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150

병자호란의 결정적 敗因인 홍이포에 대하여...(22/11/15)

□ 병자호란의 결정적 敗因인 홍이포에 대하여... 흔히 병자호란의 패인을 주화파와 척화파의 끊임없는 갈등, 이괄의 난으로 조선 최정예군인 북방군의 散破, 근왕군의 체계적인 운용 미흡 및 연이은 패전, 남한산성의 고립된 농성에 따라 군수지원 미흡 및 식량고갈 등을 들 수 있지만 청군의 홍이포 공격으로 혼비백산한 점도 결정적 敗因으로 볼 수 있다. 병자호란이라 부르는 淸의 조선침략 목적은 조선 병합이 아니고 명 정벌을 위한 후방 안정과 재정과 식량 조달 기지 확보였을 것이라는 필자의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그러자면 단번에 조선의 항복을 받고 돌아가 명 정벌에 전념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사용된 것이 홍이포란 신무기였을 것으로 사료된다. 청은 전쟁을 빨리 끝내고자 심양으로부터 홍이포 34문을 끌고 와 세자..

《고대일록(孤臺日錄)》 해제(解題) / 정우락 경북대 교수

정경운 《고대일록(孤臺日錄)》 해제(解題) 樂民(장달수)추천 0조회 620.12.12 00:07댓글 0 북마크공유하기기능 더보기 고대일록(孤臺日錄) https://cafe.daum.net/jangdalsoo/k4T9/18 《고대일록(孤臺日錄)》 해제(解題) - 어느 시골선비의 전쟁체험과 위기의 일상에 대한 기록 - 정우락 경북대 교수 1. 서지 및 구성상의 특징 전쟁에 관한 기록은 다양한 장르를 통해 전해진다. 시가(詩歌)를 비롯하여 설화나 소설, 혹은 전(傳) 등의 문학작품은 물론이고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고대일록》과 같은 실기(實記)를 통해 전해지기도 한다. 특히 실기는 전쟁의 여러 국면을 가장 효과적으로 형상화한다. 여기에는 전쟁의 원인을 밝히는 것에서부터 전쟁으로 인한 참상과 그 극복의지 등이..

오희문 쇄미록 (吳希文 瑣尾錄)이란?

□ 오희문 쇄미록 (吳希文 瑣尾錄)이란? 임진왜란 때 오희문(1539∼1613)이 난을 겪으면서 쓴 일기로, 선조 24년(1591)∼선조 34년(1601) 2월까지 약 9년 3개월간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오희문은 학문에 뛰어났으나, 과거급제를 못해 정식으로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의 아들 오윤겸은 인조 때에 영의정을 지냈으며, 손자인 오달제는 병자호란 때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다 청나라까지 끌려가 죽음을 당한 삼학사(三學士)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 일기는 총 7책으로 되어있고, 각 책의 끝에는 국왕과 세자의 교서, 의병들이 쓴 여러 글, 유명한 장수들이 쓴 성명문, 각종 공문서, 과거시험을 알리는 글, 기타 잡문이 수록되어 있어서 당시의 사정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밖에 임진왜란..

오달제(吳達濟)집중 해부(자료 정리)

□ 오달제(吳達濟) 집중 해부 1) 1609(광해1) 한양 출, 1637(인조15) 심양 서문 29세 卒 2) 海州 吳氏, 용인 원삼면 학일리 오윤해(吳允諧) 3남중 막내 3) 伯父 추탄(楸灘) 오윤겸(吳允謙, 1559년 ~ 1636년)에게서 사사 4) 오윤겸은 성혼(成渾) 門人, 성리학 대가, 인조조 영의정까지 오름 5) 1625(인조3) 17세 신득연女 고령신씨 초혼, 1633 임신중 병사 6) 1627(인조5) 19세 사마시 합격 7) 1634(인조12) 백형 부임지 함경도 고원 방문 愛花 만남, 吳道南 출생 8) 1634(인조12) 26세 현감 남식女 의령남씨(19세) 재혼 9) 1635(인조13) 27세 별시문과 장원급제 成均館 典籍, 兵曹 佐郞, 侍講院 司書, 司諫院 正言, 司憲府 持平 10)..

三韓山斗, 심양의 삼학사 유적(자료정리)

□ 三韓山斗, 심양의 삼학사 유적 1) 심양의 삼학사비 설화 요약 - 홍타이지가 비록 적이지만 충절심은 본받을 만 하니 - 심양성 서문 밖에 사당을 짓고 "三韓山斗"라는 碑를 세워주라 함. '삼한'은 조선을, '산두'는 태산북두를 뜻하는 것으로 조선에서 절개가 뛰어난 인물, 즉 삼학사를 칭송한 말임. 2) 삼학사비의 1차 멸실 - 그 碑가 淸朝 末까지 전해지다가 - 국민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청조문화 말살정책에 따라 훼손 유실. 3) 삼학사비 碑頭 발견 - 만주국 세워지고 조선인의 移住 많아져 일제가 영사 개설 - 봉천총영사관 부영사 吳斗煥(오달제 후손)이 심양 근무 하면서 - 중국인에게 비석 이야기 듣고 백방 수소문, 碑身이 없는 비두 발견. 4) 중수 삼학사비 건립 - 1935 조선인 성금으로 중수삼학..

강도(江都) 함락 (3) 삼전도비의 굴곡진 역사 / 황효진

□ 다시 보는 삼전도비, 그 치욕과 정쟁의 진실을 찾다 인천in 황효진 승인 2021.06.01 07:30 [황효진의 역사기행 - 길을 걷고 뜻을 묻는다] (3) 삼전도비의 굴곡진 역사 - 황효진 / 공인회계사, 전 인천도시공사 사장 인조대왕실록 태백산 사고본 34책 23장 - 가장 치욕스러웠던 조선의 그날 위에 있는 네 장의 한문 원본은 인조 15년 정축년 1월 30일(1637년 2월24일)에 일어난 일을 기록한 인조대왕실록 태백산 사고본 34책 23장의 사진이다. 조선이 오랑캐를 주군으로 모시기 시작한 역사적인 날의 스케치다. 병자년 12월 14일부터 시작된 47일간의 농성(籠城) 긴장이 풀려서일까? 사관(史官)은 조선국왕의 남한산성 출성(出城)부터 삼전도 항복의식에서 창경궁 환궁(還宮)까지 그날의 ..

강도(江都) 함락 (2) 부치지 못한 두 편지, 세상을 둘로 가르다 / 황효진

□ 부치지 못한 두 편지, 세상을 둘로 가르다 인천in 황효진 승인 2021.03.22 10:51 [황효진의 역사기행 - 길을 걷고 뜻을 묻는다] (2) 노론과 소론의 회니시비(懷尼是非)를 돌아보며 - 황효진 / 공인회계사, 전 인천도시공사 사장 윤증의 신유의서 초고본 강화도 함락 당시 강화부성 민가 마당이다. 사대부 여인이 노비를 보내 남편을 모셔오게 했다. 남편이 도착하자 부인이 말했다. “적의 칼날에 죽기보다는 먼저 자결하는 게 좋겠습니다. 죽기 전에 한번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남편은 말이 없었다. 남편은 부인이 자결하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다. 남편이 문을 나서자 부인은 노비들을 불러서 어린 자식들을 부탁했다. “어린아이들이 죽고 사는 것은 운명에 달려 있을 게다. 그들을 잘 보살펴다오.”..

강도(江都) 함락 (1) 강도 함락의 진실 / 황효진

□ 강도(江都) 함락의 진실을 찾아서 인천in 황효진 승인 2021.02.01 11:36 (1) 강도 함락과 출성 항복 - 황효진 / 공인회계사, 전 인천도시공사 사장 인천in이 이달부터 황효진 전 인천도시공사 사장의 ‘역사기행 – 길을 걷고 뜻을 묻는다’를 연재합니다. 5천년 우리 역사의 무대가 된 지역을 찾아 깊이 서려있는 곡절의 시간들을 돌이켜봅니다. 그때 그 역사의 진실이 무엇이며, 현재의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주고있는지 차분히 들여다 보고자 합니다. 강화 고지도(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강도는 천험인가 虜種雖云頑 (오랑캐들이 아무리 완악하다지만) 安能飛渡水 (어떻게 이 물을 날아 건널 수 있으랴) 彼亦知未能 (저들도 건널 수 없음을 알기에) 內以耀兵耳 (와서 진치고 시위만 한다오) 誰..

[겸재 그림 길 송파진③] 받침대가 두 개라서 더 슬픈 삼전도비 / 이한성

□ 받침대가 두 개라서 더 슬픈 삼전도비 [겸재 그림 길 송파진③] 받침대가 두 개라서 더 슬픈 삼전도비 cnbnews 제677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0.06.12 15:32:55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석촌호수 가(邊) 사람 발길 드문 모서리에 서 있는 삼전도비는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마지막 하나 짚고 가자. 사진 1에서 보듯 우뚝 세워진 삼전도비(대청황제공덕비) 옆에는 그보다 규모가 작은 귀부(龜趺)가 하나 자리하고 있다. 비신(碑身)은 없다. 또 무슨 수모를 당한 비가 있었던가? 걱정되는 마음이 불현듯 일어난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곁에 내용을 설명한 돌이 하나 놓여 있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 청태종의 전승 기념을 위해 비를 건립하던 중, 더 큰 규모로..

[겸재 그림 길 송파진②] 청황제 칭송글 쓴 이경석과 이를 비꼰 송시열 중 누가 더 애국? / 이한성

□ 청황제 칭송글 쓴 이경석과 이를 비꼰 송시열 중 누가 더 애국? [겸재 그림 길 송파진②] 청황제 칭송글 쓴 이경석과 이를 비꼰 송시열 중 누가 더 애국? cnbnews 제676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0.05.29 10:26:27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지난 호에 소개했듯이 겸재의 송파진(松坡津: 송파나루)도(圖)는 석촌호수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송파대로 북쪽 롯데 쪽에서 석촌호수 건너 송파대로 남쪽을 향해 그린 그림이다. 지금은 석촌호수 남북단을 송파대로가 지나지만 그때는 송파강을 잇는 나루였음은 이미 설명하였다. 이렇게 한강의 본류였던 송파강에는 두 개의 나루가 있었음을 상기하자. 하나는 삼전도(三田渡: 삼밭나루)이며 또 하나는 병자호란 이후에 번성한 송파나루다. 겸재가 주로 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