 하는 까닭을 나는 안다 그러기에 짐승처럼 그이들 옛 내음이라도 맡고 싶어 나는 자꾸 집을 떠나고 그때마다 서울을 버리는 일에 신명나지 않았더냐 무엇에 쫓기듯 살아가는 이들도 힘이 다하여 비칠거리는 발걸음들도 무엇 하나씩 저마다 다져 놓고 사라진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나는 배웠다 그것이 부질없는 되풀이라 하더라도 그 부질없음 쌓이고 쌓여져서 마침내 길을 만들고 길 따라 그이들 따라 오르는 일 이리 힘들고 어려워도 왜 내가 지금 주저앉아서는 안 되는지를 나는 안다. 벼 - 이성..

<오규원> 사랑의기교2/비가와도이제는/프란츠카프카/커피나한잔/하늘과돌멩이

사랑의 기교2 - 라포로그에게 - 오규원 /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11월 - 사랑이 기교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나는 사랑이란 이 멍청한 명사에 기를 썼다. 그리고 이 동어 반복이 이 시대의 후렴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까지도 나는 이 멍청한 후렴에 매달렸다. 나뭇잎 나무에 매달리듯 당나귀 고삐에 매달리듯 매달린 건 나지만, 결과는 비참했다 사랑도 꿈도. 그러나 즐거워하라. 이 동어 반복이 이 시대의 유행가라는 사실은 이 시대의 기교가 하느님임을 말하고, 이 시대의 아들딸이 아직도 인간임을 말한다. 이 시대에 가장 아름다운 기교, 나의 하느님인 기교여. (1978년) * 라포르그(Jules Laforgue) :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서정적 반어법의 거장이며 베르 리브르(..

<박봉우> 휴전선 / 악의봄

휴전선 - 박봉우 / (1956 신춘문예 당선작) -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번은 천둥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 같은 정신도 신라 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 ……,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는 여기에 있었던가. 모든 유혈은 꿈같이 가고 지금도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 광장, 아직도 정맥은 끊어진 채 휴식인가 야위어가는 이야기뿐인가. 언제 한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같이 징그러운 바람이여,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살이를 또 한번 겪으라는가, 아무런 죄도 없이 피어난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얼마를 ..

<함형수> 회상의방 / 해바라기의비명

회상의 방(回想의 房) - 함형수 - 찢어진문풍지로쏘아드러오는차디찬바람에남포ㅅ불은 몇번이고으스러져다가는다시살아나고어두운불빛아래 少年은몇번이고눈을감고는蒼白한過去를그리고 暗澹한未來를낮고부시려애썻다. 어지러운四壁은괴롭디괴로운沈默속에잠기고. 半이나열려진채힘없는숨을쉬는어머니의입술. 少年의얼골은苦痛으로가득찼었고. 少年의두눈은殺氣를띠고빛났다. 아아하로ㅅ동안의고달픈勞動의疲勞는 그래도어머니에게不自然한熟睡를가저왔으며. 가엾은어머니의간난이는지금은시드러버린 어머니의젖꼭지도잊어버리고귀여운꿈가운데서 天眞한그얼골에깃벗든일슬펏든일두나절의光景을쫓고있었다.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 청년 화가 L을 위하여 / 함형수 / (1936) -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거운 비(碑)ㅅ 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

<김종길> 설날아침에 / 성탄제

설날 아침에 - 김종길 / 시집 (1969) -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 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 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성탄제 - 김종길 / 시집 (1969) - 어두운 방안엔 빠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러이 잦아드는 어린 ..

<조병화> 해마다봄이되면 / 낙엽끼리모여산다 / 외로운사람에게

해마다 봄이 되면 - 조병화 / (1973) -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 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땅 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생명을 만드는 쉬임없는 작업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 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 봄은 피어나는 가슴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오,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 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나뭇가지에서 물 위에서 뚝에서 솟는 대지의 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낙엽끼리 모여 산다 - 조병화 / (1950) - 낙엽에 누워 산다. 낙엽끼리 모..

<전봉건> 피아노 / 사랑

피아노 - 전봉건 / (1980) - 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서는 끊임없이 열 마리씩 스무 마리씩 신선한 물고기가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 나는 바다로 가서 가장 신나게 시퍼런 파도의 칼날 하나를 집어 들었다. 사랑 - 전봉건 / (1985) - 사랑한다는 것은 열매가 맺지 않는 과목은 뿌리째 뽑고 그 뿌리를 썩힌 흙 속의 해충은 모조리 잡고 그리고 새 묘목을 심기 위해서 깊이 파헤쳐 내 두 손의 땀을 섞은 흙 그 흙을 깨끗하게 실하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아무리 모진 비바람이 삼킨 어둠이어도 바위 속보다도 어두운 밤이어도 그 어둠 그 밤을 새워서 지키는 일이다. 훤한 새벽 햇살이 퍼질 때까지 그 햇살을 뚫고 마침내 새 과목이 샘물 같은 그런 빛 뿌리면서 솟을 때까지 지키는 일이다. 지켜보..

<이수복> 봄비 / 꽃씨

봄비 - 이수복 / (1955) -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외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香煙)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꽃씨 - 이수복 / (2009) - 가장 귀한 걸로 한 가지만 간직하겠소 그러고는 죄다 잊어버리겠소. ​ 꽃샘에 노을질, 그 황홀될 한 시간만 새김질하며 시방은 눈에 숨어 기다리겠소. ​ 손금 골진 데 꽃씨를 놓으니 문득 닝닝거리며 날아드는 꿀벌들... ​ 따순 해 나래를 접고 향내 번져 꿈처럼 윤 흐르는 밤.... 이수복(李壽福, 1924 ~ 1986) 출신지 : 전라남도 함평 전라남도문화상(1955..

<이승훈> 홍가시나무 / 호랑이 / 암호 / 피안 / A와나 / 모든사람이 / 위독

홍가시나무 - 이승훈 / 2022 여름호 - 입안에 가시 돋친 그런 날이 있었다 거꿀반응이라던 역류성 식도염증 맥 짚어 당신이 내린 어혈은 내 우울증 벌판으로 뛰쳐나가 속을 다 게워내도 언제쯤 불살라질까 너를 보낸 붉은 죄 평생을 꼬박 태워도 목 깊숙이 걸렸다 여기서 거기까지 몇 년이나 걸릴지 더듬더듬 짚어가는 네 맘속 그 먼 길 온몸이 불에 데인듯 한발 한발 뜨겁다 단원 김홍도,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 조선 18세기 후반, 비단에 채색, 90.4×43.8㎝, 삼성미술관 리움 호랑이 - 이승훈 / 『이승훈시전집』 - 그는 벽에 호랑이를 그리고 벽 속으로 들어갔지 나도 이 시를 쓰고 시 속으로 들어가면 얼마나 좋을까? 가능한 적게 먹고 적게 공부하자 그는 웃고 나는 시를 쓰네 암호 - 이승훈 / 시집 『시가..

<신동집> 오렌지 / 목숨 / 어떤사람

오렌지 - 신동집 / (1989) -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오렌지는 여기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 더도 덜도 아닌 오렌지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찹잘한 속살을 깔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대는 순간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다. 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다. 시간이 똘똘 배암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에 한없이 어진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오 누구인지 잘은 아직 몰라도...

<신동엽> 껍대기는가라/산에언덕에/봄은/진달래산천/누가하늘을...

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 / (1967) -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산에 언덕에 - 신동엽 / (1963) -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

<한하운> 파랑새 / 보리피리

파랑새 - 한하운 / (1955) -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보리 피리 - 한하운 / (1955) - 보리 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 ― ㄹ 닐니리 * 한하운(韓何雲, 1919-1975) 출신지 : 함경남도 함주 저서(작품) : 전라도길, 한하운시초, 보리피리, 나의 슬픈 반생기, 황톳길 대표관직(경력) : 대한한센연맹위원회장 본명은 태영(泰永). 함경남도 함주 출신. 종규(鍾奎)의 아들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