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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보> 유점사/칠보암/비로봉/마의태자릉/구룡연/비봉폭/옥류동

1912년 무렵 금강산 유점사(楡岾寺) 전경 – 현재는 6.25 전쟁 중에 소실돼 터만 남은 사찰 단원 김홍도 作 《금강사군첩(金剛四群帖)》중 [효운동] 효운동(曉雲洞)유점사(楡岾寺) - 정인보 / - 1 삼십리 안무잿*령 돌도퍽은 밟았더니 송풍(松風)이 비일러냐 어드메로 쓸어낸고 내아니 김만경(金萬頃)*들서 금강(金剛)꿈을 꿨던가 * 안무재 : 내수참(內水站) * 김만경(金萬頃) : 金堤 萬頃의 略呼. 호남평야 2 산영루(山映樓) 좋거니와 맑은 못이 더욱 좋다 미풍(微風)에 이는 물결 다락 아니 밀리우나 반지어 물빛을 보니 산중(山中)인줄 알리오 * 반지어 : 기대어 단원 김홍도 作 《금강사군첩(金剛四群帖)》중 [원통암] 칠보암(七寶菴) - 정인보 / - 1 금강산(金剛山) 다듬을 제 본* 하나를 먼저..

<정인보> 만폭동 / 매월당석각 / 마하연 / 표훈사 / 정양사 / 소광암

* 1930년대 후반 일본 히노데 상행 발행,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pdf 다운) 만폭동(萬瀑洞) - 정인보 / - 1 맑고도 넓은 개울 몇 폭포를 얼러 온고 들어선 아람드리 기우신 양 더예롭다 골바람 지났것마는 숲은 아직 울려라 2 숲 새로 솟는 취와(翠瓦) 장안사(長安寺)가 저기로다 절동구(洞口) 접어들어 장터같다 허물마오 계산(溪山)엔 물 아니드니 잠깐 속(俗)돼 어떠리 3 해 뉘웃* 점그는데 우수하니 비뿌린다 이십리(二十里) 마하연(摩訶衍)을 어이 갈고 노배기*로 명산(名山)의 김서림이니* 옷 젖은들 어떠리 * 뉘웃 : 해가 기울어 가는 모양 * 노배기 : 雨裝없이 그대로 맞고 가는 것 * 김서림이니 : 증발되는 기체 4 둘 붙인 남우다리 물소리에 날리올 듯 명연담(鳴淵潭) 뿜는 눈(雪)발 오든..

<정인보> 유모강씨의상행을보내며 / 자모사(慈母詞)40수

유모 강씨의 상행(喪行)을 보내면서 내 젖엄마는 그 시집이 교하(交河)다. 우리 집에 들어와서 얼마 있다가 다시 교하로 가더니 내가 보고 싶어서 도로 뛰어나와 첫새벽에 경기감영(京畿監營) 앞을 지나 성문 열자 곧 회 동(會洞)으로 왔다. 내가 열한 살에 양근(楊根)으로 내려가 다시 진천(鎭川)으로 가니 엄마 는 서울 처져있었다. 우리 집이 서강(西江)으로 온 뒤는 흔히 와 있더니 도로 진천으로 가 니 진천은 멀어서 못 오고 목천(木川)으로 나오니 길이 좀 가까와 한동안이나 와 있었다. 얼마 아니하여 우리가 또 서울로 오니 엄마 점점 늙었으나 내 아들딸을 보면 업어주고 안아 주고 고달픈 줄을 몰랐다. 돈화문(敦化門)앞 서쪽 골목에서 조그만 가게를 하면서 틈나는 대로 나를 보러 다녔다. 내가 새문 밖 「초리..

<정인보> 근화사삼첩/매화사삼첩/매화칠장/국화사삼첩/이화사삼첩

근화사(槿花詞) 삼첩(三疊) - 정인보 / 1927년 作 / 1948 -- 1 신시(神市)로 내린 우로(雨露) 꽃 점진들 없을쏘냐? 왕검성(王儉城) 첫 봄 빛에 피라시니 무궁화(無窮花)를 지금도 너 곧 대(對)하면 그제런듯 하여라 2 저 메는 높고 높고 저 가람은 예고 예고, 피고 또 피오시니 번으로써 세오리까? 천만년(千萬年) 무궁(無窮)한 빛을 길이 뵐까 하노라. 3 담수욱 유한(幽閑)ㅎ고나, 모여 핀 양 의초롭다. 태평연월(太平烟月)이 둥두렷이 돋아올 제, 옛 향기(香氣) 일시(一時)에 도니 강산 화려(江山華麗)하여라 매화사(梅花詞) 삼첩(三疊) - 정인보 / - 1 쇠인 양 억센 등걸 암향부동(暗香浮動) 어인 꽃고 눈바람 분분(紛紛)한데 봄소식을 외오 가져 어즈버 지사고심(志士苦心)을 비겨 볼까 ..

<정인보> 조춘/첫정/여수에서/백마강뱃속에서/난화사삼첩

조춘(早春) - 정인보 / - 1 그럴싸 그러한지 솔빛 벌써 더 푸르다. 산골에 남은 눈이 다산 듯이 보이고녀. 토담집 고치는 소리 별밭 아래 들려라. 2 나는 듯 숨은 소리 못 듣는다 없을손가. 돋으려 터지려고 곳곳마다 움직이리. 나비야 하마 알련만 날기 어이 더딘고. 3 이른 봄 고운 자취 어디 아니 미치리까? 내 생각 엉기올 젠 가던 구름 머무나니, 듬 붓대 무능타 말고 헤쳐 본들 어더리. 첫 정 - 정인보 / - 1 그 기별 듣던 밤에 온 하늘이 별이더니 꿈이면 어서 깨자 꿈아니면 어찌할고 배 떠나 바다 넓으니 곧 미칠듯 하여라 2 그러니 그럴라구 집에 가면 만나려니 건너 방 덧문 닫고 마당조차 다른 듯다 어머니 반 울음으로 너왔느냐 하서라 3 내 건너 골을 닫넘어 드뭇 성긴 솔아래로 가르쳐 저기..

<김상옥> 봉선화 / 어느날 / 소망 / 흔적

봉선화 - 김상옥 / , 1939 - 비 오자 장독대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 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 들이던 그날 생각 하시리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하얀 손 가락 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 속에 본 듯 힘줄만이 서노나 어느날 - 김상옥 - 구두를 새로 지어 딸에게 신겨주고 저만치 가는 양을 물그러미 바라본다 한 생애 사무치던 일도 저리 쉽게 가것네 소망 - 김상옥 - 늙은 두보처럼 꽃 위에 눈물도 뿌리고, 멋있는 젊음과 사귀다가 일부러 가는 귀도 먹고, 떠날 땐 푸른 반딧불 먼 별처럼 사라졌으면… 흔적 - 김상옥 - 저 덩굴 얼룩진 그늘 넌 거기서 ..

<김상옥> 백자부 / 옥저 / 사향 / 촉촉한눈길

백자부(白磁賦) - 김상옥 / (1947) - 찬서리 눈보라에 절개 외려 푸르르고 바람이 절로 이는 소나무 굽은 가지 이제 막 백학(白鶴) 한 쌍이 앉아 깃을 접는다. 드높은 부연(附椽) 끝에 풍경 소리 들리던 날 몹사리 기다리던 그린 임이 오셨을 제 꽃 아래 빚은 그 술을 여기 담아 오도다. 갸우숙 바위 틈에 불로초 돋아나고 채운(彩雲) 비껴 날고 시냇물도 흐르는데 아직도 사슴 한 마리 숲을 뛰어 드노다. 불 속에 구워 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결 티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지다. 흙 속에 잃은 그 날은 이리 순박(淳朴)하도다. 운보 김기창 作 피리부는 소년 옥저(玉笛) - 김상옥 / (1947) - 지긋이 눈을 감고 입술을 축이시며 뚫린 구멍마다 임의 손이 움직일 때 그 소리 은하 흐르듯 서라벌에 퍼..

<이병기> 파랑새 / 박연폭포 / 처 / 아차산 / 농촌화첩 / 낙화

파랑새 - 이병기 / (1936) - - 파랑새 날아오면 그이도 온다더니 파랑새 날아가도 그이는 아니 온다 오늘도 아니 오시니 내일이나 올는가 기다려지는 마음 하루가 백년 같다 새로 이가 나고 흰 머리 다시 검어라 그이가 오신 뒤에야 나는 죽어 가리라 1750년경 겸재 정선作 박연폭포(개인소장) 박연폭포 - 이병기 / (1936) - 이제 산에 드니 산에 정이 드는구나 오르고 내리는 길 괴로움을 다 모르고 저절로 산인이 되어 비도 맞아 가노라 이 골 저 골 물을 건너고 또 건너니 발 밑에 우는 폭포 백이요 천이러니 박연을 이르고 보니 하나밖에 없어라 봉머리 이는 구름 바람에 다 날리고 바위에 새긴 글발 매이고 이지러지고 다만 그 흐르는 물이 긋지 아니하도다 처 - 이병기 / (1936) - 귀히 자란 몸..

<이병기> 별 / 비 / 냉이꽃 / 풀벌레 / 볕 / 난초

별 - 이병기 / (1936) -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달이 별 함께 나아오더라 달은 넘어 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 어느게요 잠자코 홀로 서서 별을 헤어 보노라 비2 - 이병기 / (1936) - 짐을 매어놓고 떠나시려 하는 이 날 어두운 새벽부터 시름없이 내리는 비 내일도 내리오소서 연일 두고 오소서 부디 머나먼 길 떠나지 마오시라 날이 저물도록 시름없이 내리는 비 저으기 말리는 정은 나보다도 더하오 잡았던 그 소매를 뿌리치고 떠나신다 갑자기 꿈을 깨니 반가운 빗소리라 매어 둔 짐을 보고는 눈을 도로 감으오 냉이꽃 - 이병기 / (1936) - 밤이면 그 밤마다 잠은 자야 하겠고 낮이면 세때 밥을 먹어야 하겠고..

<이호우> 살구꽃핀마을 / 개화 / 석류 / 달밤 / 바람벌 / 회상

살구꽃 핀 마을 - 이호우 / (1955) -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 뉘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바람없는 밤을 꽃 그늘에 달이 오면 술 익는 초당(草堂)마다 정이 더욱 익으리니 나그네 저무는 날에도 마음 아니 바빠라. 개화(開花) - 이호우 / (1955) - 꽃이 피네, 한 잎 두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 석류(石榴)1 - 이호우 / (1955) - 토장맛 덤덤히 밴 석새 베 툭진 태생 두견은 섧다지만 울 수라도 있쟎던가 말 없이 가슴앓이에 보라! 맺힌 핏방울 * 석새 베 : 석새삼베의 약어로 240올의 날실로 짠 베라는 뜻. 성글고 굵은 ..

<이영도> 신록 / 노을 / 진달래 / 단풍 / 석류 / 단란 / 모란 / 황혼에서서

신록 - 이영도 / (1954) - 트인 하늘 아래 무성히 젊은 꿈들 휘느린 가지마다 가지마다 숨 가쁘다. 오월(五月)은 절로 겨워라. 우쭐대는 이 강산(江山). 노을 - 이영도 / (1954) - 먼 첨탑(尖塔)이 타네 내 가슴 절벽에도 돌아앉은 인정 위에 뜨겁던 임의 그 피 회한은 어진 깨달음인가 ‘골고다’로 젖는 노을. 진달래 - 이영도 / (1954) -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爛漫)히 멧등마다, 그 날 스러져 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恨)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 위엔 하늘이 무거운데, 연연(戀戀)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山河). 단풍 - 이영도 / (1954) - 너도 타라 여기 황홀한 불길 속에 사랑도 미움도 넘어선 ..

<김민정> 마치...처럼 / 반투명

마치...처럼 - 김민정 / 샘터 / 2007년 10월 - 내가 주저앉은 그 자리에 새끼고양이가 잠들어 있다는 거 물든다는 거 얼룩이라는 거 빨래엔 피존도 소용이 없다는 거 흐릿해도 살짝, 피라는 거 곧 죽어도 빨간 수성사인펜 뚜껑이 열려 있었다는 거 반투명 - 김민정 / 《창작과비평》 2021년 봄호 - 스스로가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눈으로 그가 벽시계를 보고 있다. 오래 보느라 노려보는 거 그렇다, 한쪽은 어느 하나의 기면이라 신은 아침을 믿고 아침은 그를 믿어 그는 아직 신을 믿는다. 다만 아침은 아름다우니 그는 혼잣말을 내뱉는데 침대 아래로 손에 쥔 둥근 붕대가 미끄러진다. 스스로가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팔로 휘적거리면서 그가 잡으려는데 집까지 굴러가는 테니스공이라 하고 십자로 칼집을 내었다 ..

<송찬호> 나비 / 찔레꽃

나비 - 송찬호 / , 문학과지성사, 2009(초판 1쇄), (2010년 초판 6쇄) - 나비는 순식간에 째크나이프처럼 날개를 접었다 펼쳤다 ​ 도대체 그에게는 삶에서의 도망은 없다 다만 꽃에서 꽃으로 유유히 흘러 다닐 뿐인데, ​ 수많은 눈이 지켜보는 환한 대낮에 나비는 꽃에서 지갑을 훔쳐냈었다 찔레꽃 - 송찬호 / 창비 / 2008년 06월 - 그해 봄 결혼식날 아침 네가 집을 떠나면서 나보고 찔레나무숲에 가보라 하였다 나는 거울 앞에 앉아 한쪽 눈썹을 밀면서 그 눈썹 자리에 초승달이 돋을 때쯤이면 너를 잊을 수 있겠다 장담하였던 것인데, 읍내 예식장이 떠들썩했겠다 신부도 기쁜 눈물 흘렸겠다 나는 기어이 찔레나무숲으로 달려 가 덤불 아래 엎어놓은 하얀 사기 사발 속의 너의 편지를 읽긴 읽었던 것인데 ..

<황지우> 새들도세상을 / 무등 / 너를기다리는동안 / 게눈속의연꽃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황지우 / (1981) - 映畫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륙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 앉는다. 무등(無等) - 황지우 / (1987) - 山 절망의산, 대가리를밀어버 린, 민둥산, 벌거숭이산 분노의산, 사랑의산, 침묵의 산, 함성의산, 증인의산, 죽음의산 부활의산, 영생..

<박성우> 고추씨같은귀울음소리들리다 / 가뜬한잠 / 물의베개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들리다 - 박성우 / 창비 / 2007년 03월 - 뒤척이는 밤, 돌아눕다가 우는 소릴 들었다 처음엔 그냥 귓밥 구르는 소리인 줄 알았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누군가 내 몸 안에서 울고 있었다 부질없는 일이야, 잘래잘래 고개 저을 때마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마르면서 젖어가는 울음소리가 명명하게 들려왔다 고추는 매운 물을 죄 빼내어도 맵듯 마른 눈물로 얼룩진 그녀도 나도 맵게 우는 밤이었다 가뜬한 잠 - 박성우 / 창비 / 2007년 03월 - 곡식 까부는 소리가 들렸다 둥그렇게 굽은 몸으로 멍석에 차를 잘도 비비던 할머니가 정지문을 열어놓고 누런 콩을 까부르고 있었다 키 끝 추슬러 잡티를 날려보내놓고는, 가뜬한 잠을 마루에 뉘였다 하도 무섭게 조용한 잠이어서 생일 밥숟갈 ..

<이문재> 농담 / 거미줄 / 너는내운명

농담 - 이문재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거미줄 - 이문재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 거미로 하여금 저 거미줄을 만들게 하는 힘은 그리움이다 ​ 거미로 하여금 거미줄을 몸 밖 바람의 갈피 속으로 내밀게 하는 힘은 이미 기다림을 넘어선 미움이다 하지만 그 증오는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이어서 고요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 팽팽하지 않은 기다림은 벌써 그 기다림에 진 것, 져버리고 만..

<권혁웅> 파문 / 내가던진물수제비가그대에게건너갈때 / 청춘1

파문 - 권혁웅 / 문학세계사 / 2001년 11월 - 오래 전 사람의 소식이 궁금하다면 어느 집 좁은 처마 아래서 비를 그어보라, 파문 부재와 부재 사이에서 당신 발목 아래 피어나는 작은 동그라미를 바라보라 당신이 걸어온 동그란 행복 안에서 당신은 늘 오른쪽 아니면 왼쪽이 젖었을 것인데 그 사람은 당신과 늘 반대편 세상이 젖었을 것인데 이제 빗살이 당신과 그 사람 사이에 어떤 간격을 만들어 놓았는지 궁금하다면 어느 집 처마 아래 서보라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에 촘촘히 꽂히는 저 부재에 주파수를 맞춰보라 그러면 당신은 오래된 라디오처럼 잡음이 많은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파문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 권혁웅 / 문학세계사 / 2001년 11월 - 그날 내가 던진 ..

<성미정> 사랑은야채같은것/처음엔당신의착한구두를/시인의폐허/심는다

사랑은 야채 같은 것 - 성미정 / 민음사 / 2003년 07월 -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씨앗을 품고 공들여 보살피면 언젠가 싹이 돋는 사랑은 야채 같은 것 그래서 그녀는 그도 야채를 먹기를 원했다 식탁 가득 야채를 차렸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오이만 먹었다 그래 사랑은 야채 중에서도 오이 같은 것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야채뿐인 식탁에 불만을 가졌다 그녀는 할 수 없이 고기를 올렸다 그래 사랑은 오이 같기도 하고 고기 같기도 한 것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의 식탁엔 점점 더 많은 종류의 음식이 올라왔고 그는 그 모든 것을 맛있게 먹었다 결국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사랑은 그가 먹는 모든 것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 성미정 -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그러..

<김용택> 달이떴다고전화를주시다니요 / 들국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 김용택 / 시와시학사 / 2007년 01월 -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이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들국 - 김용택 - 산마다 단풍만 저리 고우면 뭐헌다요 뭐헌다요 산 아래 물빛만 저리 고우면 뭐헌다요 산 너머, 저 산 너머로 산그늘도 다 도망가불고 산 아래 집 뒤안 하얀 억새꽃 하얀 손짓도 당신 안 오는데 무슨 헛짓이다요 저런 것들이 다 뭔 소용이다요 뭔 소용이다요, 어둔 산머리 초생달만 그대 얼굴같이..

<이재무> 제부도 / 팽나무쓰러지셨다 / 겨울숲에서

제부도 - 이재무 / bookin(북인) / 2008년 08월 - 사랑하는 사람과의 거리 말인가? 대부도와 제부도 사이 그 거리만큼이면 되지 않겠나 손 뻗으면 닿을듯, 그러나 닿지 않고 눈에 삼삼한 사랑하는 사람과의 깊이 말인가? 제부도와 대부도 사이 가득 채운 바다의 깊이 만큼이면 되지 않겠나? 그리움 만조로 가득 출렁거리는 간조 뒤에 오는 상봉의 길 개화처럼 열리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 말인가? 이별 말인가? 하루에 두 번이나 되지 않겠나 아주 섭섭지는 않게 아주 물리지는 않게 자주 서럽고 자주 기쁜 것 그것은 사랑하는 이의 자랑스러운 변덕이라네 하루에 두 번 바다가 가슴을 열고 닫는 곳 제부도에는 사랑의 오작교가 있다네 팽나무 쓰러, 지셨다 - 이재무 - 우리 마을의 제일 오래된 어른 쓰러지셨다..

키 3m에 300㎏… 中 거대 유인원은 왜 멸종했나

키 3m에 300㎏… 中 거대 유인원은 왜 멸종했나 “환경 변화 적응 못 해 먹이 다양성 감소” 조선일보 문지연 기자 입력 2024.01.11. 10:18업데이트 2024.01.11. 13:13 과거 중국 지역에 살았던 초거대 영장류 기간토피테쿠스 블라키(Gigantopithecus blacki)가 쉬고 있는 모습의 상상도. /호주 서던크로스대 지금으로부터 200여만 년 전, 현생 인류의 조상이 지구상에 출현한 시점보다 훨씬 과거인 그때 중국 남부에는 거대한 몸집의 유인원이 살았다. 키는 3m에 육박했으며 몸무게는 최대 300㎏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우리는 그들을 ‘기간토피테쿠스 블라키’(Gigantopithecus blacki)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기간토피테쿠스 블라키의 멸종 시기는 정..

20[sr]인류진화 2024.01.11

<문정희> 남편 / 응 / 순간

남편 - 문정희 / 민음사 / 2004년 05월 -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는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응 - 문정희 / 민음사 / 2004년 05월 - 햇빛 가득한 대낮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난 나의 문자(文字) “응” 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 있고 동그란 달로 나..

<문태준> 백년 / 어느날내가이곳에서가을강처럼 / 빈집의약속

백년(百年) - 문태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07월 -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빈 의자처럼 쓸쓸히 술을 마셨네 내가 그대에게 하는 말은 다 건네지 못한 후략의 말 그제는 하얀 앵두꽃이 와 내 곁에서 지고 오늘은 왕버들이 한 이랑 한 이랑의 새잎을 들고 푸르게 공중을 흔들어 보였네 단골 술집에 와 오늘 우연히 시렁에 쌓인 베개들을 올려보았네 연지처럼 붉은 실로 꼼꼼하게 바느질해놓은 百年이라는 글씨 저 百年을 함께 베고 살다 간 사랑은 누구였을까 병이 오고, 끙끙 앓고, 붉은 알몸으로도 뜨겁게 껴안자던 百年 등을 대고 나란히 눕던, 당신의 등을 쓰다듬던 그 百年이라는 말 강물처럼 누워 서로서로 흘러가자던 百年이라는 말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하루를 울었네 어느 날..

<최소월 / 라혜석> 보월 / 밸지엄의용사 / 긴숙시 / 출산의고통

步月 - 崔素月 - 나를 생각하는 나의 님 這(저)구름 나를 생각 차츰차츰 건일며(거닐며) 這(저)달에 나를 빗최려(비추려) 徽笑(휘소:아름다운 미소)로 울어러봄에(우러러보며) 검음으로 애를 태우고 누름으로 나를 울니라.(울리니라) 빽빽한 運命(운명)의 줄에 에워싸인 나를 우는 나의 님 따듯한(따뜻한) 품속에 나를 갖추려(감추려) 그 깁흔(깊은) 솔밧(솔밭)으로 오르리라 총에 맞은 병사 / 로버트 카파 벨지엄의 勇士 - 崔素月 / 제2호, 1914. 11. 3 - 山嶽이라도 뻐개지는 大砲의 彈알에 너의 阿只(아지, 아기)는 벌써 碎骨이 되었고 野獸보다도 暴惡(포악)한 게르만의 戰士에게 너의 愛妻는 恥辱으로 죽었다 인제는 사랑하던 家族도 없어졌고 너조차 逃亡할 길을 잃어 버렸다 배 불러도 더 찾는 慾心꾸러..

<이병률> 사랑의역사 / 바람의사생활 / 봉인된지도

사랑의 역사 - 이병률 / 창비 / 2006년 11월 - 왼편으로 구부러진 길, 그 막다른 벽에 긁힌 자국 여럿입니다 깊다 못해 수차례 스치고 부딪힌 한 두 자리는 아예 음합니다 맥없이 부딪혔다 속상한 마음이나 챙겨 돌아가는 괜한 일들의 징표입니다 나는 그 벽 뒤에 살았습니다 잠시라 믿고도 살고 오래라 믿고도 살았습니다 굳을만하면 받치고 굳을만하면 받치는 등 뒤의 일이 내 소관이 아니란 걸 비로소 알게 됐을 때 마음의 뼈는 금이 가고 천정마저 헐었는데 문득 처음처럼 심장은 뛰고 내 목덜미에선 난데 없이 여름 냄새가 풍겼습니다 바람의 사생활 - 이병률 / 창비 / 2006년 11월 - 가을은 차고 물도 차다 둥글고 가혹한 방 여기저기를 떠돌던 내 그림자가 어기적어기적 나뭇잎을 뜯어먹고 한숨을 내쉬었던 순간..

은행식물원 ⑥겨울 수목원 풍경(24/01/04, Any Dream Will Do)

요즈음 – 은행식물원 ⑥겨울 수목원 풍경 – 아팠던 지난 흔적 말라버린 언덕위의 溫室에 피어나는 溫情은 따스한데 여전히 삐딱扇 타고 불어대는 칼바람 배달9221/개천5922/단기4357/서기2024/01/04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은행식물원 ⑥겨울 수목원 풍경 (1) 아픔을 주었고 나의 걸음을 붙잡았던 2023은 가고 힘을 얻어보려 2024의 얕은 언덕에 올라 싱그럽게 살아가는 작은 온실에서 기쁨의 한자락 얻다. 그리고 금새 편석촌과 이상과 백석의 숨결에 파묻혀 보다. (2) 혼돈의 시계 속 한반도. 그리고 전쟁의 회오리로 휩쓸린 세계지도. 巨惡이 활개치는 세상은 언제 종언을 고할 것인가? 괴수의 뒤를 따르는 이해할 수 없는 무리들 어딜 향해 주르르 몰려가나? 배달9221/개천5922/단기435..

<남진우> 어느사랑의기록 / 처형 / 별똥별

어느 사랑의 기록 - 남진우 / 시집『죽은 자를 위한 기도』(문학과지성사, 1996) - 사랑하고 싶을 때 내 몸엔 가시가 돋아난다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은빛 가시가 돋아나 나를 찌르고 내가 껴안는 사람을 찌른다 가시 돋힌 혀로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핥고 가시 돋힌 손으로 부드럽게 가슴을 쓰다듬는 것은 그녀의 온몸에 피의 문신을 새기는 일 가시에 둘러싸인 나는 움직일 수도 말할 수도 없이 다만 죽이며 죽어간다 이 참혹한 사랑 속에서 사랑의 외침 속에서 내 몸의 가시는 단련되고 가시 끝에 맺힌 핏방울은 더욱 선연해진다 무성하게 자라나는 저 반란의 가시들 목마른 입을 기울여 샘을 찾을 때 가시는 더욱 예리해진다 가시가 사랑하는 이의 살갗을 찢고 끝내 그녀의 심장을 꿰뚫을 때 거세게 폭발하는 태양의 흑점들 사..

<김종해> 바람부는날 / 항해일지 / 그대앞에봄이있다

바람부는 날 - 김종해 / 글빛 / 2004년 05월 - 사랑하지 않는 일보다 사랑하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나는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날마다 가고 또 갑니다. 어둠뿐인 외줄기 지하통로로 손전등을 비추며 나는 당신에게로 갑니다. 밀감보다 더 작은 불빛 하나 갖고서 당신을 향해 갑니다. 가서는 오지 않아도 좋을 일방통 행의 외길, 당신을 향해서만 가고 있는 지하철을 타고 아무도 내리지 않는 숨은 역으로 작 은 불빛 비추며 나는 갑니다. 가랑잎이라도 떨어져서 마음마저 더운 여린 날,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욱 괴로운 날, 그래서 바람 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당신에게로 갑니다. 항해 일지 1 - 무인도를 위하여 - 김종해 / (1984) - 을지로에서 노를 젓다가 잠시 멈추다. ..

<이홍섭> 서귀포 / 터미널1

서귀포(西歸浦) - 이홍섭 / , 세계사 / 2005년 08월 - 울지 마세요 돌아갈 곳이 있겠지요 당신이라고 돌아갈 곳이 없겠어요 구멍 숭숭 뚫린 담벼락을 더듬으며 몰래 울고 있는 당신, 머리채 잡힌 야자수처럼 엉엉 울고 있는 당신 섬 속에 숨은 당신 섬 밖으로 떠도는 당신 울지 마세요 가도 가도 서쪽인 당신 당신이라고 돌아갈 곳이 없겠어요 터미널 1 - 이홍섭 / , 세계사 / 2005년 08월 - 젊은 아버지는 어린 자식을 버스 앞에 세워놓고는 어디론가 사라지시곤 했다 강원도하고도 벽지로 가는 버스는 하루 한 번뿐인데 아버지는 늘 버스가 시동을 걸 때쯤 나타나시곤 했다 늙으신 아버지를 모시고 서울대병원으로 검진받으러 가는 길 버스 앞에 아버지를 세워놓고는 어디 가시지 말라고, 꼭 이 자리에 서 계시..

<안도현> 우리가눈발이라면/너에게묻는다/연탄한장/그대에게가고싶다

우리가 눈발이라면 - 안도현 / (1991) -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 너에게 묻는다 - 안도현 / 시집 (2004) -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시인의 후기 : 단 세 줄로 된 짧은 시 는 1990년대 초반 전교조 해직교사 시절에 쓴 시입니다. 제 스스로 뜨거운 사람이 되고 싶은 꿈을 가슴 깊숙이 넣어 두고 살 때이지요. 첫 줄의 명령형과 끝 줄의 의문형 어미가 참 당돌해 보이지요? 밥줄을 끊긴 자의..