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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주막에서 / 눈오는밤에 / 낙동강

보물 527호/ 단원풍속도첩 25폭檀園風俗圖帖二十五幅중 『주막』, 국립중앙박물관 주막에서 - 김용호 / (1956) - 어디든 멀찌감치 통한다는 길 옆 주막 그 수없이 입술이 닿은 이 빠진 낡은 사발에 나도 입술을 댄다. 흡사 정처럼 옮아 오는 막걸리 맛 여기 대대로 슬픈 노정(路程)이 집산하고 알맞은 자리, 저만치 위의(威儀) 있는 송덕비(頌德碑) 위로 맵고도 쓴 시간이 흘러가고 … 세월이여! 소금보다도 짜다는 인생을 안주하여 주막을 나서면, 노을 비낀 길은 가없이 길고 가늘더라만 내 입술이 닿은 그런 사발에 누가 또한 닿으랴. 이런 무렵에 눈 오는 밤에 - 김용호 / 시집 『시원 산책』, 1964) - 오누이들의 정다운 얘기에 어느 집 질화로엔 밤알이 토실토실 익겠다. 콩기름 불 실고추처럼 가늘게 피..

<설정식> 종 / 해바라기3

에밀레종의 이동(일제시대) 종(鐘) - 설정식 / 창간호(1946. 7.) - 만(萬) 생령(生靈) 신음을 어드메 간직하였기 너는 항상 돌아앉아 밤을 지키고 새우느냐. 무거히 드리운 침묵이여 네 존엄을 뉘 깨트리드뇨 어느 권력이 네 등을 두드려 목메인 오열(嗚咽)을 자아내드뇨. 권력이어든 차라리 살을 앗으라 영어(囹圄)에 물러진 살이어든 아 권력이어든 아깝지도 않을 살을 저미라. 자유는 그림자보다는 크드뇨. 그것은 영원히 역사의 유실물(遺失物)이드뇨. 한아름 공허(空虛)여 아 우리는 무엇을 어루만지느뇨. 그러나 무거히 드리운 인종(忍從)이여 동혈(洞穴)보다 깊은 네 의지 속에 민족의 감내(堪耐)를 살게 하라 그리고 모든 요란한 법을 거부하라. 내 간 뒤에도 민족은 있으리니 스스로 울리는 자유를 기다리라...

<이형기> 낙화 / 폭포

낙화 - 이형기 / (1963) -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 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아롱아롱 꽃잎이 지는 어느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폭포 - 이형기 / (1963) -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을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질주하는 전율과 전율 끝에 단말마(斷末魔)를 꿈꾸는 벼랑의 직립(直立)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 그대 아는가 석탄기(石炭紀)의 종말을 그때 하늘 높..

<박용래> 저녁눈 / 월훈 / 점묘 / 연시

저녁 눈 - 박용래 / (1966) -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월훈(月暈) - 박용래 / (1976) - 첩첩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습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 둑, 그 너머 강기슭에서 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마을. 갱(坑) 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 지, 꽁깍지처럼 후미진 외딴 집, 외딴 집에도 불빛은 앉아 이슥토록 창문은 모과(木瓜)빛입니다. 기인 밤입니다. 외딴 집 노인은 홀로 잠이 깨어 출출한 나머지 무를 깎기도 ..

<정한모> 가을에 / 어머니 / 갈대 / 나비의여행

가을에 - 정한모 / (1959) -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으며 가볍게 가을을 날으고 있는 나뭇잎, 그렇게 주고받는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엄마의 치마 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 쥔 아가의 작은 손아귀 안에 당신을 찾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어제 오늘이 마침낸 전설 속에 묻혀 버리는 해저(海底) 같은 그날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달에는 은도끼로 찍어 낼 계수나무가 박혀 있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영원히 아름다운 진리임을 오늘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어렸을 적에 불같이 끓던 병석에서 한없이 밑으로만 떨어져 가던 그토록 아득한 추락과 그 속력으로 몇 번이고 까무러쳤던 그런 공포의 기억..

<유치환> 울릉도 / 생명의서 / 바위 / 깃발 / 뜨거운노래 / 일월

울릉도 - 유치환 / (1948) - 동쪽 먼 심해선(深海線) 밖의 한 점 섬 울릉도(鬱陵島)로 갈거나. 금수(錦繡)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長白)의 멧부리 방울 뛰어, 애달픈 국토(國土)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창망(蒼茫)한 물굽이에 금시에 지워질 듯 근심스레 떠 있기에 동해(東海) 쪽빛 바람에 항시(恒時) 사념(思念)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지나 새나 뭍으로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풍랑(風浪) 따라 밀리어 오는 듯도 하건만 멀리 조국(朝國)의 사직(社稷)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 올 적마다 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懇切)함이여!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생명의 서(書) - 유치환 / (1938) - 나의 지식이..

<박두진> 도봉 / 꽃 / 향현 / 해 / 묘지송 / 청산도 / 어서너는오너라

도봉(道峰) - 박두진 / (1946) -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 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人跡)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빈 골 골을 되돌아올 뿐. 산그늘 길게 늘이며 붉게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꽃 - 박두진 / 시집 (1962) -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 번만의 어느 날의 아픈 피 흘림.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궈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꺼질 듯 보드라운 황홀한 한 떨..

<박목월> 나그네/윤사월/청노루/산이 날/한탄조/가정/이별가/하관/산도화

​나그네 - 술 익은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芝薰에게 / 朴木月 / (1946) -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길은 외줄기 남도(南道) 삼백 리 ​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윤사월(閏四月) - 박목월(朴木月) / (1946) - 송화(松花) 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 문설주에 귀 대고 엿듣고 있다 ​청노루 - 박목월(朴木月) / (1946. 6.) -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 느릅나무 속잎 피어가는 열두 굽이를 ​ 청노루 맑은 눈에 ​ 도는 구름 ​ ​산이 날 에워싸고 - 박목월(朴木月) - 산이 날 에..

<조지훈> 승무 / 낙화 / 완화삼 / 봉황수 / 석문 / 고풍의상

장우성, , 1937, 비단에 채색, 198×161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승무(僧舞) - 조지훈 / (1939) -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 없이 녹는 밤에 오동(梧桐)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

<윤동주> 자화상 / 또다른고향 / 참회록 / 십자가 / 길 / 간(肝)

자화상 - 윤동주 / (1948) -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 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 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며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또 다른 고향 - 윤동주 / (1948) -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

<윤동주> 별헤는밤 / 서시 / 쉽게씌여진시 / 병원 / 아우의인상화

별 헤는 밤 - 윤동주 / (1948) -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 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詩)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소녀(異國少女)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은행식물원 ⑤가을 수목원 풍경(23/10/31, 언제까지나 / Edgar Tuniyants)

요즈음 – 은행식물원 ⑤가을 수목원 풍경 – 하늘 볕 구르는 숲 아이들 졸레졸레 어슬렁 들어가서 記憶을 뒤적이다 머리에 서리가 내려 돌아서고 말았다. 배달9220/개천5921/단기4356/서기2023/10/31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은행식물원 ⑤가을 수목원 풍경 (1) 산성을 가지 못하는 心事 달래려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며 찾아간 인근 식물원. 조막막한 아이들이 졸레졸레 선생님을 따른다. 그 그림 바라보며 기억을 뒤적거리니 분명 나에게도 있었지만 머리에 허연 서리 내려 돌아서고 말았다 (2) 조그마한 식물원을 한바퀴 돌아 나오니 답답한 마음 툭 터지는 느낌. 하지만 아직도 물러가지 앉고 떡 버티고 선 巨惡. 그 앞에 조아리고 있는 뭇 중생. 자고로 그보다 더한 역사도 있었나니 이 미물은 그저 바..

<김규동> 나비와광장 / 보일러사건의진상 / 고향 / 무등산

나비와 광장 - 김규동 / (1952) - 현기증 나는 활주로의 최후의 절정에서 흰나비는 돌진의 방향을 잊어 버리고 피 묻은 육체의 파편들을 굽어본다. 기계처럼 작열한 작은 심장을 축일 한 모금 샘물도 없는 허망한 광장에서 어린 나비의 안막을 차단하는 건 투명한 광선의 바다뿐이었기에 진공의 해안에서처럼 과묵(寡默)한 묘지 사이사이 숨가쁜 Z기의 백선과 이동하는 계절 속 불길처럼 일어나는 인광(燐光)의 조수에 밀려 이제 흰나비는 말없이 이지러진 날개를 파닥거린다. 하얀 미래의 어느 지점에 아름다운 영토는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푸르른 활주로의 어느 지표에 화려한 희망은 피고 있는 것일까. 신도 기적도 이미 승천하여 버린 지 오랜 유역 그 어느 마지막 종점을 향하여 흰나비는 또 한 번 스스로의 신화와 더불어 ..

<이용악> 오랑캐꽃 / 낡은 집

오랑캐꽃 - 이용악 / (1947) - 오랑캐꽃 -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움에 살았다는 우리의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 태를 드리인 오랑캐의 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 -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 건너로 쫓겨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졸짝을 구름이 흘러 백 년이 몇 백 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 줄게 울어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 오랑캐꽃 : 제비꽃을 다른 말로 일컫는 말 * 도래샘 : 도랑가에 저절로 샘이 솟아 빙 돌아서 흘러..

<김남조> 겨울바다 / 설일 / 정념의기 / 목숨 / 그대있음에

겨울 바다 - 김남조 / 시집 (1967) -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海風)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 버리고 허무의 불 물 이랑 위에 불 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설일(雪日) - 김남조 / (1967) - 겨울 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

<김광규> 희미한옛사랑의그림자 / 대장간의유혹 / 나뭇잎하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 시집(1979) - 4 · 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는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

<김광림> 산山 / 쥐

산 - 김광림 / (1970) - 한여름에 들린 가야산(伽倻山) 독경(讀經) 소리 오늘은 철 늦은 서설(瑞雪)이 내려 비로소 벙그는 매화 봉오리. 눈 맞는 해인사(海印寺) 열두 암자(庵子)를 오늘은 두루 한겨울 면벽(面壁)한 노승(老僧) 눈매에 미소가 돌아. * 작품해설 : 이 시는 눈 내리는 가야산의 선적(禪的) 고요와 종교적 깊이를 노래한 것으로, 그것을 그려내는 수법 또한 불교적 성격을 띠게 되어, 한 편의 절묘한 조화를 일구어낸 작품이라 하겠다. 이 시에서는 선적(禪的)인 세계를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선의 세계는 점진적 논리 구조나 인과관계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설명되는 세계가 아니라, 느닷없는 깨달음이라는 사유의 비약이 그 본 질이다. 선의 세계에 있어서 시작과 그 끝인 깨달음까지..

<김광섭> 성북동비둘기 / 생의감각 / 마음 / 저녁에

성북동 비둘기 - 김광섭 / (1968)창간호 -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직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

<이동주> 강강술래

강강술래 - 이동주 / 시집 (1955) - 여울에 몰린 은어(銀魚)떼. 삐비꽃 손들이 둘레를 짜면 달무리가 비잉 빙 돈다. 가아응 가아응 수우워얼 래에 목을 빼면 설움이 솟고 …… 백장미(白薔薇) 밭에 공작(孔雀)이 취했다. 뛰자 뛰자 뛰어나 보자 강강술래 뇌누리에 테이프가 감긴다. 열두 발 상모가 마구 돈다. 달빛이 배이면 술보다 독한 것. 기폭(旗幅)이 찢어진다. 갈대가 스러진다. 강강술래. 강강술래. * 뇌두리 : 물살, 소용돌이의 옛말 * 상모: 벙거지의 꼭지에다 참대와 구슬로 장식하고 그 끝에 해오라기의 털이나 긴 백지오리를 붙인 것. 털 상모와 열두 발 상모가 있다. * 이동주(1920~1979) 전남 해남 출신, 시인. 남성고교 교사. 전북대학교 원광대학교 강사. 호남신문 문화부장 1920..

성남시청공원㉓(근황, 23/10/25, Tomorrow and Tomorrow / Eorzean Symphony)

요즈음 – 성남시청공원㉓(근황) 인생길 가다보면 돌부리 만나기도... 넘어져 하염없이 먼 하늘 바라보니 거기에 치열히 살다간 시인들이 보였다. 배달9220/개천5921/단기4356/서기2023/10/25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성남시청공원㉓(근황) (1) 오른쪽 엄지발톱에서 발단. 야금야금 번식한 곰팡이. 불균형이 허리에 영향주어 걷기 불편하더니 이런처런 치료 안되어 끝내 수술로 치료중. 흡사 개미가 댐을 무너트리는 형국. 그러니까 8월부터니까 장장 3개월. 아무래도 올해는 좋아하는 산성도, 식물원도, 詩도 쉬어야 할 듯... (2) 머릿 속 생각만이 아닌 몸으로 부딪힌 자연과 현상을 그물망으로 포착하여 그리는 詩作인지라 自作은 자제하고... 항상가까이하고싶은詩를 정리중... 차제에 친일시인들, ..

송(送) 옥상정원(23/10/07, Lincoln's Lament / Michael Hoppe)

요즈음 – 송(送) 옥상정원 – 우주를 들여앉힌 몇 평의 네모의 틀 같이 한 느낌 나눈 시편(詩片)을 반추하며 나 홀로 텅 빈 정원에서 그려보는 추억들 배달9220/개천5921/단기4356/서기2023/10/07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옥상정원을 보내며... (1) 6년반 함께한 옥상정원. 조그마한 공간에 우주를 알게해 주었고 언제나 환한 미소로 맞이해주었건만 나를 한없이 귀여워해주었던 할아버지, 할머니도 떠나셨고, 아버지도 가셨고. 일가친척들, 지인들, 친구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떠나셨고, 떠나시고 있고... 살아있는 사람들도 연락을 끊고, 연락을 않고 연락을 하고 싶어도 꺼려지고... 그러는 가운데도 내 살아있는 동안 같이 할 것만 같던 혼자 올라 넉두리하던 옥상정원을 왜 보내야 했던 ..

<신경림> 갈대 / 농무 / 목계장터 / 파장 / 가난한사랑노래

갈대 - 신경림 / (1956) -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농무(農舞) - 신경림 / 가을호3호 1971 -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주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

<박재삼>울음이타는가을강/자연/추억에서/밤바다에서/박애의별/한/흥부

울음이 타는 가을 강 - 박재삼 / (1962) -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자연 - 춘향이 마음 초(抄) / 박재삼 / (1962) - 뉘가 알리 어느 가지에서는 연신 피고 어느 가지에서는 또한 지고들 하는 움직일 줄 아는 내 마음 꽃나무는 내 얼굴에 가지 벋은 채 참말로 참말로 사랑 때문에 햇살 때문에 못 ..

<김춘수> 꽃 / 꽃을위한서시 / 샤갈의마을에내리는눈 / 시1 / 능금

꽃 - 김춘수 / (1952)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꽃을 위한 서시 - 김춘수 / (1957) -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存在)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 추억(追憶)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

신석정논문5) 1930년대 시에 나타난 ‘지도’ 표상과 세계의 상상 / 강호정

■ 저항적 목가시인 신석정(辛夕汀)에 관한 논문 5편 □ 신석정논문1) 신석정 초기 시편에서 본 참여의식과 저항의식 / 하재준 □ 신석정논문2) 어머니,산(山),대바람소리 ―신석정(辛夕汀)론 / 윤여탁 □ 신석정논문3) 신석정 시에서의 근대성과 노장적 자연인식 / 송기한 □ 신석정논문4) 신석정 초기시의 근대적 자연미와 공동체 의식 / 김옥성 -‘지구’ 이미지를 중심으로 □ 신석정논문5) 1930년대 시에 나타난 ‘지도’ 표상과 세계의 상상 ― 정지용, 임화, 김기림, 신석정의 시를 중심으로 / 강호정 □ 신석정논문5) 1930년대 시에 나타난 ‘지도’ 표상과 세계의 상상 ― 정지용, 임화, 김기림, 신석정의 시를 중심으로 강 호 정* *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krusoe@hanmail.net..

신석정논문4) 신석정 초기시의 근대적 자연미와 공동체 의식   / 김옥성

■ 저항적 목가시인 신석정(辛夕汀)에 관한 논문 5편 □ 신석정논문1) 신석정 초기 시편에서 본 참여의식과 저항의식 / 하재준 □ 신석정논문2) 어머니,산(山),대바람소리 ―신석정(辛夕汀)론 / 윤여탁 □ 신석정논문3) 신석정 시에서의 근대성과 노장적 자연인식 / 송기한 □ 신석정논문4) 신석정 초기시의 근대적 자연미와 공동체 의식 / 김옥성 -‘지구’ 이미지를 중심으로 □ 신석정논문5) 1930년대 시에 나타난 ‘지도’ 표상과 세계의 상상 ― 정지용, 임화, 김기림, 신석정의 시를 중심으로 / 강호정 □ 신석정논문4) 신석정 초기시의 근대적 자연미와 공동체 의식 -‘지구’ 이미지를 중심으로 김옥성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국현대시 전공, hywriter@dankook.ac.kr Ⅰ. 머리말 Ⅱ...

신석정논문3) 신석정 시에서의 근대성과 노장적 자연인식 / 송기한

■ 저항적 목가시인 신석정(辛夕汀)에 관한 논문 5편 □ 신석정논문1) 신석정 초기 시편에서 본 참여의식과 저항의식 / 하재준 □ 신석정논문2) 어머니,산(山),대바람소리 ―신석정(辛夕汀)론 / 윤여탁 □ 신석정논문3) 신석정 시에서의 근대성과 노장적 자연인식 / 송기한 □ 신석정논문4) 신석정 초기시의 근대적 자연미와 공동체 의식 / 김옥성 -‘지구’ 이미지를 중심으로 □ 신석정논문5) 1930년대 시에 나타난 ‘지도’ 표상과 세계의 상상 ― 정지용, 임화, 김기림, 신석정의 시를 중심으로 / 강호정 □ 신석정논문3) 신석정 시에서의 근대성과 노장적 자연인식 송기한(대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차 례∥ 1. 근대성과 자연미 2. ‘촛불’의 인위적 세계와 ‘밤’의 통합적 세계 3. 절대적 관점의 상실..

신석정논문2) 어머니,산(山),대바람소리 ―신석정(辛夕汀)론 / 윤여탁

■ 저항적 목가시인 신석정(辛夕汀)에 관한 논문 5편 □ 신석정논문1) 신석정 초기 시편에서 본 참여의식과 저항의식 / 하재준 □ 신석정논문2) 어머니,산(山),대바람소리 ―신석정(辛夕汀)론 / 윤여탁 □ 신석정논문3) 신석정 시에서의 근대성과 노장적 자연인식 / 송기한 □ 신석정논문4) 신석정 초기시의 근대적 자연미와 공동체 의식 / 김옥성 -‘지구’ 이미지를 중심으로 □ 신석정논문5) 1930년대 시에 나타난 ‘지도’ 표상과 세계의 상상 ― 정지용, 임화, 김기림, 신석정의 시를 중심으로 / 강호정 □ 신석정논문2) 어머니, 산(山), 대바람소리 - 신석정(辛夕汀)론 윤여탁(서울대 교수) Ⅰ. 일제 시대에 지은 붉은 벽돌로 지은 교실의 화단 옆에서 깨끼발로 서서 건물 안을 들여다보는 조무래 기 중학생..

신석정논문1) 신석정 초기 시편에서 본 참여의식과 저항의식 / 하재준

■ 저항적 목가시인 신석정(辛夕汀)에 관한 논문 5편 □ 신석정논문1) 신석정 초기 시편에서 본 참여의식과 저항의식 / 하재준 □ 신석정논문2) 어머니,산(山),대바람소리 ―신석정(辛夕汀)론 / 윤여탁 □ 신석정논문3) 신석정 시에서의 근대성과 노장적 자연인식 / 송기한 □ 신석정논문4) 신석정 초기시의 근대적 자연미와 공동체 의식 / 김옥성 -‘지구’ 이미지를 중심으로 □ 신석정논문5) 1930년대 시에 나타난 ‘지도’ 표상과 세계의 상상 ― 정지용, 임화, 김기림, 신석정의 시를 중심으로 / 강호정 □ 신석정논문1) 신석정 초기 시편에서 본 참여의식과 저항의식 - ‘기존 목가적 서정시인’ 다시 평가 되어야 / 하 재 준 - 1. 머리말 신석정은 1924년 4월 19일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시를 ..

<신석정> 대춘부 / 산산산 / 산수도 / 그꿈을깨우면 / 이밤이너무나

대춘부(待春賦) - 신석정 / 삼남일보 1956.1.1. / , 정음사, 1956년 - 우수(雨水)도 경칩(驚蟄)도 머언 날씨에 그렇게 차가운 계절인데도 봄은 우리 고운 핏줄을 타고 오기에 호흡은 가빠도 이토록 뜨거운가? 손에 손을 쥐고 볼에 볼을 문지르고 의지한 채 체온을 길이 간직하고픈 것은 꽃피는 봄을 기다리는 탓이리라. 산은 산대로 첩첩 쌓이고 물은 물대로 모여가듯이 나무는 나무끼리 짐승은 짐승끼리 우리도 우리끼리 봄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산산산(山山山) - 신석정 / 1953.1 / , 정음사, 1956년 - 지구엔 돋아난 산이 아름다웁다. 산은 한사코 높아서 아름다웁다. 산에는 아무 죄없는 짐승과 에레나보다 어여쁜 꽃들이 모여서 살기에 더 아름다웁다. 언제나 나도 산이 되어보나 하고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