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150

논문 『燕行路에서 만나는 ‘南漢山城’』 관련 인물, 자료

논문 『燕行路에서 만나는 ‘南漢山城’』 관련 인물, 자료 □ 논문 『燕行路에서 만나는 ‘南漢山城’』과 관련 인물들 1. 원숭환(袁崇煥, 1584 ∼ 1630) 2. 김만기(金萬基, 1633 ∼ 1687) 3. 김진규(金鎭圭, 1658 ∼ 1716) 4. 김석주(金錫冑, 1634 ~ 1684) 5. 이관명(李觀命, 1661 ~ 1733) 6. 이정신(李正臣, 1660 ∼ 1727) 7. 김경문(金慶門, ? ∼ ?) 8. 김기성(金箕性, 1752 ∼ 1811) 9. 신집(申楫, 1580 ∼ 1639) 10. 김경선(金景善 1788 ∼ 1853) 11. 조두순(趙斗淳, 1796 ∼ 1870) 1. 원숭환(袁崇煥, 1584 ∼ 1630) 명나라 말기의 무장이다. 자는 원소(元素)이며, 현재 광동성(廣東省) 동관..

燕行路에서 만나는 ‘南漢山城’ / 김 일 환

燕行路에서 만나는 ‘南漢山城’* 김 일 환 * * 목 차 1. 머리말 2. 南漢山城과 汗峰 : ‘立馬’ 이미지의 생성 3. 寧遠城과 首山 : ‘남한산성’의 소환 4. 袁崇煥과 諸葛亮 : ‘남한산성’의 재전유 5. 결론 국문초록 이 논문은 조선 지식인들의 역사적 경험이 외국의 특정 장소에 투사되어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이후 그 곳을 지나는 조선인들이 그 공간을 자기화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1626년 寧遠城을 지키던 袁崇煥이 後金의 포위 공격을 격퇴하자, 직접 군대를 이끌었던 누르하치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 ‘嘔血臺 이야기’는 이런 현상을 설명할수 있는 좋은 예이다. 이 이야기는 明과 淸의 자료에는 찾아보기 어려운데, 반면 조선의 연행록에서는 지속적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소설에 핍진할 정도로 그 편..

1779년 정조의 영릉 거둥 / 한 상 권

《화성능행도(華城陵幸圖)》 8폭병풍 中 제7폭 始興還御行列圖 부분도, 견본채색, 151.5x66.4cm, 국립중앙박물관 1779년 정조의 영릉 거둥 - 한 상 권(덕성여자대학교)* - 1. 머리말 2. 영릉 거둥 실태 3. 영릉 거둥 목적 4. 맺음말 요 약 문 즉위 직후 발생한 역모사건을 진압한 정조는 정치적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방안의 하나로 여주에 있는 효종 능인 영릉寧陵에 거둥하였다. 정조가 영릉 거둥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는 세 가지였다. 하나는 조선사회가 추구해야 할 이념인 존주의리尊周義理를 구현하는 일이었다. 정조는 영릉 거둥을 통해 효종-숙종-영조로 이어지는 존주의리의 계승자임을 천명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하나는 국왕의 권위를 확립하는 일이었다. 정조는 남한산성에서의 군사훈련을 ..

1779년 정조의 능행과 남한산성 / 김 문 식

『화성성역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中 行宮全圖, 24.3 x 33.3cm,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1779년 정조의 능행과 남한산성 - 김문식(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 - 연구논문 / 실학사상 2011. 3. 25. 12:50 복사 https://blog.naver.com/sambolove/150105387897 1. 머리말 2. 능행의 경과 3. 능행 중의 조치 4. 능행의 의의 5. 맺음말 1. 머리말 1779년(정조 3) 8월, 정조는 도성을 벗어나 남한산성과 이천을 경유하여 여주에 있는 효종의 寧陵을 참배하고 돌아왔다. 총 7박 8일의 장거리 여행이었다. 정조가 영릉을 참배한 것은 효종이 서거한지 2周甲이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정조는 재위 24년 동안 총 66차례의 능행을 했으므로, 능행..

조선 후기 국왕의 남한산성 행차 / 김 문 식

조선 후기 국왕의 남한산성 행차 -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 1. 머리말 선조 36년(1603) 2월에 선조는 남한산성이 충청, 경상, 전라 지역을 왕래하는 요충지에 있으면서, 수도를 지키는 보장堡障이 되고 주변의 여러 진영을 조절할 수 있다고 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남한산성이 가진 군사적 거점으로서의 중요성을 표현한 말이다. 그런데 병자호란 때 인조가 이곳에서 항전하다가 항복을 하자, 남한산성은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 상징적 장소가 되었다. 조선후기에는 남한산성에 행차하여 병자호란 때 사망한 사람들의 충절을 기리고, 군사적 거점으로서의 기능을 강화하는 조치를 한 국왕들이 많이 나타났다. 남한산성에 행차한 국왕은 숙종을 비롯하여 영조, 정조, 철종, 고종등 5명이며..

조선후기 廣州의 군사지휘체계 변천 / 서 태 원

廣州府地圖 『지승地乘』 조선 19세기 전반 채색본 27.0*19.0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조선후기 廣州의 군사지휘체계 변천 조선후기 廣州의 군사지휘체계 변천 서 태 원* 2011. 3. 25. I. 머리말 II. 壬辰倭亂중 紀效新書法도입과 廣州의 군사지휘체계 변천 III. 胡亂및 廣州留守府制의 확립과 廣州의 군사지휘체계 변천 1. 胡亂과 廣州의 군사지휘체계 변천 2. 廣州留守府制의 확립과 廣州의 군사지휘체계 변천 IV. 맺음말 I. 머 리 말 조선후기 군사제도는 壬辰倭亂과 丙子胡亂등을 겪으면서 많은 변동과 모순을 보여주었다.1 壬辰倭亂에서는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해 紀效新書法을 도입하여 훈련도감과 속오군을 창설하면서 조총의 사용은 물론이고 ‘군대의 편제․지휘체계․陣法’ 등이 변화하였고, 仁..

능행과 보부상길이었던 남한산성 옛길

□ 능행과 보부상길이었던 남한산성 옛길 능행과 보부상길이었던 남한산성 옛길 1. 남한산성 옛길 / 경기문화재단 는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 옛길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스토리북입니다. 서울과 지방을 연결하는 중요한 도로 중 한 곳이었던 남한산성 옛길은 조선시대 왕의 행차길이자 떠돌이 보부상의 생계를 위한 길이었고, 지방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올라오던 길이었습니다. 는 남한산성 옛길에 새겨진 발자국을 따라 우리 선조들의 삶과 정신을 전해드릴 예정입니다. 1.1 왕들의 능행길, 민간의 상업루트 * 남한산성 옛길(봉화로)이 표기된 구한말 지도|자전곶교광주지략도|1885년 * 봉화로(奉化路) : 한양에서 봉화 태백산사고까지 이르는 조선 6대로의 하나로 산성구간은 (동대문-전곶교-송파진-학암..

18세기 廣州 지방의 지리환경 / 김 종 혁

廣州府地圖 『지승地乘』 조선 19세기 전반 채색본 27.0*19.0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18세기 廣州 지방의 지리환경 18세기 廣州 지방의 지리환경 2011. 3. 25. 김종혁(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차 례 1. 광주의 지리적 위치 2. 광주의 영역 3. 광주의 지세 4. 광주의 교통망 1. 광주의 지리적 위치 한반도의 중앙에는 경기도가, 또 그 안의 중앙에는 서울이 자리하고, 광주는 그 동남쪽에 위치한다. 조선시대에 한강을 경계로 수도 한성과 접경하던 광주는 북쪽의 일부 지역이 서울시 강남구ㆍ강동구ㆍ송파구로 편입되고 성남과 하남이 광주에서 분리, 독립하면서 서울과 떨어지게 되었다. 한강을 끼고 자리를 잡았던 광주는 고대에는 마한의 중심 세력이이었던 伯濟國의 터전이었고, 백제시대에..

연무관과 봉화로(奉化路) 이야기

* 봉화로(奉化路) : 한양에서 봉화 태백산사고까지 이르는 조선 6대로의 하나로 산성구간은 (동대문-전곶교-송파진-학암동-남한산성-검북참-경안리)로 이어지는데 남한산성 연무관 아래를 지나면서 장터가 들어섰다고 한다. □ 연무관과 봉화로(奉化路) 이야기 봉화로(奉化路) -사고(史庫)로 통하는 길 여암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은 1770년에 그의 저작 '도로고'(道路考)에서 처음으로 조선의 간선도로를 6대로(大路)로 파악하였고, 이후 고산자 김정호(金正浩, ?~1864)는 1860년대에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그것을 10대로(大路)로 확대해 규정한 바 있다. 약 100년 사이에 네 개의 대로가 추가된 셈이다. 이 중 첫 번째 대로(大路) 즉, 조선시대 7대로가 곧 '봉화로'(奉化路)이다. 봉화..

병자호란의 開戰원인과 朝·淸의 군사전략 비교연구 / 이 종 호

□ 병자호란의 開戰원인과 朝·淸의 군사전략 비교연구 병자호란의 開戰원인과 朝·淸의 군사전략 비교연구 이 종 호* 1. 서론 2. 전쟁배경과 朝·淸의 군사전략 3. 병자호란의 開戰과 전쟁과정 4. 朝·淸의 군사전략 비교분석 5. 전쟁의 함의와 결론 *건양대학교 군사학과 교수 1.서 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송파의 삼전도비1) 앞에 서면 오랫동안 진실이라고 믿었던 이 말도 또 다른 의미로 새겨진다. 1637년 2월 24일 병자호란의 승자인 청 태종 홍타이지(皇太極)는 높은 단상에서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었고 패자인 조선 국왕 인조는 단하에서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치욕을 감당해야 했다. 이후 조선은 오랑캐라고 멸시하던 청을 종주국으로 섬기면서 공물과 특산품을 상납하고 청나라가 구축한 동아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