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152

[겸재 그림 길 송파진③] 받침대가 두 개라서 더 슬픈 삼전도비 / 이한성

□ 받침대가 두 개라서 더 슬픈 삼전도비 [겸재 그림 길 송파진③] 받침대가 두 개라서 더 슬픈 삼전도비 cnbnews 제677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0.06.12 15:32:55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석촌호수 가(邊) 사람 발길 드문 모서리에 서 있는 삼전도비는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마지막 하나 짚고 가자. 사진 1에서 보듯 우뚝 세워진 삼전도비(대청황제공덕비) 옆에는 그보다 규모가 작은 귀부(龜趺)가 하나 자리하고 있다. 비신(碑身)은 없다. 또 무슨 수모를 당한 비가 있었던가? 걱정되는 마음이 불현듯 일어난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곁에 내용을 설명한 돌이 하나 놓여 있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 청태종의 전승 기념을 위해 비를 건립하던 중, 더 큰 규모로..

[겸재 그림 길 송파진②] 청황제 칭송글 쓴 이경석과 이를 비꼰 송시열 중 누가 더 애국? / 이한성

□ 청황제 칭송글 쓴 이경석과 이를 비꼰 송시열 중 누가 더 애국? [겸재 그림 길 송파진②] 청황제 칭송글 쓴 이경석과 이를 비꼰 송시열 중 누가 더 애국? cnbnews 제676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0.05.29 10:26:27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지난 호에 소개했듯이 겸재의 송파진(松坡津: 송파나루)도(圖)는 석촌호수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송파대로 북쪽 롯데 쪽에서 석촌호수 건너 송파대로 남쪽을 향해 그린 그림이다. 지금은 석촌호수 남북단을 송파대로가 지나지만 그때는 송파강을 잇는 나루였음은 이미 설명하였다. 이렇게 한강의 본류였던 송파강에는 두 개의 나루가 있었음을 상기하자. 하나는 삼전도(三田渡: 삼밭나루)이며 또 하나는 병자호란 이후에 번성한 송파나루다. 겸재가 주로 활..

[겸재 그림 길 송파진①] 잠실이 강북땅 → 섬 → 강남땅 된 사연 / 이한성

□ 잠실이 강북땅 → 섬 → 강남땅 된 사연 [겸재 그림 길 송파진①] 잠실이 강북땅 → 섬 → 강남땅 된 사연 cnbnews 제675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0.05.14 13:40:05 (문화경제=이한성 옛길 답사가) 겸재의 경교명승첩을 따라 한강을 오른 지도 여러 날 되었다. 오늘은 송파진(松坡津)이다. 겸재의 그림을 보면 송파진이 특별히 소나무 언덕(松坡)이 있는 나루(津)는 아니다. 이 지역은 전부터 광주목 중대면 송파리(中臺面 松坡里)였는데 남한산성으로 이어지는 언덕에 소나무가 많았던 모양이다. 필자의 기억으로도 88올림픽 무렵 중대면에 해당하는 가락동에 살았었는데 뒷동네 야산에 소나무가 심심치 않았던 기억이 난다. 겸재의 송파진 그림에는 송파나루 강가에 버들이 늘어져 있고 주변 민가들에..

서울 삼전도비(三田渡碑) / 나무위키

□ 서울 삼전도비(三田渡碑) / 나무위키 1. 개요 분류번호 : 대한민국 사적 제101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 47번지 크기 : 높이 395cm, 너비 140cm 면적 : 200㎡ 지정연도 : 1963년 1월 21일 제작시기 : 조선시대, 1639년 2월 11일(건립일) 현재 삼전도비의 모습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근처에 있는 비석. 사적 제101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식 이름은 만주어로 '대청국의 성스러운 한의 공덕비 (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 ᠊ᡳ᠋ ᡝᠨᡩᡠᡵᡳᠩᡤᡝ ᡥᠠᠨ ᠊ᡳ᠋ ᡤᡠᠩ ᡝᡵᡩᡝᠮᡠᡳ ᠪᡝᡳ)', 한문으로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청나라 황제가 청태종 홍타이지이므로 '청태종공덕비(淸太宗功德碑)'라고도 한다. 내용은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을..

병자호란과 천연두 / 구 범 진

□ 병자호란과 천연두 구범진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 / 민족문화연구 72호 목 차 1. 머리말 2. 천연두의 공포와 ‘生身’ 홍타이지 3. 병자호란 당시 청군 진영의 천연두 4. 병자호란의 종결 과정: 시간에 쫓긴 청군 5. 맺음말 국문초록 1637년의 병자호란은 천연두(만주어로 ‘마마’) 유행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계절에 일어났으며, 실제로 당시 청군 진영에서는 천연두가 발발하였다. 홍타이지는 ‘마마’에 면역이 없는 ‘生身’이었기 때문에 ‘마마’가 발발하면 안전한 장소로 몸을 피하는 ‘避痘’에 들어가야 했다. 그렇다면 천연두는 병자호란의 전개 과정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던 것일까? 병자호란 당시 홍타이지는 적어도 정축년 2월 말까지는 남한산성에 대한 포위가 계속되리라고 예상했으며, 강화도 공격은..

연려실기술 제26권 仁祖朝故事本末 三學士

남한산성 현절사 추향사 봉행 광경(2020/10/31, 음09/15) 肅宗大王御製 嗟哉三學士 오호라 삼학사 凜凜節如何 늠름한 절의는 어떠했는가 知是皇朝在 황조에서 보여준 의기를 아노니 力排醜虜和 和誘(화유) 앞에서도 꿋꿋한 捕虜 (포로)였도다 拜辭忠愈款 抗拜(항배)의 충은 이름을 넘었고 臨死志尤磨 죽음에 임해서도 뜻은 더 깊이 새겼도다 舊宇圖新煥 옛집의 그림은 새롭게 빛나니 追思感實多 뒤따르는 생각에 만감이 일도다 □ 연려실기술 제26권 仁祖朝故事本末 三學士 연려실기술 제26권 仁祖朝故事本末 三學士 홍익한(洪翼漢)이 평양의 임지에 있을 때 청국 사람들이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니, 증산 현령(甑山縣令) 변대중(邊大中)을 시켜 그를 잡아 오랑캐의 영문에 보내게 하였다. 대중이 익한을 묶어서 곤욕을 주면서 음식..

연려실기술 제26권 仁祖朝故事本末 瀋陽獄에 갇힌 사람들

남한산성 현절사[숙종14(1688) 유수 이세백 주도 삼학사 배향, 숙종19사액, 숙종37 김상헌, 정온 추배] □ 연려실기술 제26권 仁祖朝故事本末 瀋陽獄에 갇힌 사람들 연려실기술 제26권 仁祖朝故事本末 瀋陽獄에 갇힌 사람들 심양옥(瀋陽獄)에 갇힌 사람들 김상헌(金尙憲)ㆍ조한영(曺漢英)ㆍ신득연(申得淵)ㆍ채이항(蔡以恒)ㆍ 박황(朴潢)ㆍ이경여(李敬輿)ㆍ최명길(崔鳴吉) 일찍이 남한산성의 포위가 풀린 뒤에 김상헌은 곧바로 영남으로 내려가 안동(安東)의 옛 집에 살고 있었다. 그때 호종한 여러 신하들에게 상으로 벼슬을 가자하여 주면서 상헌에게도 품계를 높여주니, 상헌이 곧 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그 소의 대략에, “전하께서 산성에 머무르실 때 대신과 집정(執政)들이 모두 산성에서 나가기를 권하였는데, 신은 사수..

연려실기술 제25권 仁祖朝故事本末 丙子虜亂과 丁丑 南漢出城

□ 연려실기술 제25권 仁祖朝故事本末 丙子虜亂과 丁丑 南漢出城 연려실기술 제25권 仁祖朝故事本末 병자노란(丙子虜亂)과 정축 남한출성(南漢出城) 신미년(1631) 6월에 오랑캐의 기병 1만여 기가 의주로부터 얕은 여울을 건너 먼저 복병(伏兵)을 시켜놓고, 뒤에 중남(仲男) 아지호(阿之好)ㆍ만월개(滿月介) 등이 한(汗)의 서한을 가지고 나왔다고 한다. 용천(龍川)과 정주(定州) 등의 땅에는 달(㺚)의 보병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는데, 배와 물건을 가지고 신미도(身彌島)에 나와 용천 땅을 건너가서 침략하였다. ○ 금(金)의 차사(差使)가 성에 들어와 먼저 접대 당상(接待堂上)을 만나보았는데, 배를 공급해 주지 않는 것을 알고는 한의 서한을 전하지 않은 채 말을 타고 성문을 밀치고 나가버렸다. 이에 정..

연려실기술 제25권 仁祖朝故事本末 丁卯虜亂

□ 연려실기술 제25권 仁祖朝故事本末 丁卯虜亂 정묘년의 노란(虜亂) 일찍이 갑자년(1624) 가을에 도원수 장만(張晩)과 한명련(韓明璉)을 체직하고 이홍주(李弘冑)를 대신 임명하였다. ○ 기익헌(奇益獻)이 이괄(李适)과 한명련의 목을 베었다. 이때에 명련의 아들 윤(潤)은 탈출하여 귀성(龜城)에 숨었는데 한 해가 지나서야 부사 조시준(趙時俊)이 비로소 듣고 잡으려고 하니, 한윤이 기미를 알아채고 후금(後金)으로 망명해 들어가 강홍립(姜弘立) 등에게 말하기를, “본국에서 변란이 일어나 당신들의 처자식을 모두 죽였습니다. 나와 함께 만주(滿州) 군사를 빌려 복수하십시오.” 하니, 홍립과 난영(蘭英) 등이 그 말을 믿고, 드디어 오랑캐 군사가 병인년(1626) 봄에 동침(東侵)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일월록(..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과 이긍익(李肯翊) 이야기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과 이긍익(李肯翊) 이야기 - 낭만도사 2021. 12. 24. 10:17 조선시대 왕조와 집권세력 등의 야사나 숨은 이야기에 자주 언급되는 출전 서적 중에 하나가 약 30년간에 걸쳐 저술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조선의 유명한 대서예가였던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선생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둘째 아들 정종(定宗) 이방과(李芳果)의 후손이다. 가문이 소론에 해당되어 노론의 핍박을 많이 받았다. 필자도 지난번 코로나가 시작될 때쯤에 이광사의 완도군 신지도 유배지를 찾아봤었다. 정약용처럼 유배가 주는 후손의 혜택들이 있기도 하다. 당파 싸움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분들이 유배지에 있었기에 유배문학이 피어난 것은 아이러니한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